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3
힐통령 403화
121. 일당백만(5)
한때 커뮤니티에서 뜨겁게 달군 주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보스란 무엇일까라는 잡담에서 시작된 가벼운 토론이었다.
하지만 토론에 참가한 유저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이 화제에 관심을 가진 랭커와 프로게이머들이 대거 유입되며 제법 큰 화제로 부상했었다.
며칠간의 치열한 토론 끝에 내려진 결론은 다소 허무했다.
-게이머의 입장에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보스는,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보스다.
물론 모두가 공감한 결론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랭커들은 이에 납득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보스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스펙이 높아. 체력과 방어력, 공격력이 일반 몬스터랑 비교도 안 되지.”
“그런 녀석을 상대할 땐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단 말이지.”
“왜 놓을 수 없냐고? 그야 뻔하잖아.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실수가 발생하거든.”
“어라, 실수했네? 하고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야. 보스 전에서의 실수는 죽음과 직결되니까.”
미드 온라인은 과거의 다른 게임들과 다르다.
단순히 마우스와 키보드만 조작하던 게임들에선 10시간이 넘도록 보스 레이드를 하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하나 미드 온라인은 가상현실게임, 머리는 물론이고 몸까지 바쁘다.
당연히 공략 시간이 오래 걸리는 보스를 상대할 때는 높은 체력과 집중력이 요구된다.
현재 카이를 상대하는 흑룡 길드원들도 그 부분을 실감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으드득, 괴물 같은 놈.”
전쟁이 시작된 지 두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흑룡 길드원들은 단 1초의 휴식 시간도 없이 카이를 몰아붙였다.
본인들이 열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놈도 사람이야, 사람!’
‘언젠가는 온다.’
‘캐릭터의 스테미너가 줄어드는 순간.’
‘플레이어의 집중력이 흐려지고,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그 순간만을 위해 꾹 참고 기다린 것이다.
하나, 그건 그들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카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이 녀석들은 수가 많아.’
당연히 처음부터 그에 대한 대비를 했다.
‘길게 끌어서 좋을 건 없겠지.’
흑룡 길드는 교대로 싸우며 이 전쟁을 최대 며칠까지 끌어갈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카이는 아예 반대로 생각했다.
‘길어야 한나절. 빠르면 여섯 시간 안에 승부를 본다.’
도저히 300만 명을 적으로 둔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유저들은 자그마한 오크 부락을 섬멸하는 것조차 최소 하루는 잡았으니까.
‘그럼 슬슬 시동을 걸어볼까.’
카이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비쥬얼이 화려한 공격만을 퍼부었다.
사실 하려고만 한다면, 그는 더 효율이 좋은 공격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마나를 펑펑, 비효율적으로 써가면서 적들에게 화려한 공격만을 퍼부었다.
그 의도는 간단했다.
‘사기.’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기라는 것.
그건 오크 토벌대와 검은 벌 사냥을 걸쳐 비르 평야 전쟁과 타이탄 길드까지.
수많은 전투를 겪은 카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그는 초반부터 ‘연출’을 통해 적들의 사기를 꺾어놓았다.
실제로 흑룡 군의 사기는 카이의 압도적인 무력을 견식한 이후, 정확히 말하자면 왕류인이 고작 두 번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 이후로 바닥까지 떨어졌다.
‘슬슬 입질도 오는 것 같으니…… 시작하자.’
처음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분위기가 다운된 적들의 군세.
그것을 쳐다보던 카이가 자신의 두 번째 페이즈에 돌입했다.
“소환 취소, 미믹.”
저 멀리서 자탄의 모습으로 싸우고 있던 덩치가 순식간에 전장에서 사라졌다.
물론 잘 싸우고 있던 녀석을 돌연 취소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강화 소환, 미믹.”
바로 자신의 앞에 불러오기 위해서다.
“뀨웅.”
소환된 슬라임 한 마리가 바닥에서 꼬물거렸다.
“폼 체인지, 아오사.”
카이의 명령이 떨어지자 미믹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증식하기 시작했다.
댐이 무너져 불어난 강물처럼, 순식간에 불어난 녀석의 몸집은 과거 화이트홀을 집어삼켰던 보스 몬스터, 아오사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뭐, 뭐야.”
“이 모습은…… 화이트 홀의 보스?”
“달빛과 함께 춤을, 그 영상에서 나왔던 보스 몬스터 아니야?”
난데없이 거대한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자 적들이 당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카이는 말없이 입 꼬리를 올렸다.
‘사람은 당황하게 되면 호흡이 가빠지지.’
당연히 폐 속으로 들어가는 공기의 양도 많아진다.
그것이 이유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어?”
“끄…… 끄으윽?”
“쿠, 쿨럭! 쿨럭!”
“젠장! 도, 독이다……!”
아오사 주변에 위치한 수만 명의 흑룡 길드원.
그들이 단체로 중독되어버린 이유.
“사실 아오사의 독은 끔찍하거든.”
중독되는 순간 초마다 생명력과 마나가 빠져나간다.
포인트는 거기에 호흡 곤란 상태까지 추가된다는 것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호흡 곤란에 빠지면 당연히 당황하게 되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람이 당황하게 되면 호흡이 평소보다 더욱 가빠진다.
즉,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악순환의 고리라는 뜻이다.
“사, 사제들!”
“어서 정화를……!”
“저, 정화가 문제가 아니라고!”
“일단 푸른 안개에서 빠져나와라! 그 안에 있는 동안에는 해독을 해도 다시 중독될 뿐이다!”
일대에 낮게 깔린 푸른 역병의 운무.
그곳을 빠져나가지 않는 한, 초마다 계속해서 중독 상태가 갱신된다.
“제, 젠장. 이제 와서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해도…….”
“비켜! 뒤에 놈들은 뭐하고 있냐고!”
전투 내내 믿음직하고 든든하던 후방의 동료가 순식간에 발목을 잡는 짐이 되어버렸다.
“쿨럭! 쿨럭!”
“젠자아앙! 이 비열한…….”
“300만 명이 나 하나 패려고 우르르 몰려와 놓고, 비열함을 운운해?”
원래도 카이의 독주를 막지 못했던 이들이다.
하물며 번번이 스킬 캐스팅이 취소되고, 행동에 제약이 생긴 호흡기 질환 환자들이라면?
“캡슐 밖으로 나가서 방 환기시키고, 맑은 공기나 실컷 마셔라.”
카이는 마치 초보자 존에 있는 허수아비를 상대하듯.
흑룡 길드원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평균적으로 초당 스무 명씩 죽어가던 적들이, 이제는 초당 여든 명씩은 사라졌다.
‘흠, 슬슬 끝났나.’
미믹이 사용한 푸른 역병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
“사, 살았다.”
“힐러들! 이 틈에 빨리 회복을!”
“전방에 있는 애들부터 피 채워줘! 후방에 있는 길드원들은 포션 빨고!”
안도의 빛이 어리는 적들을 빤히 쳐다보던 카이가 입을 열었다.
“미믹, 폼 체인지, 자탄.”
아오사의 거대한 몸집이 흐물거리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네 개의 거대한 다리를 지닌, 흡사 낙타나 거북이처럼 보이는 거대한 고대 병기의 모습으로.
“중력장 사용.”
고오오오-!
미믹의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일대에 어깨를 짓누르는 중력이 발생하였다.
“커…… 커어어억!”
“으그극!”
제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무게감.
항상 가볍게 마시던 공기들이 철근처럼 무거워지며 흑룡의 군대를 무릎 꿇렸다.
반면 카이는 여유로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따로 중력장을 사용해 그 영향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투둑, 투두둑.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릎을 꿇게 된 흑룡 길드원들의 손에서 무기가 떨어졌다.
주변을 여유롭게 돌아보던 카이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절대 영도.”
쩌저저적!
그의 발이 맞닿은 곳을 기점으로, 극한의 냉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추, 추…….”
“으들들드들.”
흑룡 길드원들의 무릎에 닿은 냉기는 그들의 몸을 타고 올라가 머리카락까지 꽁꽁 얼려 버렸다.
“……하아아.”
카이가 가볍게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그의 주변으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수십만 개의 얼음상만이 존재했다.
‘마나를 거의 다 썼네.’
범위가 범위다보니, 소모되는 마나의 양도 수십만 단위.
카이는 인벤토리를 열어 포션을 연달아 몇 병이나 마셨다.
병당 백만 원이 가뿐하게 넘어가는 최상품의 마나 회복 포션들이었다.
“크으, 포카리 맛.”
배가 불러 더 이상 포션을 못 마실 지경이 되자, 마나의 절반 정도가 회복된 상태였다.
“미믹, 이제 다시 가서 블리자드 녀석들이랑 합류해.”
고오오오-
웅장한 목소리로 대꾸한 미믹이 쿵! 쿵!
거대한 다리를 움직이며 이동을 개시했다.
이미 안쪽은 폴리곤 조각으로 가득 차 있던 얼음상들은 그 발에 짓밟혀 산산이 조각났다.
“음?”
카이가 이변을 느낀 것도 그 때였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좌측, 그러니까 듀라한 군단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띠링!
[매의 목격자 효과가 활성화됩니다.]
카이의 눈동자가 녹색으로 물들었고, 시야는 마치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확대되었다.
당연히 듀라한 군단 사이에서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존재가 누군지도 볼 수 있었다.
‘저건…… 쟈오 린?’
카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레벨 600의 듀라한 군단이 쟈오 린의 검을 받아내지 못하고 하나, 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쟈오 린이 저렇게 강했다니…… 이건 상상도 못 한 전갠데?’
이미 바닥에 누운 듀라한들의 수만 스물두 마리.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동시에 그의 등 뒤로 네 개의 신성 마법진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마지막으로 넷.
위이이잉!
신성 마법진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맹렬하게 돌아가는 순간, 카이도 주문을 시전했다.
“리저렉션.”
***
“한심한 것들! 비켜라!”
쟈오 린이 전선에 합류하며 소리쳤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무참히 썰어버리고 있는 카이를 흘깃 쳐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넌 조금만 더 기다려라.’
자신의 부하들이 녀석의 스테미너를 빼놓으면, 그때 등장해 녀석을 꺾어버릴 생각이었다.
‘그 전에 나는…….’
우선 거슬리는 것들을 해치워야 했다.
텅텅텅!
옆구리에 낀 제 투구로 허벅지를 때리는 듀라한들은 기세등등했다.
이미 그들을 따르는 스켈레톤만 수천 마리.
게다가 듀라한들의 공격은 길드의 간부들조차 두셋 이상이 합공하지 않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몬스터.’
쟈오 린이 빛살처럼 튀어나갔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희대의 명검, ‘패왕검’이 하늘의 태양빛을 반사시켰다.
‘현존하는 최고의 대장장이 중 하나인 모루에게 직접 의뢰해 제작한 무기.’
무려 유니크 등급의 무기로, 절삭력과 데미지 증가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
텅텅!
쟈오 린의 기척을 느낀 듀라한 한 기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쟈오 린의 패왕검이 하늘을 둘로 쪼갤 기세로 내려쳐졌다.
서걱!
모든 스탯이 3,000에 근접하는 괴물의 분노가 담긴 일격.
그것은 듀라한의 몸을 일도에 양단해 버렸다.
“마, 마스터……?”
“용주께서 듀라한…… 듀라한을……?”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흑룡 길드원들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나 쟈오 린은 한 번의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전장에서 듀라한만 찾아가며 그들을 일격에 죽여 버렸다.
“흥. 레벨 600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몬스터.”
당연히 스탯이 자신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쟈오 린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합류 이후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용주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사악한 언데드 군단을 무찔러라!”
‘앞에서 이끌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뭘 하지도 못하는 버러지 같은 것들.’
텅! 텅!
“하여튼 몬스터들이란.”
낮게 코웃음을 치던 쟈오 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뒤쪽의 듀라한을 그대로 처치해 버렸다.
우드득!
반으로 잘린 듀라한의 투구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우우우우웅!
하늘에서 구름이 터져나가며 빛줄기 하나가 그의 지척에 떨어졌다.
“뭐, 뭐냐!”
“마스터부터 보호해!”
“사태 파악을, 대체 무슨 스킬이냐!”
잔뜩 당황한 흑룡 군들이 경계심을 끌어올리는 순간.
꿈틀, 꿈틀.
‘음?’
쟈오 린의 눈매가 확 좁혀졌다.
불과 몇 초 전, 자신이 일검에 처치했던 듀라한.
분명히 반으로 쪼개버렸던 투구가 꿈틀꿈틀 움직이며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이다.
‘잠깐, 이 스킬은……?’
사냥을 하면서 숱하게 봐왔던 스킬이다.
사망한 아군을 되살리는, 미드 온라인에선 오직 사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거룩한 기적.
“리저렉션……?”
카이가 어째서 이 스킬을?
의문이 쟈오 린의 머리를 뒤덮었다.
하나 그는 의문을 잠시 구석으로 미뤄놓고, 침착하게 사태부터 파악했다.
‘이 전장에서 듀라한 한 기를 살린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쟈오 린이 결론을 내놓는 순간.
우우우웅! 우우웅!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스무 개가 넘는 빛줄기가 연속적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