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96화 (396/441)

# 396

힐통령 396화

120. 군주(4)

깜짝 놀란 카이가 반문했다.

“지, 지금 무슨 짓이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주면 받거라.”

앙골모아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이것이 대련이 아닌 정상적인 싸움이었다면, 난 그대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 아니더냐.”

“아니 그렇다고 뿔을 꺾다니…… 솔직히 이게 나한테 무슨 소용인지도 모르겠고.”

“말했잖느냐. 언젠가 그대에게 필요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

“……이게?”

카이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앙골모아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뿔을 받아들였다.

[마왕 앙골모아의 왼쪽 뿔]

등급 : 레전더리

마왕을 처치할 시, 매우 희소한 확률로 드랍되는 뿔입니다.

잘게 부셔서 물에 타 먹으면 마기 스탯이 개방되며, 마기 스탯이 1,000 상승합니다.

“어?”

재료의 설명을 읽던 카이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이건…… 부작용이 없잖아?’

대공 키네사의 심장은 섭취 시 마기 스탯이 오르지만, 교단과의 호감도가 최저치로 떨어진다.

하지만 마왕의 뿔에는 그러한 부작용이 없었다.

‘등급이 레전더리…… 마왕을 처치할 시 운이 좋아야지만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 그런건가.’

카이의 입장에서는 이득이면 이득이지, 절대 손해는 아니었다.

“나중에 다른 소리하기 없기야.”

“물론이다. 오히려 그대에게는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한 세계를 지배했다고 안주한 스스로에게 대한 한심함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그녀는 왼쪽 뿔의 절단면을 쓰다듬었다.

“이 뿔이 다시 자랄 때 즈음, 본녀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가 되어있을 것이다.”

“어…… 그건 다행이네.”

페가수스 입장에서는 다행이 아닐지도.

“그런데 괜찮겠어? 약해진 걸 알면 자리를 넘보는 애들도 나올 수 있을텐데.”

“괜찮다. 뿔 하나 없다고 나에게 덤빌 만큼 간 큰 악마는 없으니까.”

입가 가득 미소를 머금은 앙골모아가 물었다.

“그럼 이제 바로 인간계로 떠나는 것이냐.”

“아니. 남부에 일행이 있어서, 그곳으로 먼저 갈 생각이야.”

“기회가 된다면 또 방문해다오. 그 때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기회가 된다면 말이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카이가 천천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허공을 울린 단어들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카이는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거 참 신출귀몰한 인간이구나.”

앙골모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중얼거렸다.

***

남부의 해방군…… 아니, 이제 그들은 해방군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더 이상 소규모의 레지스탕스가 아닌 정규군 수준의 규모와 세력을 갖췄으니까.

남부에 몇 개의 영지를 통합한 그들은 영토의 이름을 그대로 엘리시온이라고 불렀다.

“뭐하는 건가?”

엘리시온에서 가장 높게 솟은 성.

그곳의 복도를 거닐던 카즈라가 무언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하늘 쳐다봐요…….”

바로 복도 벽에 딱 달라붙은 채, 창문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하린이었다.

“비라도 내리나?”

“마음 속에는 내릴지도…….”

“……??”

남부의 전선을 휘젓고 남쪽의 사신이라는 무서운 이름을 얻은 그녀였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이런 멍한 모습은 카즈라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전장에서는 분명 그 누구보다도 존경할 만한 인물이거늘…….’

아무리 해방군의 악마라고 하더라도, 마족 본연의 ‘강함’을 동경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저 자신보다 약한 악마를 벌레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를 뿐.

덕분에 유하린은 엘리시온에서 많은 악마들에게 존경을 받는 중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잠깐.”

카즈라가 가던 길을 가려고하자, 유하린이 몸을 돌려 그를 불러세웠다.

“나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뭐지?”

“악마들도 연애를 해?”

“흐음.”

걸음을 멈춘 카즈라는 몸을 돌리며 이에 대꾸했다.

“대다수는 안 한다. 하지만 연애를 하는 특별한 녀석들도 있지. 개중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결혼하는 더 특별한 놈들도 있고.”

“그렇구나. 그럼 한 번 들어봐봐. 만약 남자 악마가 여자 악마한테 고백을 해서 서로 연인이 되었어.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남자 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으면 어떻게 된 걸까?”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남자 쪽이 나쁜 거 아닌가?”

“역시!”

유하린이 두 주먹을 앙 쥐며 죄 없는 복도 벽을 때렸다.

그때마다 성이 우르릉, 이상한 소리와 함께 울렸다.

“악마도 이건 좀 아니라고 하는데……!”

“아니…… 진심으로 성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 그만 때려라.”

카즈라의 만류에 겨우 두 손을 멈춘 유하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성의 악마 하나가 달려와 카즈라에게 말했다.

“카즈라 님! 신의님께서 오셨습니다.”

“신의라면……?”

“예. 지난 번에 엘리시온의 수만 환자들을 단번에 치료해 주신, 그 신의(神醫)님이십니다!”

힐끗.

카즈라는 대꾸 대신 고개를 돌려 유하린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신의라는 말에 귀가 쫑긋한 유하린은 악마에게 성큼걸음으로 다가갔다.

“어디예요.”

“예, 예?”

유하린의 서늘한 목소리에 바짝 얼어붙은 악마가 반문했다.

“지금 어디있냐구요, 카이 님.”

“5, 5층의 응접실에…….”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유하린은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

“카이 님!”

분명히 미웠는데.

만나면 왜 연락 안 했냐고 조금 삐진 척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자신을 보면서 환한 웃음을 짓는 그를 보자 미운 감정들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제 다 끝나신 거예요?”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의 모습이 이럴까.

카이는 한달음에 달려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하린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네. 하린 씨가 남부에서 고생해 주신 덕에 제 일은 다 끝났습니다.”

“헤헤, 다행이예요.”

소중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다.

유하린은 그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베시시 웃었다.

“아, 참.”

살짝 발그레해진 유하린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힌 카이가 인벤토리를 뒤졌다.

“혹시 괜찮으시면 이거 쓰실래요?”

“이, 이건…….”

반지를 바라보는 유하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것도 잠시, 눈물이 핑 돈 그녀는 황급히 얼굴을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 님한테 이런 얼굴 보여주기 싫어.’

실시간으로 눈이 퉁퉁 부어오르는 꼴사나운 모습이라니, 절대로 싫다.

유하린은 조심스럽게 두 손을 내밀어 반지를 받아들였다.

“……예뻐요.”

은색을 베이스로 이루어진 반지에는 보라색 알이 박혀 있었다.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그 반지의 이름 또한 낭만적이었다.

‘영원이라니.’

이것은 흡사 프로포즈가 아닐까?

잠시 울먹거리던 유하린의 입가에서 또 주책맞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헤헤헤…….”

괜히 서운하고, 슬프고, 울다가 웃고.

그 짧은 시간에 다양한 감정을 느낀 유하린은 본인이 생각해도 웃긴지 점점 더 크게 웃었다.

“좋아해 주시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사실 그렇게 좋은 물건은 아닌데…….”

“아니에요. 이 반지도 무척 마음에 들고…… 또 이런 건…… 누가 줬는지가 중요하잖아요오…….”

끝에 가서는 거의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반응에 카이도 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에 남부에서 고생해 주셨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지.’

주변을 둘러보던 카이가 물었다.

“그럼 이곳에서의 일은 다 끝나신건가요?”

“네. 언제든지 원하실 때 떠나시면 돼요. 그러고 보니…….”

유하린이 그제야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기사들은 보고 계세요? 요즘 라시온 왕국 상황이 많이 안 좋던데…… 시리스 성채도 오전에 함락되었고요.”

“예. 그래서 때마침 잘 끝난 것 같아요. 빨리 돌아가 봐야죠.”

“돌아갈 생각인가.”

카즈라가 응접실로 들어오면서 물었다.

“가봐야지. 이곳에서의 볼일이 끝났으니까.”

“……이번에 가면, 영영 못 보는 건가?”

“글쎄? 기회만 된다면 또 오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만큼 경험치가 풍부한 곳은 딱히 없으니까.

“그럼 기대하겠다. 세르핀 님께서도 잘 가라고 전해달라고 하시더군.”

“뭘 또 그렇게까지 영영 못 볼 것처럼 말해.”

피식 웃음을 터트린 카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다. 이제야 기반을 마련했으니, 엘리시온의 뜻을 더욱 더 널리 퍼트려야지.”

씨익 웃은 카즈라가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기왕 갈거면 한 번 보고가지 그러나?”

“어딜?”

“따라와 봐라.”

두 사람을 이끈 카즈라는 5층의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남부의 영지 몇 개가 통합된 엘리시온.

그곳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고 거대한 도시가 바로 그들이 위치한 장소.

“이쪽으로.”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은 카즈라가 두 사람을 테라스 난간 쪽으로 안내했다.

“뭐, 풍경도 나쁘진 않은 것 같…….”

아무 생각없이 난간 쪽으로 다가간 카이와 유하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진짜다! 신의님이셔!”

“옆에 남부의 사신님도 계신다!”

“꺄아아아악!”

“저희에게 살아갈 희망과 땅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귓가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함성이 도시를 뒤덮었다.

테라스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광장.

그곳에는 악마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었다.

“이, 이게 다 무슨…… 저게 다 몇 명…….”

“못해도 10만은 될 거다. 신기하지? 신의가 왔다는 소식 하나만 듣고 부랴부랴 모인 숫자가 저 정도다.”

엘리시온에서 카이의 명성은 거의 건국 시조 급이나 다름없었다.

다 죽어가는 엘리시온의 수만 악마들을 단 하루 만에 기적처럼 살려낸 의술의 신.

게다가 남부의 사신은 또 어떠한가.

그들이 지금 서있는 대지를 점령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전쟁 영웅이었다.

“카이! 카이! 카이!”

“유하린! 유하린! 유하린!”

“저, 저 이런 건 처음이예요…….”

10만 악마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연호하자, 유하린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악마들을 쳐다보고, 카이를 쳐다보더니, 또 손에 들고 있던 반지를 쳐다봤다.

‘하린 씨는 표정이 참 다양하시네.’

그런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카이가 그녀의 손아귀에 있는 반지를 쳐다봤다.

“반지는 안 끼세요?”

“어? 어어…….”

카이의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힌 유하린은 고개를 돌려 악마들을 쳐다보더니, 이내 용기를 얻은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카, 카이 님만 괜찮으시다면! 직접 끼워쥬세효! 하읏!”

얼마나 떨면서 말했는지, 끝에 가서는 아예 혀를 깨물었다.

많이 아팠는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먹거리는 유하린.

카이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어이구, 말 천천히 하셔도 되는데. 괜찮아요? 많이 아프죠?”

“네에…….”

부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유하린.

카이는 그런 그녀를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반지를 도로 가져갔다.

“손 주세요.”

“네에에…….”

부끄럽게 내밀어지는 유하린의 손목을 부드럽게 받친 카이가 생각했다.

‘손…… 엄청 부드러우시네.’

새삼스럽게 그녀가 여자라는 생각이 확 든다.

동시에 카이의 심장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상황만 보면, 마치 자신이 프로포즈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것도 무려 10만 명의 악마들 앞에서.

“그, 그럼 끼워드릴게요. 반지.”

“네…… 네에!”

바짝 기합이 든 두 사람은 시선을 처리하는 것까지 뻣뻣하게 느껴졌다.

“어어…….”

막상 반지를 끼워주기전, 카이는 고민했다.

‘어느 손가락에 끼워드려야하지?’

왼손 약지는 누가봐도 커플링을 끼는 자리 아니던가.

그래서 그가 생각한 자리는 새끼였다.

‘인터넷에서 본 적 있어.’

왼쪽 새끼손가락에 끼우는 반지는 변화, 기회를 뜻한다고.

마침 변화의 기사인 그녀와 잘 어울리기도 한다.

“그럼…… 새끼에 끼워드릴까요?”

카이의 질문에 유하린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길다란 속눈썹이 한 번 깜빡였고, 투명한 눈망울이 거칠게 좌우로 흔들렸다.

“약지이…….”

“네?”

“약지에 끼워주세요.”

마지막 말은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하게.

“아, 네……!”

유하린의 박력에 밀린 카이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폭발하기 직전.

“……고마워요.”

자신의 왼손을 가슴팍에 꼬옥 묻으며, 살포시 웃는 유하린의 꽃 같은 미소가 만개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이의 심장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흡사 100미터 달리기를 끝냈을 때와 비슷한 심장 박동을 느낀 카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축하한다.”

두 사람의 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장면을 목격한 카즈라가 무미건조하게 축하를 건넸다.

“아, 응, 고맙다.”

대체 무엇을 위한 축하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는 예의상 대꾸했다.

“크흠, 그럼 이제 갈까요?”

카이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좋아요. 어디라고 해도, 갈 거예요.”

아직까지 정신은 꽃밭을 뛰고 있는 유하린이 말했다.

“예, 그럼 잠시 실례를.”

유하린의 어깨에 손을 얹은 카이가 그대로 입술을 달싹였다.

“신출귀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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