# 390
힐통령 390화
119. 마계의 왕(1)
카이는 미믹이 핵을 온전히 흡수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주위 경계를 늦추지 않았는데, 혹시라도 미믹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까 봐였다.
[진행률 98.2%……]
[진행률 99.4%……]
[진행률 100% 달성]
[미믹이 자탄의 핵 흡수를 완료했습니다.]
[미믹이 중력장의 힘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믹이 이제부터 자탄(레이드)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됩니다.]
[흉내내기 스킬의 레벨이 올라 고급 4레벨이 되었습니다.]
“오.”
인내는 쓰고 그 결실은 달콤하다했던가.
카이는 기다림 끝에 찾아온 열매를 두고 진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칭찬해 줘야 할 녀석이 있었다.
“고생했다.”
카이가 미믹의 몸을 쿡쿡 찌르며 낮게 웃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제 몸집만한 핵을 흡수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배는 안 고파?”
그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미믹은 늠름한 와이번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다.
‘미믹이 흉내내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분명 설산을 날아다니던 와이번이야.’
당연히 노말 등급의 흔한 와이번이었다.
때문에 외형 자체는 볼품이 없었고, 카이도 비행 능력 외에는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와이번은 누가 봐도 듬직해 보였다.
우선 2배 가까이 불어난 덩치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비늘.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로워 진 것 같은 파충류의 눈매는 믿음직스럽다.
“혹시 흉내내기의 스킬이 올라서 그런가?”
“끄르릉.”
미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와이번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조금 더 허스키해진 듯하다.
“뭐, 좋아. 나쁠 건 없겠지.”
카이는 미믹의 위에 올라타 녀석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가자고.”
펄럭, 펄럭!
이전보다 1.5배는 더 거대하고 튼튼한 양쪽의 날개가 천천히 휘둘러졌다.
땅바닥의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져나가는 순간.
미믹의 몸이 총알과 같은 속도로 창공을 향해 비상했다.
***
마왕성.
그곳에는 이렇다 할 이름이 없었다.
애초에 앙골모아는 그런 자잘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꼼꼼한 타입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을 ‘집’이라고 불렀고, 다른 악마들은 마왕성이라 불렀다.
마왕성에 배속되기를 바라는 악마들의 수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어깨에 힘 좀 주고다닐 중급 악마들은 이곳에서 고개도 잘 못 들었다.
그야 마왕성을 돌아다니는 상급, 최상급 악마들의 수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으니까.
동, 서, 남, 북.
사방위에서 달마다 공물로 보내오는 막대한 마정석은 마왕성의 권위를 나날이 높여주었다.
“으으음…….”
앙골모아는 훌륭한 저녁형 악마였다.
오후가 되면 눈을 뜨고 한참을 활동하다가, 아침이 되면 잠을 자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타의 모범이 되는 훌륭한 라이프 사이클.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흐으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 앙골모아는 마왕 전용의 망토를 대충 걸친 뒤, 화장실로 향했다.
168cm의 나이스한 신장에 구릿빛 피부.
양쪽 관자놀이에 박혀있는 두 개의 뿔은 마치 교회의 첨탑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늠름했다.
“오늘도 내 뿔은 멋있구나.”
마계의 그 어떤 악마도 흉내내지 못하는 길고 유려한 디자인의 뿔이었다.
그것은 앙골모아의 자랑 그 자체였다.
세안을 마친 그녀는 곧장 알현실로 향했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마수들의 두개골로 만든 옥좌에 앉았다.
“여봐라.”
“부르셨습니까.”
마왕의 부름에 최상급 악마들이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며칠 전부터 북동쪽이 요란스럽던데, 무슨 일이지?”
“전쟁입니다, 마왕님. 바시온과 스테론이 또 한 판 벌이는 모양입니다.”
“흐응?”
앙골모아가 흥미를 드러냈다.
“그 두 녀석이야 항상 그래왔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기운이 요란한데.”
“두 대공이 단단히 작정한 듯, 이번에는 전면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수천 만 마리의 악마들이 한데 모여서 싸우는 진귀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니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앙골모아가 오른손을 휘휘 저었다.
“바시온과 스테론의 기운 말고, 또 다른 기운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느꼈다.”
“예? 하지만…….”
“두 대공이 진심으로 힘을 끌어올리면, 그곳에는 다른 생물이 진입할 수 없게 됩니다.”
“닿는 것만으로 대상을 녹여버리는 맹독과 뇌전의 마기가 일대를 지배하기 때문이지요.”
“흐으음.”
그랬던가.
관심이 사그라든 앙골모아가 화제를 돌렸다.
“남부 쪽은 어떻게 되고 있지?”
“그 부근에선 해방군 녀석들의 독주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해방군이? 그건 좀 의외로구나.”
“인간의 도움이 크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키네사를 죽였다는 그 맹랑한 녀석 말이더냐.”
“아닙니다. 그 녀석의 동료인 다른 인간이라고 합니다. 하얀 사신이라고 불리는 여자라 들었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냐.”
“저희도 그것이 참 의문인데…… 결과가 그리 나오고 있으니 뭐라 말씀을 드리기가 참.”
악마들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앙골모아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구나. 나도 얼마 전에 인간 하나와 계약을 했다. 헌데 그 인간은 약하던데.”
“저희 악마들이 등급 별로 나뉘어져있듯, 인간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이를 테면 하급 인간, 중급 인간, 최상급 인간 등등으로 말입니다.”
“그런 것이더냐. 중간계와의 연결이 끊어진지 오래라 정보 갱신이 늦구나.”
“여러 방법을 통해서 최대한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만약 너희들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에 마계에 온 두 인간의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지?”
“음. 우선 남자 쪽은 키네사를 죽였다는 점을 봤을 때 명실상부, 최소 대공 급 강자입니다.”
“재미있구나. 여자 쪽은?”
“파악 결과 최상급 악마 정도의 수준입니다.”
“제법 차이가 나는구나.”
“예. 하지만 마왕님께서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뭐, 아무래도 좋다만.”
나른한 표정의 앙골모아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럼 이제 일을 시작하자꾸나.”
“예, 마왕님.”
알현실에 모인 최상급 악마들이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그들은 비정한 마계에서도 엄격한 경쟁을 통해 선별된 최상급 악마들.
앙골모아의 직속 수하들인 만큼 그 강력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우르르르릉!
그때, 마왕성의 입구 부근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악마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을 때.
콰앙! 알현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상급 악마 하나가 뛰어들어 왔다.
동시에 최상급 악마들의 마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감히 상급 따위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리 경솔하게 행동하는가!”
“죄, 죄송합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되었다. 무슨 일이더냐.”
앙골모아의 질문에 상급 악마가 침을 꿀꺽 삼키며 보고했다.
“소, 속보입니다.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그 소식에 알현실의 악마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입자? 그게 뭐지.”
“그거 말하는 거 아닌가? 남의 장소에 무단으로 들어오는 자.”
“설마. 그럼 지금 마왕성에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소리인가.”
“음……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군.”
웅성웅성.
“조용!”
시장 바닥처럼 시끄럽던 알현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앙골모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뱉어냈다.
“자세히 이야기해보아라. 침입자라니?”
“왜, 왠 미친놈이 마왕성의 입구를 무너트렸습니다.”
“입구를? 하지만 그곳은 다로스가 지키고 있을 텐데?”
“그 다로스가…… 거석의 다로스가 당했습니다!”
“호오. 여봐라.”
앙골모아가 가볍게 손을 들면서 명령을 내렸다.
“간만에 명성을 좇는 악마가 나타난듯 하니 적당히 손을 봐주도록 하여라.”
“맡겨만 주십시오.”
“저희는 마왕님의 직속 부대.”
“절대 실망시켜드리는 일이 없습니다.”
최상급 악마들의 입가로 자신만만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
“마왕성이라니…… 소설이나 만화에서나 보던 건데.”
마왕성의 외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마왕성 같았다.
뒷쪽에는 깎아놓은 듯한 절벽이 있었고, 그 위로 붉은 달이 걸쳐져있다.
‘하나, 둘, 셋, 넷…… 총 다섯 층으로 이루어져있나?’
마왕성의 층수를 세던 카이는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품으며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음?”
마왕성의 문지기인 상급 악마, 다로스가 감겨 있던 눈을 떴다.
그는 몸집이 산만한 악마였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신장이 웬만한 아파트 5~6층 정도는 되어보였다.
앉아있는 상태로도 성채의 절반 정도에 미치는 크기였으니 그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심지어 살집도 제법 있는 편이라, 성채에 딸린 거대한 입구가 그의 몸에 막혀있었다.
말 그대로 문지기의 표본 같은 존재.
그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마왕성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구인가.”
“앙골모아라고 했나? 마왕을 좀 만나러 왔는데.”
마왕을 옆집 친구처럼 부르는 카이의 언사에, 다로스가 살짝 긴장하며 물었다.
“혹시 약속이 되어있는가.”
“그런 건 안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지나갈 수 없다.”
다로스가 자신의 거대한 뱃살 위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고귀하고 위대하신 마왕님의 성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초대를 받거나 스스로 자신의 자격을 증명한 악마들뿐이다. 그들을 제외한 이들이 지나가려고 한다면.”
우르르르릉.
다로스가 살짝 자세를 교정하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세상이 진동했다.
“나, 문지기 다로스를 꺾고 지나가야 할 것이다.”
“어? 그거면 돼?”
카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음? 혹시 잘 못 들었나?”
“아니, 잘 들었어. 널 꺾으면 지나갈 수 있다고 들었는데.”
“크핫!”
다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밖에 안 되어보이는 조그마한 악마가 하는 소리니 그럴 수밖에.
물론 몸의 크기와 강함은 관련이 없다지만, 상대는 마기가 느껴지지 않는 애송이가 아닌가.
“뭐 할 수 있다면 마음껏 해보거라.”
다로스가 성채에 등을 파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럼 잠깐 실례를.”
카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로스의 앞에 섰다.
가까이 와서 보니 정말 거대하다.
고개를 수직으로 꺾어야 머리가 겨우 보일 정도의 높이였으니까.
“크흐흡.”
그런 카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다로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진심으로 밀어내려는 것인지, 소매를 걷어붙이는 모습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하는 짓이 참 귀엽군.’
고작 소매 따위를 걷어붙인다고 자신의 거구를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다로스는 진심으로 눈앞의 자그마한 악마에게 충고했다.
“부당한 지름길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고, 다른 악마들처럼 차근차근 힘을 키우며 명성을 올리다보면 자연스럽게 마왕님의 초대장을 받게 될……?”
그 순간, 돌연 기분이 붕 뜨는 듯한 기묘한 부유감이 다로스를 휘감았다.
‘……응?’
처음에는 너무 웃겨서 그런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의 몸은 ‘실제로’ 바닥에서 떨어져, 허공에 붕 떠오른 상태였으니까.
“어이구, 잘한다.”
눈앞에 있던 조그마한 악마는 제 어깨 위에서 꿈틀대는 슬라임을 연신 쓰다듬었다.
“너랑 나랑 같이 쓰니까 효과가 몇 배나 증폭된다. 그렇지?”
꼬물꼬물.
그 황당한 모습을 쳐다보던 다로스의 두 눈에 분기가 차올랐다.
“네 이놈! 무슨 잔기술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거석의 다로스가 입구를 막고 있는 한……!”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카이는 마치 벌칙을 수행하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흔히들 말하는, ‘딱밤’이었다.
‘감히 나, 문지기 다로스를 상대로 딱밤 따위를!’
다로스가 분노 섞인 노성을 터트리려는 순간.
따악!
카이의 손가락이 그의 두툼한 뱃살을 강타했다.
동시에 두 개의 중력장으로 인해 깃털처럼 가벼워진 그의 몸이 빛살처럼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중력장 해제.”
카이는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중력장을 해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깃털처럼 가볍던 다로스의 거구도 본래의 무게를 되찾았다.
콰르르르르릉!
그렇게 날아간 다로스의 거대한 신형은 마왕성의 외벽과 내벽.
그 모두를 시원하게 무너뜨렸다.
“마왕성 입구까지 고속도로 뚫렸네?”
꼬물꼬물.
새롭게 얻은 힘이 재미있었는지, 미믹이 카이의 어깨 위에서 연신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