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98화 (398/441)

# 398

힐통령 398화

120. 군주(6)

라샤는 사탕을 한아름 안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헬릭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헬릭…….”

“응……? 핫!”

그제야 자신의 임무(?)를 재차 떠올린 헬릭은 과자와 사탕을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다시 다녀오겠느니라.”

“응…… 힘내.”

라샤의 응원을 뒤로한 헬릭이 다시 학생들의 무리로 달려갔다.

“에잇! 지금 과자가 중요한게 아니니라!”

헬릭이 빼액 소리를 지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라는 의미였느니라. 대체 이게 무슨 짓이더냐. 이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지만 이 녀석들은 알데바란의…….”

“그래서?”

헬릭이 입을 연 학생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명색이 신이라 그런지,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한 학생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이 이번 전쟁이 일어나는데 지대한 공헌이라도 했더냐? 저 소녀를 보거라.”

헬릭의 손가락이 한 소녀를 가르켰다.

알데바란에서 상단을 운영하는 가문의 딸로, 수많은 타국의 귀족들에게 둘러쌓이자 울먹거리는 중이었다.

“다들 부끄러운 줄 알거라.”

헬릭의 조막만 한 몸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카리스마에 모두가 움찔했다.

“게다가 프레스콧 교수의 도덕 시간에 배우지 않았더냐? 붕…….”

슬쩍 라샤를 쳐다보자, 그녀가 입 모양으로 ‘붕.우.유.신’이라고 또박또박 전해주었다.

‘고마우니라.’

눈짓을 보낸 헬릭이 다시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

“붕우유신! 벗 사이에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고, 믿음이 있는 것 아니었더냐. 그저 시험에 나오는 문장이라 외웠던 것이냐?”

“…….”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자신들의 잘못을 정면에서 꾸짖자, 그제야 부끄러운 마음이 생긴 학생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뱉어냈다.

“아니, 우리도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는데…….”

“쯧, 실수했다. 그냥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던 거였어.”

“사과는 내가 아니라 저들에게 해야지.”

헬릭이 턱을 까딱거리자, 학생들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다. 말이 좀 심했네.”

“내 생각이 좀 짧았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극적인 화해를 이룬 학생들은, 헬릭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꾸짖어줘서 고맙다.”

“다음에 사탕 하나 더 주마.”

“음음, 바람직하구나.”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헬릭에게 라샤가 다가갔다.

“잘 해결됐네.”

“아직 머리가 덜 굳어서 그런지 몰라도 말을 하면 듣는구나. 큰 놈들은 고집이 쎈데 말이지.”

“너가 말하니까 진짜 안 어울려.”

키득거리며 웃은 라샤가 헬릭에게 그녀의 과자를 돌려주었다.

그때, 강당이 크게 뒤흔들릴 정도의 폭음이 도시를 뒤덮었다.

***

“흐음.”

겉보기에도 성스러운 백색 성채를 바라보는 남자는 흑룡 길드의 제 3단주, 쿤 팽이었다.

“단주님, 어떻게 할까요?”

부하의 질문에 쿤 팽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난 리버티아로 가겠다. 3단을 이끌고 아르칸을 정복해라.’

쟈오 린이 헤어지기 전에 남겼던 명령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도시인 아르칸보다, 리버티아에 훨씬 더 높은 점수를 매겼다.

그야 아인종들을 노예로 삼을 시 돈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불법이지만, 제대로 성공만 시키면 천문학적인 돈을 굴릴 수 있을 것이다.

‘용주께서 리버티아로 간 것은 이해가 가지만…….’

막상 쿤 팽도 눈앞의 성채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딱히 병사들이 방어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성채 전부에 마법 방어막이 둘러져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과거 골리앗과 스팅의 기습으로, 인어족이 카이의 영지에 둘러놓은 방어막이었다.

“저 알 수 없는 방어막이 생각보다 훨씬 단단합니다.”

“……창과 방패라 이건가.”

쿤 팽이 피식 웃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잊었느냐.”

흑룡 길드 제3단, 흑봉단(黑蜂團).

이름 그대로를 직역하면 ‘검은 벌의 집단’이 된다.

‘용주께서도 참 짓궂으시지.’

흑룡 길드에는 수십 개의 단이 있다.

그리고 제1단을 제외한 모든 단들은 다른 길드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제2단인 흑투단(黑鬪團) 같은 경우는 워리어스 길드를.

제3단은 단연 과거의 검은 벌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 이하의 단들도 모두 마찬가지.

이 기획이 설립된 건 무려 1년 반 전, 쟈오 린이 히든 클래스 군주를 얻은 직후였다.

이어서 흑룡 길드를 세운 그는 말도 안 되는 머릿수를 내세워 하나의 길드 아래에서, 여러 개의 길드를 키우는 계획을 설립했다.

남들이 볼 때는 흑룡 길드 하나 뿐이지만, 실상은 그 안에 스무 개 정도의 길드가 있는 셈.

잘나가는 대형 길드들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것은 물론, 그들의 영상을 보며 전술과 전법 또한 고스란히 가져온다.

그것이 바로 흑룡 길드가 시간이 갈수록 강대한 힘을 자랑하는 이유였다.

기존에 잘나가는 것을 그대로 가져오는데 그 숫자까지 많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크나큰 벽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일단 큰 것부터 한 방 선물할까.”

말을 마친 쿤 팽이 왼손에 거대한 나무 스태프를 들었다.

저주받은 고목나무를 수 개월간 담금질하여 만든 스태프로, 등급은 무려 유니크.

게다가 주문력 150% 상승이라는 엄청난 옵션까지 붙어 있는 그의 보물이었다.

“파이어볼.”

어지간한 화속성 마법사라면 모두가 배우고 있는 파이어볼이 그의 손끝에서 생성되었다.

허나 그의 파이어 볼은 여타의 것들과 달랐다.

기껏해야 야구 공 크기여야할 파이어볼은 무식하게 덩치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피이어볼은 지름 5미터의 거대한 마법이 되었다.

“가라.”

쿤 팽이 손목을 살짝 튕기자, 거대한 파이어볼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날아가면서 가속이 붙은 화염구는 그대로 아르칸의 성채 입구를 들이박았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하나 성채에는 그 흔한 그을음조차 남지 않았다.

“방어막이 생각보다 튼튼하군.”

쿤 팽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함락하는 맛이 있을 것 같다.

***

우르르릉, 우릉!

강당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서로를 꼬옥 안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학생들이 있는가하면,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학생들도 있었다.

마법 증폭기를 통해 안내 문구가 흘러나왔다.

[교수진들이 현 사태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학생 분들은 모두 안전한 강당 안에 모여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안전한거 맞아?”

“젠장, 무너지면 다 죽는거 아냐?”

“그냥 나가서 신분 증명하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학생들이 패닉에 빠지자 이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헬릭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신성력을 사용해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작정이었다.

탁!

하나 라샤가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손등을 때렸다.

“안 돼.”

“아주 조금이니라. 저들의 불안한 마음이 진정될 정도만…….”

“안 된다고.”

철옹성 같은 그녀의 반대에 헬릭은 입을 삐죽 내밀며 손을 내렸다.

“라샤는 인간들에게 매정하구나.”

“누군 안 도와주고 싶대?”

라샤가 코 끝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난 인간들보다 내 친구가 더 소중해. 후회는 한 번이면 충분해.”

“…….”

할 말이 없어진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움. 솔직히 과민반응처럼 느껴지지만, 나를 생각해서 그런거니 알겠어.”

“알아줘서 고마워. 빨리 진정됐으면 좋겠다.”

“그러게 말이다.”

우르르릉!

하지만 두 소녀와의 바람과는 반대로, 공격은 더욱 더 거세졌다.

“어이. 아까보다 소리가 더 커지지 않았어?”

“진동도 더 심해졌는데…… 대체 밖에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학생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죽였다.

왠지 숨을 크게 내쉬는 순간, 폭격이 재개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치지지직.

멈춰있던 안내 문구가 다시 흘러나왔다.

[현재 교황님이 적군과 교섭 중이십니다. 학생 분들은 교수들의 인솔에 따라 안전한 장소로 질서있게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강당의 문이 열리고 교수들이 재빨리 들어오며 학생들에게 손짓했다.

“자, 어서 모이거라!”

“이게 끝이냐? 더 이상 없지?”

“잘 따라오거라.”

아르칸 아카데미의 중앙 부분에 위치한 강당은 크고 거대하며 안전하다.

‘그런데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라면…….’

‘교황님이 기거하시는 신전 밖에 없잖아?’

머리 좀 돌아간다는 학생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교수들도 분명 그 모습을 봤지만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말을 아꼈다.

“단주님, 찾았습니다.”

“예, 학생들과 선생들로 보이는 이들입니다.”

돌연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교수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두 가슴팍에는 흑룡의 엠블럼을 달고 있는 이들이다.

이에 당황한 교수들이 학생들을 보호하며 그들을 경계했다.

“너희들이 어떻게 여기에…… 교황님은 어디 계시지?”

“아아, 협상은 무사히 끝났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건드린답니까?”

흑룡 길드원들이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헌데 협상이 무사히 체결되기 전에 우리가 성문을 박살을 내버려서…… 당분간 우리가 이곳에 머물면서 교황님과 학생 분들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귀한 분들인걸 아니 정중하게 보호하고 모실 겁니다. 각자의 집으로도 돌려보내드릴 거고…… 물론 그 과정에서 합당한 수고비 정도는 받아야겠지만.”

“……!”

결국 말이 좋아서 보호지, 인질로 삼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교수들이 분노하는 순간 한 무리의 마법사들이 새롭게 걸어왔다.

“단주님을 뵙습니다.”

선두의 인물을 발견한 흑룡 길드원들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선두의 남자, 쿤 팽은 학생들의 수를 헤아려보더니 물었다.

“이게 도시 내부의 학생들 전부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적군.”

“아무래도 고위 귀족들의 자제는 이미 본국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역시 있는 새끼들이 더한다니까.”

쿤 팽의 농담에 부하들이 껄껄 웃었다.

“……굉장히 큰 실수를 저지르는군.”

사회학 교수의 나즈막한 경고였다.

“음?”

자그마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쿤 팽은 이를 들었다.

그는 불량한 자세로 교수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지금 실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대륙에 태양교를 비호하는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각 대륙의 귀족 자녀들. 분명 후회할 일이…….”

“사람이 참 웃긴게, 남의 잘못은 눈에 잘 들어오면서 정작 자신의 잘못은 잘 모르단 말이지.”

화악! 단숨에 교수의 멱살을 잡아챈 쿤 팽이 으르렁거렸다.

“커억…… 컥!”

“이쪽에서 정중하게 모셔줄 때, 닥치고 있어라. 난 학생들이랑 교황님만 챙기라고 명 받았지, 너희 교수들까지 신경쓰라는 말은 못 들었으니까.”

“쿨럭, 쿨럭!”

땅에 내동댕이쳐진 교수가 숨을 몰아쉬었다.

“교수님!”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헬릭과 라샤였다.

쿤 팽을 노려보던 헬릭이 소리쳤다.

“그대는 노인공경도 모르느냐!”

“알지. 아니까 경고로 그쳤지. 안 그랬으면…….”

스윽, 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아가씨도 무사히 집에 돌아가고 싶으면 우리 말 잘 따라줘야 해. 착하지?”

쿤 팽이 헬릭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다.

타악! 헬릭이 그의 손을 쳐냈다.

“허락 없이 내 머리에 손대지 말거라.”

그녀가 머리를 허락한 이는 몇 안 되며, 그 중 인간은 단 한 명뿐이다.

“……하, 이 아가씨 좀 귀여우시네.”

부하들이 지켜오는 앞에서 자존심이 상한 쿤 팽이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어?”

그런데 이상하다.

잘 나아가던 손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못 들었냐.”

동시에 제삼자의 스산한 음성이 쿤 팽의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그 음성보다도 차가운 감각이 팔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딱, 딱딱!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상인데, 쿤 팽만이 알 수 없는 한기를 느끼며 이빨을 부딪쳤다.

한겨울에 호수에 입수한 것 같은 끔찍한 수준의 냉기였다.

쩍, 쩌저적.

“손대지 말라잖아.”

쿤 팽의 왼쪽 팔 전체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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