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
힐통령 408화
122. 대화가 필요해(3)
“뮬딘…….”
미리 예상을 했던 걸까, 아니면 갑작스러웠던 탓일까.
알듯 모를 듯 애매한 표정을 지은 헬릭이 말끝을 흐렸다.
“흐우.”
잠깐의 침묵 후 옅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그대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알았느니라.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용서하겠느니라. 그런데 뮬딘, 그 녀석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냐?”
헬릭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맑았지만, 평소보다는 톤이 낮았다.
‘나와의 대화에 진지하게 임해주고 계시는구나.’
카이는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얼마 전에 헬릭 님과 뮬딘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어…… 다른 세계에서 우연히요.”
빠르게 머리를 굴린 카이가 대꾸했다.
차마 페가수스의 사장과 라무스의 개발자가 말해줬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다른 세계라…… 그러고 보니 그대는 얼마 전까지 마계에 가 있었지?”
“예.”
“그토록 가지 말라고 하였건만…… 한데 그곳에도 우리의 이야기를 아는 이가 있던가……?”
“음. 그게 이런 저런 기록이 남아 있더라고요.”
“아, 기록인가…… 그렇다면 가능할지도…….”
별생각 없이 납득을 마친 헬릭이 물었다.
“그곳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었느냐.”
“……뮬딘, 그 녀석이 헬릭 님을 죽이려 한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카이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화원에 울려 퍼졌다.
파르르.
마치 주변의 식물들조차 몸을 사리는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카이의 몸에서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분노 때문이었다.
“뭐, 일단 진정하거라.”
허나 정작 당사자인 헬릭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그를 진정시켰다.
“아니…… 헬릭 님을 죽이려고 한다니까요?”
“웅. 알고 있느니라.”
“그런데 왜 그렇게 태연하십니까? 그걸 보고만 있었어요?”
“그치마안…….”
헬릭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어깨도 축 늘어진 것이, 마치 비를 잔뜩 맞은 아기 강아지 같았다.
“나는 그 녀석이랑 싸울 정도로 강하지 않은 걸.”
“…….”
카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부분이 항상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헬릭 님. 신들의 힘이란 그들을 믿고 따르는 신도수…… 그러니까 즉, 신위(神位)와 연관되어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으으응. 조금 다르니라.”
헬릭이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그대는 학교를 다녀본 적 있느냐?”
“물론 있죠.”
“앗, 그럼 설명하기 쉽겠구나. 그대는 반장을 해본 적 있느냐?”
“두 번 정도는 있습니다.”
“대단하구나. 그럼 묻겠다. 반장이란 학급에서 어떤 존재지?”
“그야…… 학급을 대표하는 학생이죠. 당연히 공부도 잘해야 하고, 인망도 있어야합니다.”
“즉, 일반적인 학생보다 훨씬 유명하며 학급에서 지닌 영향력의 크기가 다르다. 맞느냐?”
“네.”
“하지만 어느 날 반장이 그 반에서 유우명한 불량 학생과 싸움이 붙으면 어찌 되겠느냐.”
“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헬릭이 당당하게 팔짱을 끼었다.
“유명하거나, 영향력이 있거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의미이니라. 결국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그런 건 모두 제쳐두고, 순수하게 무력만으로 부딪치게 되니까.”
“아!”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깨닫게 된 카이가 감탄했다.
“신들을 학교의 반장에 비유하신 거군요. 뮬딘은 불량 학생에 비유하고.”
“응응.”
팔짱을 끼고 있는 헬릭의 표정은 묘하게 뿌듯해보였다.
아마 자신의 비유가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이리라.
“흠. 과연.”
카이가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헬릭은 천계에서 가장 유명한 신이지만, 본신의 무력은 뮬딘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제가 헬릭 님 대신 뮬딘과 싸우겠습니다.”
“그대가?”
헬릭이 슥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카이를 빤히 쳐다보더니.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대로서는 무리구나.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해.”
“……격의 차이 때문입니까?”
우뚝, 흔들리던 헬릭의 고개가 허공에 멈춰 섰다.
“그것도 알고 있었느냐.”
“전 진심이니까요.”
그저 말뿐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헬릭을 살릴 것이다.
그러한 의진와 각오는 카이의 두 눈동자에 깃들었다.
“고, 곤란하구나.”
그 진지한 눈빛을 정면에서 마주한 헬릭이 부끄러운 듯 괜히 고개를 돌렸다.
“우음…….”
머리를 숙인 헬릭은 제 머리카락을 베베 꼬거나, 볼을 당기면서 고민을 이어갔다.
“흐아아.”
잠시 후, 갓 쪄낸 만두처럼 정수리에서 스팀을 뿜어낸 헬릭이 제 찻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방금 마신 건 아가릿 티.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차인데 어떠세요?”
“맛있구나. 다음에 사오거라.”
“넉넉히 사갈 테니 다른 신들이랑 같이 마시세요.”
“응응, 그리고 잠시 이야기가 샜지만…… 알겠느니라.”
헬릭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나의 사도. 시미즈도, 체란티아도, 그리고 패트릭도 알고 있었던 걸 그대에게만 말해주지 않는다는 건 불공평한 일이겠지.”
“어라, 그들은 헬릭 님과 뮬딘 놈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그야 딱히 엄청난 비밀은 아닌걸. 그밖에도 신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데…….”
뭐지? 이 엄청난 소외감과 허무함은.
카이는 괜히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찻잔에 차를 다시 채워주었다.
“그럼 설명 부탁드릴게요.”
“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이런 부분에선 말 주변이 서툰 헬릭이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두면 한참은 헤맬 것 같았기에, 카이가 슬쩍 지원해 주었다.
“우선 뮬딘이 왜 헬릭 님을 죽이려고 하는지부터 알려주세요.”
“아, 그건…… 어쩌면 내 잘못일지도…….”
헬릭의 조그마한 입이 우물쭈물거렸다.
“잠깐, 헬릭 님의 잘못이라니…… 혹시 먼저 시비라도 거신 거예요?”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헬릭이 빼액! 소리를 질렀다.
하긴, 사탕만 줘도 잠잠해지는 이 꼬마 여신이 누구에게 시비를 걸고 다니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럼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건데요?”
“어…… 음. 들어보거라.”
헬릭이 자신의 왼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반대쪽 손을 들어 또 주먹을 쥐었다.
“자, 여기 주먹이 두 개가 있느니라.”
“네.”
“왼쪽 주먹은 지금부터 태양.”
부웅부웅, 헬릭이 자신의 왼손을 귀엽게 흔들었다.
“그러면 오른쪽 주먹이 달인가요?”
“역시 내 사도다. 똑똑하구나!”
헬릭이 감탄했다.
‘아니, 이 정도는 당연히 알죠…….’
카이가 부연 설명을 부탁하는 눈빛을 보냈다.
“어……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꾸나.”
헬릭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만을 올려놓았다.
“자, 달이 지고 해만이 떠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느냐?”
“낮이죠. 정확히 말하면…… 새벽부터 석양이 지기까지.”
“정답이니라. 그렇다면 이건?”
이번에는 반대로 그녀의 왼손이 떨어졌고, 오른손이 올라왔다.
“밤이죠. 늦은 오후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의 시간.”
“맞다. 세상에 밝은 빛이 사라지고 희미한 달빛만이 존재하는 시간이지.”
두 손을 내린 헬릭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는 이 사실을 불쾌해했다.”
“……뭘 불쾌해해요?”
“나와 자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모든 부분을 불쾌해했다. 태양이 왜 하루의 시작을 여는 상징이 된 것인지.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에만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지. 왜 내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존경을 받는 것인지에 관하여.”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습니까.”
아직 마도학이 발달되기 전이라면, 아니 발달된 지금조차 마찬가지다.
‘인류에게 밤은 위험해.’
이 세계에는 몬스터가 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인간을 사냥하는 포악한 사냥꾼들.
게다가 조심해야할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같은 인간들.’
밤의 어둠을 틈타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당연히 비교적 안전하고 주변이 잘 보이는 낮을 중심으로 생활 패턴이 짜여질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잠깐만요. 그럼 설마 뮬딘은 헬릭 님을 죽이고, 세상을 자신의 위주…… 그러니까 밤이 기준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 한다는 소리입니까?”
끄덕끄덕.
헬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
교육 상 그녀의 앞에서 욕을 뱉어낼 수는 없었던 터라, 카이는 목구멍으로 욕을 삼켰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헬릭을 죽이려고 든단 말인가?
물론 그가 헬릭와 여러 부분에서 상반된 존재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빛과 어둠.
낮과 밤.
선과 악.
자비와 죽음.
서로가 대표하는 영역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헬릭과 뮬딘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이니까.
“하지만 상대방과 다르다는 것이, 상대를 죽여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잖아요?”
“그에게는 이유가 되는 것 같던데.”
“후. 진짜 양파 같은 신이네요. 까도까도 뭐가 계속 나오니.”
주먹을 꽉 쥔 카이가 입을 열었다.
“……인간은 격의 차이가 나는 이상, 신을 해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맞느니라.”
“그렇다면 그 격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
카이의 간절한 부탁에 헬릭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거기에 관해선 아무런 지식도 없느니라.”
“그런…….”
“역대 태양의 사제들도 그대와 같은 고민을 했느니라. 항상 나를 적대하는 뮬딘을 경계했고, 나아가서는 그를 없애 버리려고 했지.”
“성공한 사람이 없군요.”
“패트릭, 그 녀석이 반 정도는 성공했었느니라.”
헬릭의 말에 카이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패트릭 님이요?”
“응. 그는 자신이 완성시킨 검으로 뮬딘을 크게 베었느니라. 하지만 결국 인간의 격을 뛰어넘지는 못했는지 그를 죽이지는 못했지.”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광휘의 패트릭이 악신을 상대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용케도 살아남으셨네요.”
“그 전투에서 얻은 상처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나의 신성력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지독한 상처였지.”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는지, 헬릭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패트릭처럼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그녀는 자신을 제외하면 여태까지 세 명의 사도를 두었다.
그리고 세 명의 사도 모두가 뮬딘을 처치하는 데 실패했다.
당연히 그녀 입장에서는 겁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더더욱 성공해야만 한다.
토닥토닥.
“……?”
헬릭이 눈동자만 위로 올려 자신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카이의 손을 올려다보았다.
“헬릭 님은 제가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으니라.”
“헬릭 님이야말로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카이의 따스한 음성에 헬릭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으려 하지 마시고, 혼자서만 외롭게 지내지 마세요.”
문득 그녀와 처음 만나던 순간이 떠올랐다.
‘혼자였지.’
그녀는 그 넓은 천상의 섬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그때 교류가 있었던 신은 기껏해야 고작 둘, 로비와 호른뿐.
때문에 카이는 그녀가 친구를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열었고, 그 결과 칼 라샤라는 오랜 벗이 돌아왔다.
“헬릭 님은 요즘 행복하십니까.”
카이의 질문에 헬릭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하니라.”
그녀의 얼굴에 활짝 핀 웃음꽃을 바라보던 카이 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 행복이 오래갈 수 있도록 힘내야겠네요.”
“헤헤…….”
헬릭이 배시시 웃더니 두 손을 카이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소중한 친구와 간식들이 있고, 나를 생각해주는 그대와 간식도 있느니라.”
“간식만 두 번 들어갔는데요.”
“큰 걸 바라지는 않느니라. 그냥…… 조금만 더 이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구나.”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노력하겠다, 최선을 다하겠다.
카이는 그런 애매한 말을 남기지 않았다.
여태까지는 전대의 사도들, 즉 누군가가 걸어왔던 길만을 걸어온 카이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전대의 사도들조차 걸어가지 못한 길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한다.
누군가의 등을 보기보다, 자신의 등을 보여주며 앞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그런 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때문에 카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확신 어린 목소리를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