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399화 (399/441)

# 399

힐통령 399화

121. 일당백만(1)

“이건 나만 할 수 있거든.”

순식간에 쿤 팽의 팔을 얼려 버린 존재, 카이가 오른손을 뻗어 헬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헬릭의 표정이 녹아내리는 초콜릿처럼 흐물흐물해졌다.

“흐어어…… 이, 이 느낌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오구오구 장인만이 줄 수 있는 그리운 손맛!

가만히 머리를 내주다보면 잠이 솔솔 오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으으아아…….”

뜨끈뜨끈한 욕탕에 들어간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던 헬릭이 정신을 차리곤 소리쳤다.

“핫! 돌아왔구나, 그대여!”

“예.”

고개를 돌린 헬릭이 자연스럽게 카이의 소매를 잡았다.

마치 두 번 다시 떠나가지 말라는 것처럼.

“하린 씨도 오셨어요?”

라샤는 뒤에서 유하린과 해후를 나누는 중이었다.

슬쩍 쳐다보자, 나이답지 않은 성숙한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너는…… 카이?”

쿤 팽이 이를 딱딱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왜, 빈집 털다가 주인이 나오니까 깜짝 놀랐어?”

“건방…… 진…….”

모멸감에 몸을 부르르 떨던 쿤 팽이 명령했다.

“죽…… 여!”

하지만 그의 부하들이 스킬을 캐스팅하는 것보다, 카이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것이 훨씬 빨랐다.

따악!

경쾌한 소리와 동시에 얼음의 산이 생겼다.

새하얗다 못해 그 속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얼음은 주변의 흑룡 길드원들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마, 말도 안 되는 크기…….”

“이만한 마법을 무영창으로 시전한다고?”

“동부의 신성이 엄청난 강자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학생들은 물론이고, 마법학 교수마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솟아난 얼음의 산 안쪽에는 총 12명의 흑룡 길드원들이 들어있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카이가 몸을 돌렸다.

“하린 씨, 여기 분들을 좀 보호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유하린이 자신의 검집을 톡톡 두드리며 쾌활하게 말했다.

이에 카이는 한 쪽 무릎을 낮춰 헬릭과 눈높이를 맞췄다.

“저 다녀올게요.”

“응응, 조심하거라.”

“저 이제 걱정받을 시기는 지났어요.”

도리도리.

헬릭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이, 그대 말고. 나는 이 도시가 좋으니라. 그러니까 저렇게 흥분하지 말고, 시설들이 부서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뜻이었느니라.”

그녀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빙산을 가리켰다.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빙산은 생성과 동시에 주변의 기둥과 도로를 무너트렸다.

할 말이 없어진 카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

아르칸 도시의 성채 앞에는 끝없는 평원이 이어져있다.

성채 위에서 이를 내려다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푸르른 초원은 바다를 연상케 했다.

현재 그곳에는 알버트 교황과 성기사들을 보호(?) 중인 680여 명의 흑봉단원들이 휴식하고 있었다.

“응? 뭐야.”

갑자기 단원 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당연히 주변에 있던 단원들이 고개를 돌리며 관심을 드러냈다.

“왜? 무슨 일인데?”

“뭐 재미있는 기사라도 떴어?”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단숨에 주목을 받게 된 단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인터페이스를 바라보았다.

‘단주랑 같이 성채로 들어간 녀석들이…… 왜 다 로그아웃으로 표시되지?’

단순히 표시 오류인 줄 알았건만, 귓속말을 보내봐도 오프라인이라는 문구가 뜬다.

이에 표정이 굳어진 단원이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해. 성채 안으로 들어간 단주랑 단원들이 전부 로그아웃 되었다.”

“뭐?”

“그럴 리가…… 엇! 정말이네?”

“뭐야, 무슨 일인데.”

쿤 팽의 접속이 끊겼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동시에 그들은 패닉에 빠졌다.

“어…… 그럼 우린 어떻게 하지?”

“복수? 아니면 대기?”

흑봉단원들이 패닉에 빠졌다.

사실 그건 쿤 팽이 당했을 때부터 예견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흑룡 길드는 소수의 간부가 절대 다수인 길드원을 이끄는 형태.

간부가 당하면 그 아래의 길드원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고스트가 아무 이유 없이 흑룡의 중간 관리자들을 처치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머리를 잃은 흑봉단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 무너진 성채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어? 저기 누가 나오는데?”

“뭐?”

모두의 시선이 아르칸 성채의 입구로 향했다.

아직은 조그맣게 보이는 그곳에서는 한 남자가 여유롭게, 그러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은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오후의 하늘은 따사로운 햇살을 비추는 중이었고, 그 햇살을 머금은 백색의 사제복이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잠깐만. 저 사제복은…….”

“카이? 저거 설마 카이 아니냐?!”

“새, 새끼가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애초에 우리가 전쟁을 벌인 것도…….”

카이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불안한 마음이 든 흑봉단원들은 황급히 랭킹 창을 열었다.

동시에 그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랭킹]

1위. 카이 LV.600

2위. 유하린 LV.539

3위. 크리스 LV.482

…….

“마, 맙소사.”

“진짜잖아!”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 카이는 그 긴 거리를 걸어 그들의 코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흐음.”

좌에서 우로 돌아가는 시선.

680명이라는 숫자를 글로 볼 때는 적어 보이지만, 막상 한 군데에 모아놓으니 굉장히 많아 보였다.

“우선은…….”

카이의 시선이 알버트 교황과 그를 지키는 수십의 성기사단들에게 돌아갔다.

“너희들은 좀 나오고.”

카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은연중에 알버트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흑봉단원들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어딘가로 날아갔다.

“미, 미친.”

“버그 아니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조차 못한 흑봉단원들이 눈알만 굴리고 있을 때.

카이는 알버트 교황 쪽으로 걸어갔다.

“교황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오, 카이 님. 돌아오셨군요!”

안색이 확 밝아진 알버트 교황이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잡혀 계십니까. 그리고 너희들은 또 왜 보고만 있어.”

“죄송합니다.”

카이의 말을 받은 것은 알버트 교황을 지키고 있던 성혈단원들이었다.

하지만 알버트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카이님. 그들을 꾸짖지는 말아주십시오. 모두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들은 전투를 원했지만, 제가 대화로 풀고 싶다고 억지를 부려서…….”

대강 상황 파악은 되었다.

아마 성혈단원들도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겠지.

이런 허접 같은 녀석들을 상대로 꼼짝없이 잡혀 있어야 했으니까.

카이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돌아오셔서 정말 기쁩니다.”

성혈단원들의 눈빛으로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카이가 등장해서 보여준 한 수만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그의 경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는 너희가 정리하고 들어올래?”

“맡겨주십시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혈단원들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카이는 그런 이들에게 가볍게 버프를 걸어주고는 알버트 교황과 함께 성채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와중, 알버트 교황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힐긋힐긋 뒤를 쳐다봤다.

“저…… 카이 님. 저들을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됩니까?”

그의 걱정에 카이가 낮게 웃었다.

“하하, 교황님. 벌써 잊으셨습니까? 성혈단원들은 교황님이 직접 뽑은 교단의 스페셜리스트들이에요.”

“압니다. 물론 알지만…… 머릿수가 거의 열 배는 차이가 납니다만.”

“물론 일반적인 성기사들이라면 무리겠지요. 하지만…….”

카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단단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전 제 단원들이 그렇게 약하게 자라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잠시 후 뒤쪽에선 흑봉단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쭈? 카이가 등장하기 전에는 바짝 쫄아서 검 하나 뽑지 못하던 놈들이…….”

“무기 안 내려? 어? 어어? 어! 커…… 커르륵!”

“모, 모두 이 녀석들 죽…… 커억!”

전원 마법사로 이루어진 680의 흑봉단원들은, 고작 80의 성혈단원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

“흠, 진짜 막나가는 놈들이네요.”

알버트 교황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 들은 카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알데바란군이 그토록 몰상식할 줄은 몰랐네.”

“아뇨, 아마 알데바란군이라기보다는…… 흑룡군이라고 봐야 옳을 겁니다.”

알데바란 역시 국교까지는 아니지만, 백성들의 대다수가 태양교를 믿고 있다.

그런 와중에 굳이 교단의 신경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흑룡은 교단의 신경을 긁어도 상관없지.’

당장 알버트만 해도 이번 사건의 잘못을 알데바란에게 전가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번 전쟁의 간판은 결국 흑룡이 아닌 알데바란이라는 것.

‘놈들이 제멋대로 나댈 수 있는 명분이 세워진 거네.’

그러니 평소에 이런저런 이유로 못하던 갑질도 시원하게 하는 것일 터.

“생각해 보니 좀 열받네?”

갑질을 왜 자신의 영지까지 기어들어 와서 한단 말인가.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던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아니…… 어디를 말인가?”

“전쟁이 났잖습니까. 당연히 싸우러가야죠.”

카이의 태연자약한 목소리에 알버트 교황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는 지금 군대가 없지 않는가.”

그 물음에 카이는 입 꼬리를 씩 말아올리며 대꾸했다.

“제가 곧 군입니다.”

***

엉겨붙는 헬릭과 라샤에게 나중에 놀아주겠다고 약속한 뒤, 카이는 곧장 리버티아로 향했다.

‘하린 씨에게는 자꾸 집을 지키는 부탁만 해서 죄송하네. 하지만…….’

이번 전쟁만큼은 스스로의 손으로 끝내고 싶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감히 자신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놈들이니까.

“으음? 카이!”

“여,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카이다!”

리버티아로 돌아오자마자 영지민들이 물밀 듯 밀려오며 그를 환영했다.

‘확실히 영지의 분위기가 다운되어 있네.’

항상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던 리버티아다.

헌데 지금은 다들 어깨가 알게 모르게 축 쳐져있다.

‘그야 수백만 적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불안할 수밖에.’

때를 참 잘 맞춰왔다.

백과사전에서 봤을 때, 어류랑 조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고 쓰여 있었으니까.

“오오오, 카이!”

인어 족의 왕인 카리우스가 다가와 그 큰 몸집으로 카이를 화악 껴안았다.

‘으으음.’

인어족 고유의 싱그러운 바다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인지! 실종되었다고 들었는데!”

“저도 오늘만 그 소리 열 번은 들었네요.”

짤막한 해후를 마친 카이는 각 종족의 수장들을 모두 모아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적군은 어디까지 왔습니까.”

“저희 엘프 정찰병들이 안쟈민의 숲에서 적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요.”

엘프 여왕 엘라니아가 말했다.

“모두 물리세요. 기껏해야 수백의 엘프 정찰병들로 놈들의 발목을 묶을 수도 없고, 헛된 희생은 사양입니다.”

“하지만 중앙, 그러니까 인간들의 지원군이 오려면 아직 한참 시간이…….”

“지원군은 필요 없습니다.”

카이가 딱 잘라 말했다.

“이곳.”

그는 이어서 회의실에 비치된 거대한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안쟈민의 숲을 지나면 나오는 티노움 평야였다.

“오늘 이곳에서, 흑룡 군과 싸우겠습니다.”

“그, 그건 좀…… 어떨지…….”

“판단을 너무 성급하게 내리신거 아니세요?”

카이의 날벼락 같은 선언에 모두가 당황했다.

이어서 그들의 대표로 세계수 루테리아가 테이블을 아장아장 걸어오며 말했다.

[벗이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리버티아의 모든 영지민을 긁어모은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군세는 적들의 수만큼 많지 않다네.]

“굳이 영지민들이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톡톡.

카이의 검지가 테이블을 격식 있게 두드렸다.

그의 눈빛은 그 여느 때보다도 밝게 빛나는 중이었다.

“저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