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06화 (406/441)

# 406

힐통령 406화

122. 대화가 필요해(1)

“…….”

연신 바닥만 바라보던 카이가 힐끔힐끔 헬릭의 눈치를 살폈다.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끼고 있는 그녀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화내고 계시는 모습조차 귀여우시지만…….’

따끔따끔.

시선을 바닥으로 돌려도 정수리가 따끔거린다.

차마 이 상황에서 귀엽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카이는 미래를 볼 수 없었지만, 그것이 확실하게 배드 엔딩이라는 것 정도는 보였다.

한참 뒤, 먼저 입을 떼기 힘들던 무거운 공기를 헬릭이 깨뜨렸다.

“그대여.”

“예, 예!”

바짝 군기가 든 카이가 고개를 번쩍 들며 대답했다.

헬릭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자신을 한 번 가리키더니, 이어서 카이를 가리켰다.

“그대는 나의 사도이자 대리인이지?”

“그야 물론입니다.”

“그대의 나이가 몇이었지?”

“이, 이제 스물셋……이요.”

“그래, 스물셋.”

헬릭이 근엄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는 말이다. 그 정도 나이라면 알 건 다 아는 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예…….”

“스물셋의 나이라면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약속이 무슨 뜻이지?”

“어…… 상대방이랑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 안 하겠다…… 미리 정해두고 그걸 지키는 거죠.”

“잘 아는구나.”

헬릭은 몸을 돌려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그 위에 올려진 달력을 들고 왔다.

달력에는 약 한 달 반 전부터 매일매일 빨간색 크레파스로 동그라미가 처져 있었다.

“그대가 예전에 말했었지. 항상 날 옆에서 보필해 주겠다고.”

“어……?”

그런 말을 했던가?

카이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헬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말했었잖아? 천계에서 신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할 때.”

“으음.”

카이가 눈을 감고 그때의 기억을 잠시 되살려보았다.

‘그런데 헬릭 님. 저는 제 것이지 헬릭 님의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 아닌 인격체라고요.’

‘뭐, 뭐……? 그대는 내 것이 아니었더냐?’

‘아닙니다. 하지만, 영원히 헬릭 님만의 대리인이 되겠습니다.’

그런 말 한 적 없다.

분명히 없다!

하지만 헬릭의 차가운 눈동자를 보자니 그런 디테일한 부분을 따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그랬던 것 같기도…….”

“역시 그렇지? 하지만 이 달력을 보거라.”

헬릭이 동그라미를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이제는 숫자도 잘 센다.

순식간에 동그라미를 47개나 헤아린 그녀가 가슴을 쭉 폈다.

“47일.”

헬릭이 책상 위에 다시 달력을 놓았다.

“사도가 자신의 신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47일 동안 자리를 비우다니. 이건 역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니라.”

“그 부분에 대해선…… 죄송합니다.”

할 말이 사라지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어쨌거나 카이는 헬릭에게 아무런 기별도 없이 연락이 두절되었고, 반올림해서 두 달 가까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동시에 헬릭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많이 섭섭하셨구나.’

자신이 말도 없이 떠난 점이 서운했던 것이다.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참 좋다.”

휙! 헬릭이 몸을 돌려 창가 쪽을 바라봤다.

“그대는 항상 나를 옆에서 지키고, 보필해 준다고 예전에 약속하였다.”

“예.”

“이번 한 번만…… 음.”

헬릭이 고개를 숙이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봐주는 거고…… 만약 다시 한번 더 나와의 언약을 위반할 시, 그때는 상호 간의 약조대로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적혀 있…… 아, 아니. 처벌할 것이야.”

읽고 있던 무언가를 품속에 넣은 헬릭이 몸을 돌려 카이를 쳐다보았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위풍당당한 표정.

그런데 그 뒤쪽의 창가에서, 익숙한 색상의 머리카락이 빼꼼 나왔다가 쏘옥 들어간다.

“…….”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어, 어어…… 내가 앉아 있으라고 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근엄한 표정이 유리 조각처럼 깨진 헬릭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이를 가볍게 무시한 카이는 창문을 활짝 열더니, 난간에 팔을 기대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서 뭐 하세요?”

외벽에 바짝 기대어 앉아 있던 소녀에게 묻자, 라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카이를 올려다봤다.

“헤헤…… 안녕하세요.”

“네. 라샤 님도요.”

주섬주섬.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라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거기 스탑.”

“꺄악!”

카이는 중력장을 사용해 라샤를 창문 안으로 데리고 왔다.

다시 창문을 닫은 카이가 두 소녀를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일단 여쭤볼게요. 라샤 님은 거기서 뭘 하고 계셨던 거죠?”

“그게…….”

라샤가 헬릭을 힐끔 쳐다봤다.

그 시선을 느꼈을 것이 분명한데, 헬릭의 고개는 슬며시 반대쪽으로 향했다.

“하아.”

옅은 한숨을 내쉰 라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카이 님이 잘못 하셨잖아요. 말도 없이 연락도 끊어지시고…… 마계 가신 거죠?”

“예.”

“카이 님께서 사라지시니까 헬릭이 너무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그래서…… 두 번 다시 말없이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대본을 써주신 건가요?”

“넹.”

라샤가 혀를 쏙 내밀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미 자신의 근엄함이 연기였다는 것을 들킨 헬릭은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가장 놀란 것은 그녀가 아닌 카이였다.

그는 부릅 뜬 눈으로 헬릭을 바라봤다.

‘그게…… 다 연기였다고?’

순간이지만 자신이 바짝 쫄아서 바닥만 바라봤을 정도였다.

헌데 그게 모두 라샤와 헬릭의 설계였다니? 연기였다니?

‘스필벅스 감독의 말이 맞나? 진짜 연기 천재인가?’

알듯 모를 듯 애매한 표정을 짓던 카이가 돌연 무릎을 굽혀 두 소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속이려 든 것은 괘씸했지만, 이 일의 원흉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두 분 가까이 오세요.”

“보, 볼 당기려고……?”

헬릭이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하지만 카이는 이에 대꾸해 주지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어서 오세요.”

“힝.”

두 소녀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처럼 어기적거리며 카이에게 다가왔다.

마치 어른을 속이다가 걸려서 혼나는 아이들처럼, 고개를 푹 숙인 두 신들.

카이는 자신의 두 팔을 뻗어 그녀들을 꼬옥 안아주었다.

“말도 없이 사라져서 죄송합니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자신의 잘못에 대해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고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어른이다.

카이는 두 소녀를 꼬옥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이제 다시는 함부로 떠나지 않을 테니까요.”

“…….”

품 안에 안긴 두 소녀는 카이의 어깨에 턱을 걸친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말똥말똥.

잠시 서로를 쳐다보기를 잠시, 라샤가 베시시 웃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잘됐네.’

이에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한 번도 안겨본 적은 없지만.

카이의 품에 안길 때면 마치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처럼 아늑한 느낌을 받게 된다.

헬릭은 그에게 조금 더 몸을 기댔다.

“킁킁.”

카이의 냄새가 난다.

그가 돌아왔다는 것이 정말로 실감 나기 시작하자, 억지로 참아왔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끄으읍…… 끕…….”

“우, 울어요?”

돌연 왼쪽 어깨가 뜨거워지자 당황한 카이가 헬릭을 돌아보았다.

“헤, 헬릭 님?”

“으허헝…… 나쁜 카이…… 으엉…….”

그녀는 서럽게 울면서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었는지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맨날 밤늦게까지 기다리고…… 주신님한테 기도도 드리고…… 양치질도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잘했는데에…… 으엉…….”

“어이구, 우리 헬릭 님. 착하게 잘 기다리고 계셨네요?”

카이는 전력으로 그녀를 달랬다.

마치 출장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토라진 딸 아이를 달래듯이.

“선물로 과자라도 사 왔어야 했는데…….”

카이가 진한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리자, 헬릭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크흥. 그건 괜찮으니라.”

그녀는 조막만 한 손을 들어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만 무사히 잘 돌아왔다면, 그것이 최고의 선물인 것이야.”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할 수가 있다니!

‘딸이다. 무조건 딸이야.’

카이는 훗날 누군가와 결혼하면, 반드시 딸을 낳겠다고 다짐했다.

“그, 그런 의미에서…….”

헬릭이 두 손을 꼬물거리더니, 새끼손가락을 슥 내밀었다.

“약속하자꾸나. 이제는 말도 없이 사라지지 않기로.”

“약속…….”

그녀의 고사리 같은 새끼손가락을 빤히 쳐다보던 카이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마주 건 카이는 이를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네, 약속입니다.”

“헤헤.”

헬릭이 그제야 방긋방긋 웃었다.

그사이에 눈이 퉁퉁 불어 있어서 엄청 웃겼지만, 카이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돌아왔느니라. 나의 사도여.”

* * *

“저희가 어떻게 마계에 갔었냐면요…….”

대륙의 온갖 진귀한 식물과 꽃들을 모아놓은 아르칸 아카데미의 화원.

평소에는 여학생들이 티타임을 가지거나, 남자 학생과 여자 학생들의 미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장소다.

하지만 전쟁이 막 끝난 지금 이곳을 찾는 학생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학생들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학기가 재개되는 것은 한 달 후다.

카이와 유하린, 칼 라샤와 헬릭은 그곳에 도란도란 모여앉아 간식을 먹고, 차를 마셨다.

물론 그들은 서로가 못 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저마다 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막 공부를 했는데. 너무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이야. 교수님이 막막 칭찬했다.”

“정말요?”

“응응, 여기 성적표.”

헬릭이 성적표를 슥 내밀더니, 당연하게 정수리를 내밀었다.

“흠.”

성적표를 보니,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의외인데?’

그녀를 너무 무시했던 걸까.

그래, 명색이 신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전 과목 만점 수준은 아니었지만, 신학은 만점.

그 밖의 암기 과목들도 성적이 매우 준수한 편이었다.

물론 수학이나 마법학 과목의 성적은 매우 저조했지만.

“잘 하셨네요.”

카이가 헬릭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에헤헤.”

헬릭이 앞서 칭찬을 받고 나자, 라샤도 자신의 성적표를 내밀었다.

“저도요. 저도 성적 잘 받았어요.”

놀랍게도 라샤의 성적은 전 과목 만점.

이에 깜짝 놀란 카이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이건 대단한 거 아니에요?”

전교 석차는 189명 중 1등.

111등인 헬릭과는 무려 110등이나 차이가 난다.

“와, 진짜 잘하셨어요. 이건 대단하네요!”

카이가 라샤의 머리를 격렬하게 쓰다듬어주었다.

대륙의 난다 긴다 하는 대단한 핏줄들의 자손이 모두 모인 학원에서 1등이라.

물론 신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으음.”

헬릭의 미묘하게 우수한 성적표를 보면, 대조가 되어서 그런지 엄청 대단해 보인다.

“흐흥. 다음엔 더 잘 볼 것이야.”

볼을 잔뜩 부풀린 헬릭이(화가 나서 공기를 넣은 것이 아니라, 케이크가 엄청 들어 있었다) 물었다.

“너희들은 마계에서 뭐 특별한 일 없었느냐.”

“있었죠.”

“있었어요.”

카이와 유하린이 동시에 대답했다.

“헤에…….”

라샤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미묘한 음성을 뱉어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미소를 짓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왠지 하린 님께 얘기를 듣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들려주시겠어요?”

“뭐, 저야 상관없는데요.”

카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와 자신은 겪은 일이 똑같다.

‘당연히 나올 말도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뭐.’

카이는 빨대로 자몽 주스를 쪼옥 빨아먹으며 유하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카이 님도 정말…….”

유하린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