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05화 (405/441)

# 405

힐통령 405화

121. 일당백만(7)

‘급할 때일 수록 머리는 더 차갑게.’

쟈오 린은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솔직히 당황스럽기는 했다.

카이가 강해도 너무 강했으니까.

자신이 상정해두었던 기준, 그 기준을 아득히 넘어서는 강함이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는 법.’

쟈오 린이 결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 개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간다.”

카이가 던진 단어 하나가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의 목소리가 심장 밑바닥에 쿵하고 가라앉은 것처럼 몹시 답답한 기분이 느껴졌다.

“네 개의 창.”

카이의 등 뒤로 네 개의 창이 두둥실 떠올랐다.

창들은 마치 저들이 피라니아라도 된 것처럼, 쟈오 린의 몸을 뜯어먹기 위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까강! 까가강!

쟈오 린의 손이 바빠졌다.

‘이런…… 이런 공격은 처음이다.’

네 개의 창은 단순히 쳐내야 할 공격이 네 개 더 늘어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아마 궤적이 생소할 거다.’

보통 몬스터를 상대할 때, 혹은 사람을 상대할 때 공격이 오는 궤적은 비슷하다.

하지만 네 개의 창은 기존의 공격 궤도와는 전혀 색다른 위치에서 느닷없이 찾아왔다.

정수리를 노리며 훅하고 내려오는가 하면, 바닥에서 가시처럼 찔러올라오기도 했다.

적으로 하여금 단순히 네 개의 공격을 더욱 쳐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정신력을 소비하게 만든다.

실제로 쟈오 린은 창들을 쳐내느라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이리저리 굴러갔고, 몸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카이는 거기서 쟈오 린을 더 괴롭혔다.

“신벌.”

하늘이 갈리고, 신의 분노를 담은 빛의 세례들이 땅을 두드렸다.

피해를 받은 것은 비단 쟈오 린 뿐만이 아니었다.

전장 대부분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빛의 입자들은 흑룡 군들을 자비없이 강타했다.

위이이이이잉!

마치 레이저를 쏘는 듯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적들이 혼비백산하며 소리쳤다.

“피, 피해!”

“소리! 또 온다!”

하지만 분노한 신의 벌은 피할 수 없는 법.

잠깐의 무차별 폭격이 끝났을 때, 카이는 두 개의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남은 체력은 70%…… 아직 많이 남았네.”

조용히 읆조린 카이가 이어서 가볍게 성호를 그렸다.

“블레스.”

모든 능력치 증가.

“헤이스트.”

모든 속도 증가.

“태양의 축복, 태양의 갑옷.”

모든 공격력, 방어력 증가.

“신성 폭주.”

모든 능력치 대폭 증가.

카이는 가장 ‘간단한’ 버프만을 걸고 쟈오 린에게 달려들었다.

‘온다……!’

쟈오 린은 네 개의 창을 상대하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투 내내 카이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카이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할 수 있었다.

‘막았……?’

쟈오 린이 황급히 패왕검을 들어올렸다.

하나 카이의 성검은 한 박자 더 빠르게, 패왕검이 미쳐 들리기 전에.

서걱!

그의 몸을 길게 훑고 지나갔다.

촤아아악!

쟈오 린의 가슴에 횡으로 검흔이 새겨지며 피 분수가 쏟아져나왔다.

‘방어구를…… 무시했다고!?’

파이널 어택.

대상의 방어력을 무시하고, 공격력을 일순간 세 배로 끌어올리는 기술.

‘추가타! 추가타를 대비해야……!’

쟈오 린은 생명력이 뚝 떨어진 것을 회복할 틈도 없이 몸을 돌렸다.

하나 몸을 돌린 그의 시야 가득 들어온 것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는 검날이었다.

까드드득!

“크억!”

미드 온라인에서 검에 공격을 받는다고 한들, 실제로 플레이거가 느끼는 고통은 크지 않다.

기껏해야 볼펜의 끝으로 세게 누른 정도의 아픔?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까드득!

회전하는 검날이 자신의 가슴에 박힌 채 살점을 갈아버리고 있다면, 인간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으, 으으…….”

바로 공포다.

그 공포는 사람의 뇌내에서 없던 공포조차 만들어낸다.

“크윽!”

쟈오 린이 볼썽사납게 몸을 굴렸다.

흙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그가 엉금엉금 기어서 뒤로 도망쳤다.

카이는 굳이 그 뒤를 쫓지 않았다.

“허억, 허억.”

간신히 공격 범위에서 빠져나온 쟈오 린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더듬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를 높였다.

“사, 사제! 사제는 어디 있느냐! 어서…… 어서 나를 치료해라!”

긴장으로 인해 건조해진 입술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잔뜩 찢어진 상태였다.

하나 그 누구도 그를 치료해 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치료해 줄 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너희 군대에 이제 사제는 없어.”

카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야 듀라한들에게 명령을 내려놨으니까.

그 이후로 자신이 쟈오 린과 싸우는 동안, 그들은 사제들만 골라서 죽여놨을 것이다.

실제로 쟈오 린의 몸으로는 그 흔한 신성력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자신은 절대자여야만 한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그런 대접을, 대우를 받아왔었다.

흑룡 길드의 마스터.

그 직함이면 게임 내에서 어디를 가도.

아니, 심지어 현실에서조차 대우를 받는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을 보라.

마치 패배자처럼 바닥을 구르고 있지 않은가.

“이이…….”

콰앙, 콰앙!

쟈오 린이 주먹으로 바닥을 때렸다.

그것만으로도 울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주먹을 꽈악 쥐었다.

티노움 평야 바닥에 깔린 흙이 그의 손 안에 들어왔다.

“이건 말도 안 된단 말이다!”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난 흑룡이 몸을 돌리며 손에 쥐고 있던 흙을 카이에게 뿌렸다.

카이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걸렸다!’

쟈오 린의 눈이 탁하게 빛났다.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을 내비춘 그가 카이에게 득달처럼 달려들었다.

“죽어라!”

패왕검의 검신에 푸른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군주 클래스의 유저가 400레벨 때 배울 수 있는 스킬.

공격력을 3배 올려주고 100% 치명타를 터뜨리며, 출혈 효과를 내는 ‘군주의 검’이다.

서걱!

패왕검이 카이의 심장을 찔렀다.

순백색의 사제복이 붉게 물들었다.

출혈 효과로 인해 피가 나온 것이다.

‘내가 느꼈던 고통을 똑같이 느껴라!’

쟈오 린이 저주를 퍼부었다.

하나 천천히 눈을 뜬 카이의 눈동자에는 애매함만이 가득했다.

“아…… 피나네.”

“큭, 왜. 네 놈은 천년만년 피를 흘리지 않을 줄 알았나?”

“아니, 그게 아니고…….”

쟈오 린이 그럼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 순간.

그의 안색이 검게 물들었다.

“으으윽…….”

그의 무릎이 절로 꿇렸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이는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덜덜 떨고있는 쟈오 린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불쌍해서 그러지.”

마계에서 두 대공과 대련할 때.

카이는 몇 가지 스킬을 새롭게 획득했다.

그 중 하나가 바시온에게서 배운 스킬.

바로, 체내의 혈액을 독으로 바꾸는 ‘혈독술’이었다.

[혈독술]

등급 : 유니크

사용자가 원할 시, 체내의 혈액을 독으로 바꿉니다.

독은 체내를 빠져나오는 즉시 기체화되며 주변으로 흩어집니다.

적이 독에 중독될 시, 상태이상 탈진이 부여되며 데미지를 줍니다.

포이즌 마스터가 있기에 배울 수 있었던 스킬이다.

“뭐, 내가 원했던 결말은 아니지만…….”

쟈오 린의 생명력이 45% 남았다.

카이는 검을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흑룡의 군대는 승기를 잃고 연신 물러서는 중이었다.

언데드 군단은 그사이에 수십만으로 불어난 상태.

“……끝을 내자.”

카이가 성검을 내질렀다.

“일점폭발.”

쟈오 린의 심장에 꽂힌 검에서 빛이 뿜어져나왔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두 사람의 고도가 낮아졌다.

그들이 밝고있는 땅이 움푹 파이며 크레이터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쟈오 린의 생명력은 20%.

“깔끔하게 보내줄게.”

성검이 천천히 들어올려졌다.

태양빛을 머금은 성검은 찬란하게 빛났다.

정신력과 집중력이 방전된 쟈오 린은 지친 눈으로, 이를 올려다보았다.

‘눈…… 부시군.’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밝은 태양빛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서걱!

깨끗하고 깔끔한 소리가 그의 몸을 흔들었다.

귀를 통해서 들린 것이 아니다.

쟈오 린은 그 소리를 목을 통해서, 자신의 전신을 통해서 들었다.

동시에 그의 의식도 수명이 다 한 촛불처럼 흐려졌다.

[사망하셨습니다.]

[군주는 항상 승리해야하는 존재입니다. 패배가 용인되지 않는 고독한 자리입니다.]

[패배로 인해 히든 클래스, ‘군주’가 박탈됩니다.]

***

전쟁이 끝났다.

단순히 리버티아를 침공하려던 흑룡 군의 대패 뿐만이 아니라.

알데바란 군대가 몰살했다.

물론 상황이 빠르게 정리된 이유는 간단했다.

라시온이 낳은 새로운 전쟁 영웅, 카이와 유하린이 있었으니까.

동부의 흑룡을 몰살한 카이는 유하린과 함께 북부, 서부의 적들을 차례대로 무너트렸다.

덕분에 라시온 NPC들 사이에선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베오르크 국왕은 논공행상에 카이를 호출하였으나, 카이는 그 약속을 잠시 뒤로 미뤘다.

국왕의 명령까지 거스르면서 그가 방문한 곳은 다름아닌 아르칸 아카데미였다.

똑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 쪽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구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은 카이가 대꾸했다.

“카이입니다.”

-앗.

더 이상의 질문을 쏟아지지 않았고, 안 쪽에서 의자가 끼익 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빼꼼.

헬릭이 문틈 사이로 얼굴을 쏘옥 내밀며 카이를 올려다봤다.

“…….”

“쨔잔. 카이입니다.”

“흥.”

‘……어?’

뭐지? 엄청 반겨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다.

헬릭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문을 열더니, 팔짱을 끼고는 턱을 까딱였다.

“뭐, 들어오너라.”

“그,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안 쪽으로 들어가자 귀엽게 잘 꾸며진 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카데미의 기숙사 방은 제법 넓은 편이었는데, 각 방마다 20평 정도는 된다.

원체 고귀하신 분들이 많아서 이것 만큼은 카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방을 혼자서 쓰는 건 아니다.

방 안에는 침대와 책상이 두 개씩 놓여져 있었고, 왼쪽은 핑크핑크한 인테리어로.

오른쪽을 푸른 계열의 제법 모던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딱봐도 왼쪽은 헬릭 님 공간, 오른쪽이 라샤 님 공간이네.’

예전에 입학할 당시, 이사장인 자신의 권한으로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도록 알버트에게 부탁해놨었다.

카이는 마치 딸아이의 기숙사에 방문한 아버지처럼 어정쩡한 자세로 입구에 서있었다.

“어…… 그런데 라샤 님은요?”

“뒤뜰에 심어놓은 작물들 물 주러 갔느니라.”

“아아…….”

카이는 어색한 공기에 괜히 뒷머리만 긁적였다.

헬릭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다.

거의 두 달만이니까.

끼이익.

헬릭은 자신의 책상에서 의자를 빼오더니, 뚱한 표정으로 카이의 앞에 놓았다.

“앉거라.”

“예?”

“앉으라고.”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눈이 무섭다.

‘헤, 헬릭 님이 무서워지셨어?’

침을 꿀꺽 삼킨 카이가 얌전히 그녀의 명령에 따랐다.

하나 자신만 앉아 있고, 누가봐도 기분이 나빠 보이는 헬릭은 서있으니 묘한 죄책감이 밀려온다.

결국 안절부절못하던 카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헬릭 님도 앉으시죠?”

“아니. 난 서 있을래.”

“그, 그럼 저도…….”

카이가 슬며시 일어나려고 하자, 헬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분명 앉아 있으라고 하였는데?”

“……넵.”

냉큼 도로 앉은 카이는 바닥만 쳐다보았다.

오늘의 헬릭, 너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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