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5
힐통령 395화
120. 군주(3)
“진심 바퀴벌레 같은데.”
허공에 두둥실 떠있던 크리스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플라이 마법과 이동속도를 향상시키는 헤이스트 마법을 동시에 적용.
그리고 두 개의 공격 마법을 장착한 쿼드라플 캐스터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잡아도 잡아도…… 끝이 안 보이잖아!”
크리스가 한 번 손을 휘저을 때마다 불과 얼음의 파도가 휘몰아치며 지상을 터트렸다.
이미 그의 손에 죽어간 흑룡 길드의 유저만 무려 400여 명.
‘죄다 200~300 레벨 수준의 떨거지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마법사가 보여주는 임팩트치고는 매우 강렬했다.
“크리스!”
같은 여명회의 동료인 궁수, 잠바가 막사의 위쪽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슬슬 뺄 준비해라!”
“알았…… 크윽! 회장은?”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회장이야 알아서 잘하겠지!”
말을 하면서도 잠바의 손은 쉬지를 않았다.
속사를 이용해 네 명의 머리를 그대로 뚫어버리는 그의 궁술은 말 그대로 백발백중.
“참고로 난 400명 넘게 잡았으니까.”
“지휘관 잡는 내기 아니었나? 난 세 명 잡았어.”
“……400명 안에 지휘관이 설마 세 명도 없을까. 내가 이겼어.”
“웃기네.”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흑룡의 전초기지를 쑥대밭으로 내놓은 그들은 슬슬 물러날 준비를 했다.
째각째각.
그것은 타이머였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 고스트가 미리 맞춰두라고 한 타이머.
‘작전 소요 시간 20분이 다 끝나가. 잠바 말처럼 슬슬 뺄 준비를 해야겠네.’
크리스는 몸을 빼기 직전, 크리스마스의 산타 할아버지처럼 큰 선물을 준비했다.
“만나서 재밌었고, 두 번 다시 보지말자! 바퀴벌레 같은 놈들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홍염의 구체가 그대로 전초기지로 천천히 낙하했다.
화르르르르륵!
구체는 제법 떨어진 물건들도 모조리 태워 버렸고, 닿는 것은 그 즉시 녹여버렸다.
“450레벨 제한의 유니크 스킬, 마그마 볼이다.”
순식간에 황무지가 되어버린 아래를 내려다보던 크리스의 눈에 하나, 둘 몸을 빼는 동료들이 보였다.
고스트라면 은신을 한 채 유유히 빠져나가는 중일 터.
‘그럼 이제 슬슬 나도…….’
크리스가 몸을 빼려는 순간이었다.
풀-썩!
제법 멀리 있던 거대한 막사, 크리스가 흑룡의 본부로 파악한 곳이 돌연 쓰러졌다.
천으로 이루어진 막사가 둘로 쪼개졌으니 무너질 수밖에.
“……회장?”
크리스의 눈으로 그 안쪽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고스트의 모습이 들어왔다.
‘상대가 쟈오 린이라고?’
고스트가 쟈오 린에게 일대일로 밀린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흑룡 놈들, 또 무슨 비겁한 짓을 했구만.’
크리스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황급히 그에게 날아갈 준비를 했다.
하나, 어느새 모여든 흑룡 길드의 간부들이 그를 집중 포격하기 시작했다.
“느림의 미학!”
“목표 지정!”
“체인 라이트닝!”
디버프가 쉴 새 없이 날아들었고, 그를 향해 원거리 스킬들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야 이 멍청아! 안 나오고 뭐해!”
크리스와 함께 도망치려고 남아있던 잠바가 아래쪽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회장이!”
“저건 못 살려! 회장이 분명 위기 시에는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라고 했었지?”
“…….”
할 말이 없어진 크리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천천히 뒤로 날아갔다.
그런 그의 눈에 쟈오 린이 내지르는 창의 모습이 보였다.
공기의 결을 가르는 것 같은 쾌속하고 정확한 일격.
고스트가 스텝을 밟으며 이를 피하려 했지만, 뱀처럼 끈덕지게 따라온 창날은 결국 그의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다.
***
“고스트가 죽어요?”
미네르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미드 온라인 최고의 소수 정예 길드, 적색여명회가 반쪽짜리 성공을 쥔 채 돌아왔다.
그들의 20분 동안 죽인 흑룡의 길드원은 5천 명 정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명회의 길드원들은 고스트를 포함해 넷이 목숨을 잃었다.
전체 길드원의 수가 22명밖에 안 되는 곳임을 감안하면 지독한 손해다.
“……쟈오 린. 그놈 뭔가 이상합니다.”
크리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회장이 그놈 하나 감당 못할 리가 없어요. 특히 회장의 성격상 방심하지 않고 첫 타는 무조건 은신 상태에서 급소를 찔렀을 텐데.”
“으음. 확실히 쟈오 린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많지는 않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있던 발칸이 낮게 중얼거렸다.
“맞아. 우리 회에서도 전쟁 시작 전에 흑룡에 대한 정보는 다시 한 번 싹 다 훑었는데…….”
크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어. 사용하는 스킬이 뭔지를 모르니 직업도 몰라.”
“알려진 바로는 검사일 텐데?”
“아니야. 오늘 놈은 창을 썼어. 그리고…… 생각해 보면 이상해. 그 놈은 항상 사냥을 할 때 던전 위주로만 돌았어. 오픈된 장소에서의 필드 사냥을 철저히 배척했지.”
“본인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가는 것을 철저히 감춘 거로군.”
“그렇지. 솔직히 평소에 쟈오 린 따위한테는 관심도 없었고. 그가 유명한 것은 흑룡 길드 때문인지, 개인적인 실력은 50위에도 간신히 들어간다고 생각했으니까.”
“로그아웃 당한 고스트로부터 뭔가 연락이 온 건 없나?”
“있어, 있는데…….”
크리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메일을 그들에게 공유했다.
“쟈오 린의 스탯이 비정상적이라고?”
“이게 고스트한테서 온 메일의 본문인가요?”
“어. 녀석과 직접 싸워본 회장의 말에 의하면, 녀석의 스탯들이 매우 높으니 될 수 있으면 전면전을 피하라고 쓰여 있어.”
“스탯이 매우 높다라…… 불법 프로그램이라도 쓴 건가.”
“그런 걸 썼다면 진작 라무스에게 계정이 차단당했을 거예요.”
“으음. 하지만 전면전을 피하라고 해도 곤란하군. 우리는 성채를 수호하는 입장. 녀석과 맞붙기 싫어도 꽁지를 빼고 도망칠 수는 없다.”
“그게 문제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전은…… 어쩌면 실패한 걸지도…….”
“작전이 실패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발칸의 질문에 크리스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지워내고자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
그 순간.
“마스터! 재정비를 끝낸 흑룡 군이 다시 진격해오고 있습니다!”
“쯧, 해가 떨어진 오후에는 쉽게 가나했더니…… 하긴, 머릿수가 많으니 교대를 하면서 24시간 우릴 괴롭히는 작전을 택하겠지.”
“그런데 단순히 괴롭힐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선봉에 서있는 것이 흑룡의 마스터, 쟈오 린이에요.”
그 순간 회의실 안쪽에 모여 있던 이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젠장…… 이래서 안 좋은 예감이란.”
크리스가 머리를 짜증스럽게 긁어대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쟈오 린의 비밀을 어설프게 건드린 게 최악의 한 수가 된 걸지도.”
***
알데바란과 라시온 왕국의 전쟁이 한창인 때.
마계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쪽과 북쪽의 전쟁은 아니었다.
두 대공은 이미 모두 각자의 군세를 거느린 채 영토로 돌아갔으니까.
까드드드득!
그것은 개인과 개인 간의 전투였다.
그 규모 때문에 전쟁에 비견될 뿐.
“좋구나!”
앙골모아가 잔뜩 신난 듯한 하이톤을 뱉어냈다.
그런 그녀를 상대하는 카이의 눈동자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확실히 귀찮네.’
마왕은 과연 마왕이었다.
우선 스펙부터가 그 어떤 대공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검은 뇌전의 스테론, 번개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그의 속도를 따돌리는 민첩성.
세르핀의 빙결이나 바시온의 독에 대한 공부도 끝냈는지 아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확실히 경험은 쭉쭉 늘어나는구나.’
두 사람은 이미 마왕성을 떠나 이름을 알 수 없는 황무지에서 손을 섞는 중이었다.
스윽.
앙골모아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마치 스마트폰의 잠금 화면을 해제하는 것처럼 가벼운 행동이었다.
하나 카이는 기겁을 하며 바닥을 굴렀다.
결과적으로 그가 현명했다.
우르르릉!
카이의 뒷쪽에 있던 거대한 돌기둥이 그대로 잘려나갔으니까.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가 중얼거렸다.
“진짜 괴물이 따로 없네…….”
“그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재미있구나. 요즘의 인간들이 즐겨 사용하는 유머인가?”
앙골모아의 음성은 맑았으나,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입고 있던 마왕의 망토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으며, 바닥을 셀 수도 없이 굴러 몸에는 잔 상처가 나있고 말라붙은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태어나서 그대처럼 강한 인간…… 아니, 악마까지 포함해서 그대처럼 강한 이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구나.”
“갑자기 웬 칭찬?”
카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려 했다.
허나 앙골모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방금 전 그 공격이 본녀의 마지막 발악이었느니라. 더 이상은 그대를 상대할 힘이 없구나.”
“……진심인가?”
“나의 명예와 심장을 걸고, 진심이니라.”
앙골모아가 천천히 카이에게 다가왔다.
“그대는 정말 강하다. 무식하게 보유한 힘만 늘리는 것보다는 본인의 모든 역량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구나.”
“적응한다고 고생 좀 했지.”
카이는 앙골모아가 대련을 하기 전, 레벨을 600까지 올리면서 모아온 스탯들을 모두 분배했다.
총 325개의 스탯들.
그 스탯들을 골고루 분배한 결과, 카이는 다시 한 번 큰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힘이 3,787로.
체력은 3,012로.
지능은 진작에 3천을 넘긴 상태였으니 과감하게 패스, 민첩을 더 투자해 2,082를 찍었으며.
마지막으로 주 스탯인 신성은 4,500에 가까운 수치가 되어버렸다.
‘역시 강자와 대련을 하면 적응하는 속도가 빠르네.’
살기 위해 저 스탯들에 적응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처음엔 앙골모아와의 싸움에서 밀리던 카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깨달았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파악한 것만으로도 싸움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충고를 해줄 점이 있구나.”
“끝까지 상대를 믿지 말 것, 이라면서 갑자기 공격하는 건 아니지?”
카이의 농담에 앙골모아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본녀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런 걱정일랑 접어두거라.”
“그럼 뭔데? 충고라는 게.”
“그대는 강하지만…… 뭐랄까, 이게 느껴지지 않는구나.”
앙골모아가 자신의 손을 심장 부근에 올리며 말했다.
“심장의 떨림?”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그래. 내가 과거 마계를 정복할 때를 예시로 들어보자꾸나.”
앙골모아의 시선이 지평선을 향했다.
“서쪽의 세르핀을 상대할 때는 그녀의 고독함을 느꼈다. 누구도 믿지 않고 혼자가 되고 싶다는 외로움. 본인의 영토에서 약육강식이라는 체제를 없애려던 그녀의 부하들이 배신했기 때문이겠지.”
“배신이라고?”
“음? 그녀를 만났다면 이미 보았을 텐데? 저택 앞의 얼음상들을.”
“아아, 그게 전부 그녀의 부하인가.”
“세르핀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불신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얻게 되었지. 아마 그녀와 손을 섞어본 그대라면 알 것이라 생각한다.”
“확실히…….”
얼음 위주의 공격을 사용하는 그녀를 상대할 땐, 단순히 춥다라는 감정을 넘어선 무언가가 느껴졌다.
뼛속을 넘어 심장 한편까지 시리게 만드는 알 수 없는 감정.
“누군가와 싸울 땐 그 대상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대에게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가 않아.”
앙골모아의 두 눈이 카이를 똑바로 쳐다봤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그대는 분명 강한데, 그 정도의 강자라면 분명히 자신의 영혼에 각인시킨 신념이 있을 텐데. 그것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건…….”
자신이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당히 몬스터를 사냥하고 레벨을 올린 뒤, 스탯을 올려 강해지는 존재.
즉, 유저였으니까.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저 강해지는 것만이 목표라면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목표는 더 위쪽이 아니더냐.”
앙골모아의 손가락이 하늘을 향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올려 잿빛 하늘을 쳐다보던 카이가 중얼거렸다.
“더 위쪽이라…… 그렇지.”
자신이 노리는 것은 무려 천계의 거주자이자 이 세계의 관리자인 신이었으니까.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앙골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했다.”
“뭘…….”
그녀는 카이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자신의 왼쪽 뿔을 뚝 꺾어버렸다.
“지, 지금 뭐하는 거야?”
카이가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
“……본인의 신념조차 확고히 세우지 못한 존재는 타인이 세운 신념을 무너트릴 ‘자격’이 없는 법이니라.”
앙골모아는 고통을 억지로 참는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뿔을 카이에게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