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94화 (394/441)

# 394

힐통령 394화

120. 군주(2)

적색여명회의 회장, 고스트가 성벽에 올라선 채 협곡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옆에 서있던 발칸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300만이라…… 직접 보니 징글징글하게 많군.”

발칸은 워리어스의 길드원들을 이끌고 시리스 성채로 합류한 상태였다.

보유한 영지 대다수가 속해 있는 남부를 지키기보다, 시리스 성채를 막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어차피 동부가 밀리면 적들이 남하하는 것은 순식간.

사방에서 물밀 듯이 내려오는 적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시리스 성채처럼 길목이 좁은 곳에서 상대하는 것이 훨씬 좋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만에 하나 이곳에서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부활 지점은 남부의 영지로 지정해놓은 상태.

적들이 남하하는 시기에 맞춰 다시 한 번 군세를 재정비, 제2의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 말도 안 되는 투석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거겠지.”

흑룡이 자랑하던 인간 자폭병은 시리스 성채에는 통하지 않는다.

협곡을 꽉 메운 성채의 높이가 일반적인 성벽보다 두 배는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량 문제에선 저희가 더 유리할 거예요.”

미네르바의 말처럼, 공성보다는 수성 측의 식량 조달이 훨씬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시리스 성채를 막고 있는 이들은 성문이 뚫리지 않기만을 기다리면 된다는 뜻.

“현재 성을 지키는 아군의 수는 23만…….”

“협곡에 한 번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은 많아봐야 7만 수준. 나쁘지 않다.”

발칸은 지평선까지 가득 채운 흑룡의 군대를 보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결국 정신력 싸움이다.’

누가 더 오래 버티냐의 싸움.

발칸과 워리어스는 이런 종류의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진정한 전사라면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전장 정도는 고를 수 있어야 하는 법이지.”

지금은 시리스 성채가 그러한 전장이었다.

“라시온 왕국의 고 레벨 유저들이 대거 지원을 와준 덕에 마냥 안 좋은 상황은 아니에요.”

미네르바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시리스 성채가 밀리는 순간 동부와 중앙으로 향하는 수십 가지의 길이 열린다.

그것은 곧 일반적인 유저들에게는 지옥이 열린다는 소리.

당연히 그 참사를 막기 위해 수많은 유저들이 시리스 성채에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알데바란 왕국이랑 흑룡 새끼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머릿수만 믿고 까부는 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줍시다!”

저들끼리 사기를 올리는 모습이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다.

“그럼 수성은 너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요인 암살을 위주로 맡겠다.”

고스트가 발칸과 미네르바를 쳐다보며 말했다.

“요인 암살이라면 성을 나서겠다는 소리인가?”

“한 두 명도 아니고 무려 300만 대군이다. 쟈오 린의 명령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들을 세밀하게 컨트롤하려면 반드시 중간 관리자가 필요해. 우린 그들을 자르겠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확실히 중간 다리가 끊어지면 커뮤니케이션에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프레이 길드의 성기사진은 탱킹을, 사제진은 후방에서 확실히 지원을 하겠어요.”

미네르바와 프레이 길드는 현재 성혈단과 잠시 헤어진 상태였다.

성혈단은 교황인 알버트가 위치한 아르칸 아카데미를 지키러갔으니까.

“뒤를 맡기지.”

같은 세계 8대 길드의 라이벌들.

적일 때는 누구보다 까다롭지만, 아군이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이 정도 수준의 병력이라면 흑룡의 머릿수가 아무리 많아도 해볼만 하겠어.’

각자의 머릿속에 긍정적인 사고가 퍼져나갈 때, 흑룡 쪽의 공성이 시작되었다.

***

미드 온라인의 공성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화려함이었다.

허나 그 단어조차도 공성을 가만히 보다보면 빛이 바래는 것이 느껴진다.

콰르르르르릉! 파지직!

수백의 마법사가 각자 주문을 외우고, 여기저기서 힐과 버프의 물결이 휘몰아치며, 궁수와 전사들의 원거리 공격이 서로를 향해 쇄도한다.

필드에서 보스를 상대하는 파티의 모습조차 화려한데, 이건 무려 수천, 수만의 병력이 함께 싸우는 전쟁.

당연히 화려할 수밖에 없었고, 그만큼 정신도 없는 무대였다.

“팔자 좋게 쉬고 있네.”

“뭐, 성채 안에 있던 놈들이 설마 전초기지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시리스 협곡으로 진입하는 입구 부근.

흑룡은 그곳에 전초기지를 세워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협곡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많아봐야 10만 명 안팎.

나머지 대군은 그곳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고스트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내려가서 요인들을 암살한다. 각자 목표는 숙지하고 있겠지?”

“물론. 그런데 위험한 회원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되려나? 무시?”

화려한 로브를 두르고 있는 크리스의 질문에 고스트가 생각에 잠겼다.

“……그 부분은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살리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버려.”

“다들 들었지? 나중에 원망하지 말고 처음부터 잘해.”

“감히 크리스 따위가 충고라니.”

“랭킹 1위한테 따위라고?”

회원들은 긴장은커녕 도리어 여유로워 보였다.

각자가 자신의 실력에 큰 자신이 있다는 소리.

“그렇게 자신 있으면 누가 더 많이 잡는지 내기라도 할까?”

“무식하기는.”

“왜, 쫄려?”

“누가 할 소리를. 좋아, 하지.”

저들끼리 의기투합을 하는 회원들을 뒤로한 고스트가 눈을 반짝였다.

“싸우지 말고 다들 잘 살아남아라.”

붉은색 가면을 얼굴에 걸친 고스트의 신형이 바닥으로 푹 꺼져 버렸다.

이어서 그가 몸을 드러낸 장소는 흑룡이 임시방편으로 세운 목책의 앞쪽이었다.

“음?”

“왜 그래?”

목책 부근을 지키던 흑룡의 길드원 하나가 동료에게 물었다.

“아니, 방금 바람이 불었던 것 같아서…….”

“그야 불겠지. 협곡이니까.”

“으, 벌써 교대하고 싶어지네.”

은신 스킬을 사용해 자연스럽게 목책을 지나간 고스트는 헤매지 않고 한 쪽의 막사로 들어섰다.

“음?”

돌연 막사의 입구 천이 흔들리자 안쪽에서 보고서를 정리하던 유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입구가 열린 듯한…….”

고스트는 혼자 중얼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유심히 확인했다.

‘행크, 레벨 428, 확실하군.’

적색여명회는 요인 암살과 정보 파악에 있어선 미드 온라인의 최고를 자부하는 집단이다.

당연히 흑룡 길드의 내부 조직도에 대해선 훤히 꿰고 있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전쟁이란 것이 모두 그런 것 아니겠나.

고스트는 자리에 앉아있는 행크의 뒤로 천천히 걸어가, 그의 목덜미에 단검을 쑤셔박았다.

“……!”

행크의 입에서 비명은 새어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새어나오지 못했다.

암살을 할 때 가장 경계해야하는 것이 소음을 통한 지원이니까.

‘침묵 스킬이 달려있는 단검, 게다가 목덜미에 정확히 찔러 넣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고 스킬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고스트는 부릅뜬 눈으로 투명화가 풀린 자신을 올려다보는 행크를 무감정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왼손으로 그의 입을 막고, 오른손으로 또 다른 단검을 쥐었다.

푸욱!

이번에 찌른 것은 심장이었다.

동시에 행크의 피부 위로 푸른 혈관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아펜투스 가시독이 묻어있는 단검이다.’

무려 유니크 등급의 무구.

서걱, 서걱!

이어서 단검을 역수로 잡고 목을 가로로 크게 한 번 베어내자, 행크는 그 흔한 반항 한 번.

소리 한 번 내보지 못하고 허무하게 폴리곤이 되어 사라졌다.

‘이제 겨우 한 놈. 그리고 이제 슬슬…….’

생각을 잇는 것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앙!

폭발음이 울리며 전초기지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적색여명회의 모든 회원들이 암살자 클래스의 고스트처럼 암살에 능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 녀석, 날뛰기는.”

특히 마법사로 위명이 높은 크리스는 대량 학살이 주특기.

‘말려들기 전에 빠르게.’

스르륵, 고스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몸이 투명하게 변해갔다.

***

“무슨 소란이냐. 그리고 자리에 모이지 않은 사람이 몇 있는 것 같은데?”

작전 회의를 진행 중이던 쟈오 린이 심기불편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부하의 보고를 귓속말로 전해들은 쿤 팽이 송구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습입니다. 아무래도 적들이 게릴라 부대를 운용 중인 것 같습니다.”

“게릴라 부대?”

쟈오 린이 코웃음을 쳤다.

“여명회 놈들이겠군.”

“그런 것으로 사료됩니다. 랭킹 1위 크리스가 시원하게 날뛰는 중이니까요.”

“자리에 없는 놈들은 모두 당한 건가.”

“예, 행크랑 막핌, 주태륜, 심개 모두 접속 종료라고 표시되는군요.”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겠지.”

“그야 당연하신 말씀을.”

쿤 팽이 눈짓을 하자, 수백의 간부와 단주들이 모두 일어나 막사 바깥으로 향했다.

현재 시리스 성채 앞에서 교전 중인 제 1, 2단주를 제외하면 3단주인 쿤 팽의 지위가 가장 높았으니까.

“소동은 금새 진정될 것입니다.”

“뭐, 크리스 정도라면 그렇겠지.”

“오히려 기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철저히 베일에 쌓여있던 여명회의 회원들 신상을 이 기회에 모두 밝히시지요.”

“적색여명회의 멤버들이라…… 그건 나름대로 재미있겠군.”

쟈오 린이 손을 뻗어 찻잔을 들어올렸다.

맑은 녹차가 담겨있는 찻잔은 그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그 순간.

서걱!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찻잔 속으로 붉은 액체 몇 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무슨!”

깜짝 놀란 쿤 팽이 손을 뻗어 마법진을 소환했다.

허나 은신을 해제하며 나타난 암살자가 한 발 더 빨랐다.

푸욱!

“큭!”

어깨 죽지에 단검이 박힌 쿤 팽이 뒤로 세 걸음을 물러섰다.

그 사이에 암살자는 또 한 자루의 단검을 꺼내 그대로 쟈오 린의 눈을 쑤셨다.

“마스터!”

쿤 팽이 어깨에 박혀있던 단검을 거칠게 뽑아 던지곤 화염의 창을 뿜어냈다.

이를 확인한 암살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물러서며 이를 피해냈다.

“괜찮으십니까!”

한달음에 달려와 쟈오 린의 상태를 확인하는 쿤 팽은 과연 충신다웠다.

“호들갑 떨지 마라.”

그를 꾸짖는 쟈오 린의 목소리는 산보라도 나온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그 차분함이 암살자, 고스트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멀쩡하다고?’

428레벨의 행크를 일격에 삭제시킨 연계기였다.

추정 레벨 460정도인 쟈오 린은 일격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체력이 70% 정도는 사라져야 정상이었다.

“……!”

시선을 올려 그의 생명력을 확인한 고스트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은신 상태에서 급소에만 정확히 스킬 샷을 찔러 넣었건만, 쟈오 린의 생명력은 고작 6% 남짓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대방의 방어력이 뛰어난가?

그럴 리 없다.

현재 쟈오 린이 입고 있는 옷은 우습지만 옛 중국의 황제들이나 입던 용포.

재봉사가 커스텀메이드한 옷으로, 외관은 멋있지만 방어력은 기타 중갑, 판금 계열 갑옷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꽤나 놀랐나보군. 몸이 굳은 걸 보니.”

부드러운 비단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피를 닦은 쟈오 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가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그리울 정도야…… 그렇지 않나, 고스트?”

“……쟈오 린.”

“미드 온라인 초기 때 몇 번 다툰 이후로는 도통 보질 못했으니, 거의 1년 반 만이로군.”

기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쟈오 린은 그 어떤 당황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암살을 감행한 고스트.

길드원들에게는 욕심내지 말고 중간 관리자만 공격하라고 했지만, 회의실 안에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욕심을 부린 것이 실수였다.

“……네놈, 대체 체력 스탯이 몇이지?”

“이런 와중에도 정보 파악이라니. 직업병이 이래서 무섭구만.”

낮은 웃음을 지은 쟈오 린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이것 참. 설마 처음부터 나를 노릴 줄은 몰랐는데.”

자신에 대한 정보를 이렇게 빨리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조금 더 중요한 무대에서 화려하게 터트릴 생각이었거늘.’

부풀어올랐던 기대감과 흥분이 빠르게 식는 기분이다.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쟈오 린이 인벤토리에서 길다란 장창 하나를 꺼내 고스트에게 겨누었다.

동시에 고스트의 눈동자가 가볍게 떨렸다.

‘이 느낌은…….’

마치 결투장에서 카이를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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