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
힐통령 391화
119. 마계의 왕(2)
“안쪽은 던전 같이 생겼네. 아, 여기 던전인가?”
“뀨루룽.”
카이의 중얼거림에 미믹이 반응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토끼 모양으로 변한 녀석은, 카이의 정수리가 편한지 아예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다.
“자, 그럼 마왕이라는 녀석을 만나러 가볼까.”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다로스의 몸을 넘어 마왕성에 입장한 카이는 무작정 앞으로 나아갔다.
예전의 신중한 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던전의 어디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함정과 매복해 있는 몬스터들.
그건 카이라고 해도 방심하지 못할 만한 요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지금은 아니었다.
달칵!
때마침 함정이 작동했다.
원인은 카이가 멋모르고 밟은 바닥의 튀어나온 돌이었다.
함정의 발동과 동시에 복도의 벽과 천장이 뒤집히며 수십 다발의 창이 날아왔다.
콰드드드득!
하지만 함정은 카이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위험했네. 그렇지?”
어릿광대의 신발에 달려 있는 효과, ‘도약’을 통해 허공을 격하고 뛰어넘은 것.
오히려 카이보다 놀란 것은 머리 위의 미믹이었다.
상당히 놀랐는지 눈을 크게 키우고 있던 녀석은, 조금 진정되자 부드러운 앞발로 카이의 머리카락을 툭툭 때렸다.
전혀 아프지 않았고, 왜 이렇게 놀래키냐는 투정처럼 보여 귀엽기만 했다.
“하하하. 앞으로 조심은… 못 하겠지만, 그래도 이 편이 더 빠를걸.”
달칵.
말이 끝나는 것과 함께 또 하나의 함정이 작동했다.
이번엔 벽이 뒤집히며 다섯 마리의 마족이 등장했다.
“겁도 없이 마왕성에 들어오다니.”
“그 무지함은 죽음으로 사죄하라!”
“절대영도.”
쩌저적!
마족들은 등장과 동시에 꽁꽁 얼어붙었다.
마치 세르핀의 저택이 있던 마을의 얼음상들처럼.
“자, 가자고.”
두 다리를 쭉쭉 뻗어나가는 카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것이 함정이 되었든, 마족이 되었든.
총 다섯 개층으로 이루어진 마왕성의 1층을 돌파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21분이었다.
***
“크, 큰일 났습니다!”
“오늘 따라 큰일이 자주 나는구나.”
최상급 마족들이 단체로 침입자를 죽이고 공을 세우겠다며 썰렁해진 알현실.
마왕 앙골모아는 부하의 보고에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더냐.”
“치, 친위대 분들이 모조리 패배하고 도망치셨습니다!”
“음?”
그녀의 길다란 속눈썹이 한 차례 아래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갔다.
“그 녀석들이 당했단 말이냐? 몇 놈이나?”
“전부입니다. 침입자는 이미 2층을 돌파 중이며, 성내의 그 어떠한 함정도 통하지 않습니다!”
“호오.”
재미있다는 감정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건 좀 흥미롭구나. 정체는 알아냈느냐?”
“죄송합니다.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뭐, 되었다. 만나게 되면 알게 될 터. 모든 함정을 해제하고 이곳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라.”
“예? 하지만 그건….”
“친위대 녀석들도 막지 못한 녀석이다. 고작 함정 따위로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친위대는 모두 최상급 악마들.
그 중에서도 마계에서 고르고 고른, 최상급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부하가 물러가고, 알현실에 혼자 남은 앙골모아의 입 꼬리가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
“이거, 빨리 오라고 보채는 수준인데?”
카이는 갑작스럽게 생성된 계단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미 그의 손에 쓰러진 악마들이 제법 된다.
마왕은 그 한심한 작태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는지, 아예 계단을 대령해줬다.
“그럼 슬슬 마왕을 만나러 갈 테니, 들어가 있어?”
“삐잇.”
미믹이 카이의 머리카락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솜방망이에 얻어맞은 듯한 느낌에 카이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왜? 싫어?”
“삐잇.”
미믹의 순수한 눈을 쳐다보자 카이의 심장이 지르르 울렸다.
“그래도 안 돼.”
하지만 교육 방침 하나는 확실한 카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일 다 끝나면 불러줄 테니까, 들어가 있어.”
카이가 미믹을 역소환하려던 순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보물 사냥꾼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10미터 이내에 숨겨진 보물이 존재합니다.]
“오?”
스페셜 칭호인 보물 사냥꾼의 효과.
주변에 있는 보물을 알려주는 이 기능은 숨겨진 방에 대한 힌트 또한 제공해 준다.
‘그렇다면….’
카이의 눈이 주변을 쓸었다.
10미터 이내의 공간 안에서, 문이 달려 있는 장소는 단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이 문을 지키고 있던 악마 녀석, 꽤 강했지. 최상급이라고 했나?”
생각해보니 뭔가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긴 하다.
“이 앞은 위대한 마계의 왕께서 보관 중이신… 뭐라고 했었는데.”
그게 설마 보물 창고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나.
머리를 긁적인 카이는 문을 열고 안쪽으로 향했다.
길다란 복도가 나왔고, 그곳을 쭉 걸어나가자 문이 하나 더 나왔다.
끼이익, 그 문을 지나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마왕의 보물 창고에 입장하셨습니다.]
‘역시.’
눈을 반짝인 카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 붙은 은은한 횃불이 보물 창고의 내부를 여실히 밝혀주고 있었다.
“…와.”
카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보물 창고는 금화로 도배가 되어 있었으니까.
“과연, 왜 과거 사람들이 금에 미쳤는지 이해가 되네.”
횃불이 일렁일 때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은, 자신이 왜 태양을 상징하는 광석이 되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냈다.
‘이게 다 골드란 말이지?’
카이는 몸을 숙여 바닥의 금화 하나를 집어들었다.
카즈라에게 듣기로는 마계에선 금이 희귀하다고 했다.
‘금이 희귀한 지역에서 이 정도 양이라니… 진짜 어지간히도 해먹는구나, 마왕.’
눈대중으로 대충 계산을 해보자, 못해도 수백만 골드는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 유저에게 줄 리는 없지.’
아니나 다를까, 카이가 금 덩어리를 집자 경고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주인의 허가 없이 가져갈 수 없는 아이템입니다.]
[내려놓으십시오, 마왕의 분노를 살 수도 있습니다.]
“에라이.”
뭐,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기에 카이는 입맛을 다시면서 금화를 튕겨서 내던졌다.
하긴.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모여 있는 페가수스 사가 바보도 아니고, 이만한 골드가 시장에 풀리면 시장 경제가 무너진다는 것을 모를 리는 없다.
‘아마 이 보물 창고에서 유저가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극히 일부일 거야.’
실제로 금화의 바다 사이사이에는 보물들이 널려 있었다.
“삑!”
그 때, 미믹이 카이의 정수리를 박차고 튀어나갔다.
“야, 위험해!”
보물 창고에도 함정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카이는 황급히 미믹의 뒤를 따랐다.
“그건 뭐야. 또 어디서 찾았대?”
미믹이 찾아낸 것은 자그마한 반지였다.
금화 사이에 섞여 있던 것이기에, 카이 혼자였다면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뀽!”
미믹이 앞발 두 개를 내밀어 반지를 건넸다.
“나 주는 거야?”
끄덕끄덕.
“우리 미믹, 기특하네.”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카이가 반지를 집어들곤 이리저리 살폈다.
‘디자인이 되게 유려한데? 여자들이 좋아하겠어.’
실버 색상으로 이루어진 반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하트 형태로 박혀있는 알은 순수한 보랏빛 마정석.
카이는 곧장 정보를 확인했다.
[라브의 반지 - 영원]
등급 : 에픽
방어력 5
마법 방어력 5
모든 스탯 +10
착용자에게 ‘영원’ 효과 부여.
*체력이 30% 아래로 떨어질 시, 10%의 체력을 회복하고 5,000의 피해를 흡수하는 방어막 생성.
착용 제한 : 레벨 450 이상
‘생각보다 좋은 건 아니네.’
특히 햇살의 따스함 한 번으로 피를 빠르게 채울 수 있는 카이에게는 더더욱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유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5,000 데미지라… 미묘하다면 미묘하고, 쓸 만하다고 생각하면 쓸 만해.’
아마 경매장에 올린다면 못해도 수억은 주고 사갈만한 반지다.
하지만 카이는 효과를 보는 즉시 유하린을 떠올렸다.
‘변하의 기사는 다 좋은데, 성기사답지 않게 몸이 약한 것 같더라.’
그녀와 함께 사냥을 하면서 힐을 제법 자주 넣어줬기에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건 하린 씨 주는 게 낫겠어.”
게다가 지금은 자신을 대신해서 남부에서 맹활약 중이지 않는가.
이 정도 선물이라면, 그 고생에 대한 보답으로는 차고 넘칠 것이다.
‘좋아해주시면 좋겠네.’
다행히 반지는 획득 가능한 아이템이었다.
인벤토리에 잘 갈무리한 카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장비 아이템 몇 개를 더 챙겼다.
나중에 경매장에 올리면 족히 수천만 원은 받을 것들뿐이었다.
“삐빗!”
그때, 미믹이 반지 하나를 더 가져왔다.
“뭐야, 또?”
그것이 또 신통방통했던 카이가 피식 웃으며 미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그건 내가 안 쓴다고 해서 또 찾아온 거야?”
“뀨웅….”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미믹.
이에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뭐, 솔직히 라브의 반지도 사용하라고 하면 없는 것보단 낫긴 한데… 나보다는 하린 씨한테 더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이니까.’
한 명의 플레이어가 장착할 수 있는 반지는 한 손가락에 하나씩, 무려 열 개다.
반면에 현재 카이가 끼고 있는 반지는 다섯 개뿐.
각각 인어의 에메랄드 반지, 타락한 성기사의 반지, 나이트 오브 나이트메어, 성환 페트라, 해룡의 눈물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끼려면 다섯 개는 더 낄 수 있는데… 생각해보니까 딱히 반지를 구매할 생각은 안 해봤네.’
물론 대부분의 유저들이 반지 열 개를 모두 끼고 다니는 건 쉽지 않다.
일단 반지를 착용하는 이유는 당연하지만 스펙을 올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스펙, 즉 능력치를 올려주는 반지의 경우에는 매직/최소 레어 아이템.
수요가 공급보다 압도적으로 많으니 가격이 최소 수십만 원에서부터 시작한다.
“난 딱히 반지를 착용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이미 카이의 스펙 자체는 끝판왕급.
솔직히 시장에 풀린 레어 등급의 반지 몇 개 낀다고 올라갈 정도의 스펙은 한참 전에 지났다.
그것이 카이가 구태여 반지를 구매할 생각을 안 해본 이유.
‘뭐, 그래도 미믹의 성의를 봐서 이건 끼고 다닐까.’
카이는 미믹이 들고온 반지를 바라봤다.
척 보기에도 아까 가져온 반지보다, 훨씬 투박했다.
알도 박혀있지 않은 검은색 반지.
“아이템 감정.”
[주문 무효화의 반지]
등급 : 유니크
방어력 10
마법 방어력 10
모든 스탯 +15
스킬, ‘주문 무효화’ 사용 가능.(재사용 대기시간 1시간)
*주문 무효화 : 스킬 시전 후 단 한 번, 어떤 스킬이든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다.
착용 제한 : 레벨 550 이상
“어…?”
카이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이건 예상외다.
높아봐야 에픽 등급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지는 무려 유니크 등급.
게다가 반지의 효과는 카이에게도 무척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어떤 스킬이든 피해 없이 막는다고?’
물론 재사용 대기시간이 1시간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보통 전투가 1시간 이상 이어지는 경우는 전쟁 밖에 없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1시간에 한 번이면….’
카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탈 유니크급 아이템이다.
등급만 유니크지, 성능 자체는 레전더리 등급의 아이템과 비교해도 크게 꿇리지 않는다.
그것을 깨달은 카이는 미믹을 번쩍 들어올렸다.
“삐이?!”
미믹이 내려달라는 듯 바둥바둥거렸다.
하지만 카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을 제 볼에 부볐다.
“어이구, 우리 미믹이 잘했다! 완전 마음에 들어, 잘 쓸게!”
“뀨르릉!”
기쁜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미믹도 반달처럼 곱게 휜 눈으로 함께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