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97화 (397/441)

# 397

힐통령 397화

120. 군주(5)

카이가 신출귀몰을 사용해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라시온의 수도, 레이아크였다.

왕궁의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은 돌연 허공에서 두 남녀가 튀어나오자 무기를 뽑으며 경계했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하나 카이의 얼굴을 제대로 보는 순간, 두 기사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카, 카이 백작님!”

“실종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래도 인간계라고, 코로 들이쉬는 공기부터가 다르다.

‘훨씬 가벼워.’

그것은 공기뿐만이 아니었다.

몸 전체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다.

시험 삼아 가볍게 점프를 하자, 몸이 제자리에서 50㎝ 정도는 붕 떠올랐다.

“오.”

“카이 님도 몸이 가벼워지셨어요?”

“네, 마계가 확실히 수련하기에는 좋네요.”

카이가 기사들을 향해 정중히 요청했다.

“바로 폐하를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현재 회의실에서 보고를 받고 계시는 중입니다.”

기사들이 서둘러 무기를 갈무리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길을 앞장선 카이는 곧장 왕궁의 거대 회의실로 향했다.

문이 열리기 직전, 안쪽에서는 왕궁답지 않게 고성이 간간이 터져 나왔다.

“그,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시종이 힘차게 문을 열자 모든 귀족과 베오르크 국왕의 시선이 쏠렸다.

“아니…….”

“동부의 카이 백작 아닌가!?”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이럴 때…….”

“도망친 게 아니었나?”

“도망을 쳤다면 이런 시기에 돌아왔겠나?”

“조용.”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단번에 휘어잡은 베오르크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 백작.”

“예, 전하.”

카이가 곧장 허리를 반듯하게 숙이며 대답했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것인가.”

미드 온라인의 귀족이란 단순히 먹고 노는 권리만 지닌 존재가 아니다.

권리가 있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도 있는 법.

그 어떤 귀족도 전쟁이라는 굴레 앞에서는 잔꾀를 부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의 실종은 많은 구설수가 퍼지기 딱 좋은 소스였다.

동부의 신성, 동부 지역을 통치하는 대영주가 전쟁이 났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평소 카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극소수의 귀족들은 수차례나 그를 지탄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카이의 입에서는 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이 그를 싫어하는 귀족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저, 저…….”

“쯧. 역시 모험가들은 귀족에 어울리는 존재들이 아니야.”

“제 영지민들이 얼마나 죽어 나갔을지도 모르는데 저런 뻔뻔한 발언이라니…….”

베오르크 국왕은 카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다녀올 곳이라…… 그곳이 국가의 전쟁을 등한시할 정도로 중요한 곳이었는가.”

“물론 아닙니다.”

카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올 수 있었다면 진작 왔을 겁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간 것도 자의가 아니었고, 때문에 돌아오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입니다.”

“대체 어딜 다녀왔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카이가 해룡의 주인이라는 건 라시온의 귀족이라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해룡의 속도라면 저 대륙의 끝, 암흑 지대까지도 길어야 열흘이면 날아갈 수 있다.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카이는 자신을 쳐다보는 귀족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계입니다.”

“무…… 무슨!”

“마, 마계?!”

깜짝 놀란 귀족들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예. 어둠 추적자의 수장이신 물의 현자, 타르달 님의 요청으로 암흑 지대에 있는 뮬딘 교의 신전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뮬딘 교 잔당들의 함정에 걸려 마계로 강제 소환됐었습니다.”

“……조사라, 확실히 그런 요청을 했다는 걸 듣기는 했다.”

베오르크는 그것으로 증명이 끝났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

“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대비해야 할 대영주가 한마디 소식도 없다가 늦게 나타난 것은 분명한 죄. 이에 대한 책임은 모든 전쟁이 끝난 후에 묻겠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래, 이곳으로 곧장 찾아온 이유는 상황을 알고 싶어서겠지?”

“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사의 질, 장군의 능력, 더 유리한 지형……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정보다.

‘현재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어.’

물론 커뮤니티나 각종 뉴스 기사, 혹은 게임 채널 등에서도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본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실제로 전쟁을 치르는 두 국가의 왕궁만이 파악한 정보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한 카이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럼 우선 들어라.”

베오르크가 손짓하자 라시온의 군복을 입고 있는 장군 한 명이 수정구를 조작했다.

그러자 곧 수정구 위로 거대한 입체 지도가 투영되었다.

“현재 각 지역의 상황입니다.”

“음…….”

전황이 한눈에 확 들어오는, 디테일하면서도 거대한 지도였다.

지역마다 옆에 함께 표시된 그래프는 적군과 아군의 병사 수 차이부터 승률까지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빠르게 지도를 훑은 유하린의 안색이 크게 어두워졌다.

“어떡하죠? 생각보다 많이 불리하네요.”

중앙은 아직까지 잘 버텨주고 있었지만, 서부는 이미 아래쪽까지 뚫린 상태였다.

시리스 성채가 함락된 동부 역시 파죽지세로 적의 공격을 허용하는 중.

‘진군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네.’

이것으로 대충 정보는 모두 파악했다.

카이는 이 자리에서 더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고개를 숙였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 멘트는 다분히 이별을 고하는 사람의 것 같았기에, 베오르크 국왕이 물었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가려는가?”

“가야죠.”

카이의 시선은 입체 지도 위, 그중에서도 동부 도시에 꽂혀있었다.

‘리버티아와 아르칸이 제일 위험하네.’

특히 아직까지 천계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아르칸 도시에는 헬릭과 라샤가 있을 수도 있다.

그녀들을 제외하고도 태양교의 교황이 거주하는 곳.

쟈오 린이 미치지 않은 이상 그를 죽이거나 인질로 삼진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럼 동쪽부터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카이의 담담한 목소리에 귀족들이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시작이라니…… 무슨 말인가?”

귀족 하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카이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물론 대청소죠.”

* * *

카이가 인간계로 돌아오기 수 시간 전, 아르칸 아카데미 내부의 분위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흐흐흑,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무, 무슨 소리야. 놈들이 제정신이라면 감히 이곳을 건드리진 못할걸?”

아르칸 아카데미.

현재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학원 도시로, 각 나라와 제국의 귀족과 상인, 왕족과 황족이 교육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곳이다.

하지만 알데바란과 라시온 사이에서 전쟁이 터지며 모든 수업이 무기한 중지되었다.

학생들의 안전을 중요시하는 알버트의 지휘 아래 많은 학생이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갔지만.

개중에는 미처 돌아가지 못하고 학원 안에 고립된 학생들도 제법 많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문의 지위가 낮거나, 귀족이 아닌 상계의 자식들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하지만 알데바란의 흑룡 군은 무척 잔혹하다고 들었는데…….”

“여긴 태양 교의 신전이 들어서 있는 지역이야. 설마 여기서까지 칼부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학생들은 불안감을 느껴야만 했다.

거대한 강당에 삼삼오오 모인 학생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불안을 잠재웠다.

“헬릭.”

푸른 머리칼의 소녀, 라샤가 친우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돌아가자. 천계에서 지켜보다가 일이 다 끝나면 다시 내려오자. 응?”

“…….”

라샤의 부드러운 설득에도 불구하고 헬릭의 표정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녀는 팔짱을 척 끼더니, 턱 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라샤여, 저곳을 보거라.”

고개를 돌린 라샤의 시야로 구석에 모여 있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그들 또한 미처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지 못한 학생들.

하지만 다른 학생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국가였다.

“젠장, 알데바란 놈들 왜 굳이 전쟁 같은 걸 일으켜서.”

“수백 년 만에 찾아온 평화의 시기란 말이다.”

“쯧. 우리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이, 적들이 오면 너희가 나가서 말려라. 같은 국가 사람이니까 죽이진 않겠지.”

당연히 알데바란 국가의 학생들을 쳐다보는 눈길이 아니꼬울 수밖에 없었다.

개중에 성격이 급한 몇몇 이들은 당장에라도 손이 올라갈 기세였다.

“저런 꼴을 보고 내가 어찌 마음 편히 천계로 올라갈 수 있겠느냐.”

“……하지만 인간들의 일이야. 너무 깊게 관여하는 건.”

“라샤여.”

고개를 돌린 헬릭의 얼굴 위로는 부루퉁한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 진중한 음성에 움찔한 칼 라샤가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자신의 신도들을 모두 잃고 그 충격으로 수백 년간 스스로를 봉인했던 그녀였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그녀 역시 헬릭 못지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신이야. 인간들의 일에 너무 개입하면 좋지 못하다고.”

“그걸 누가 안단 말이냐.”

헬릭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우리가 신인 거, 여기서는 아무도 모른단 말이다.”

“…….”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설득력이…… 있어!’

설마 헬릭이 자신을 설득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칼 라샤는 감회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과 함께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뭐, 뭘까, 이 기분.’

옆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항상 챙겨주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훈계를 하다니.

“그, 그래도 인간들의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잖아. 인간이 하는 일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고.”

“응? 호른과 이스카를 말하는 것이더냐?”

헬릭의 순진무구한 질문에 라샤는 결국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그녀는 잠시 이마를 짚더니 물었다.

“그래서 뭐 어쩌고 싶다는 거야?”

“학생들이 다들 너무 불안해하는구나.”

지금에야말로 자비와 선을 관장하며 카리스마가 넘치는 태양신인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

후으응!

콧김을 세게 뿜어낸 헬릭이 강당의 구석 자리로 당당하게 걸어갔다.

“이보거라!”

분위기가 살벌한 현장에 도착한 헬릭이 우렁차게 말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들을 인질로 잡으면 저쪽에서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할 것 같은데?”

“이보거라.”

“나는 인질로서 가치가 없어. 가문도 변방의 남작 가문이라고.”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판단할 문제지.”

“지금 해보자는 거냐?”

“얼씨구, 역시 알데바란 놈이라 그런가, 한 대 치겠다?”

“아, 아무도 내 말이 안 들리는 것이더냐?!”

헬릭이 폴짝폴짝 뛰며 학생들의 어깨너머로 소리쳤다.

수차례 말이 씹힌 그녀는 상처라도 받았는지,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응? 이 녀석은…….”

그제야 헬릭의 존재를 알아챈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품속에서 저마다 사탕과 과자를 하나씩 꺼냈다.

“자, 이거 줄 테니까 저리 가 있어.”

“이빨 상하지 않게 아껴먹고.”

“먹고 나서 양치해라.”

“응응, 알겠느니라.”

품 한가득 과자와 사탕을 안아 든 헬릭이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오자, 라샤가 이마를 짚었다.

‘카이 님, 제 친구 어떡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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