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09화 (409/441)

# 409

힐통령 409화

123. 사도회의(1)

대화를 마친 카이는 헬릭의 손을 잡고 기숙사로 들어섰다.

이제 슬슬 잘 시간이 되었는지, 헬릭은 걸으면서도 고개를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헬릭 님, 졸리세요?”

“웅…… 흐아암.”

놀랍게도 제 눈을 비비면서 하품하는 헬릭의 이동속도가 80% 가량 느려졌다.

“그럼 잠시 실례할게요.”

중력장을 이용해 그녀를 번쩍 들어올린 카이가 낮게 속삭였다.

“주무셔도 돼요. 방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도로롱…….”

헬릭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잠든 상태였다.

아기처럼 도로롱거리며 코고는 소리가 기숙사의 복도에 나지막이 울려퍼졌다.

‘조심, 조심.’

카이는 최대한 정신을 집중하여 그녀를 옮겼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중력장을 사용해 왔지만, 지금처럼 집중한 적은 기필코 처음이었다.

‘실수라도 해서 잠에서 깨시면 안 되니까.’

두둥실 떠오른 헬릭의 몸이 마치 허공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나아갔다.

똑똑똑.

헬릭과 라샤의 방 문을 조용히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카이 님…… 어라?”

라샤는 허공에 떠있는 헬릭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혹시 기절이라도 한 건가요!”

“아뇨. 그냥 졸려서 주무시는 중입니다.”

카이가 그녀의 오해를 단숨에 끊어냈다.

“아…… 못 살겠어 정말.”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른 라샤는, 제 친구가 창피한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왼쪽 침대를 가리켰다.

“저쪽에 좀 눕혀주세요.”

“예.”

헬릭을 무사히 눕히고 이불까지 톡톡 씌워준 카이는 그제야 라샤를 쳐다봤다.

그녀는 잠옷을 입고있었는데, 어린이들이 입는 캐릭터 잠옷이 아니었다.

마치 드라마를 보면 재벌집 자제들이 주로 입고다니는 반짝이는 실크 재질의 잠옷.

색상은 진한 자주색이어서 그런지 그녀가 한층 더 성숙해 보였다.

“라샤님 잠옷 잘 어울리시네요.”

“저, 정말이예요? 히히…….”

칭찬 한 번에 기분이 좋아진 라샤가 베시시 웃었다.

걱정했던 친구도 돌아왔겠다,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낸 라샤의 얼굴 위로 뒤늦게 피곤함이 몰려왔다.

“하우음. 저도 슬슬 졸려요.”

“어서 주무세요.”

“카이 님은…… 언제 또 오시나요…….”

“저도 오늘은 이 학원에서 묵을 것 같습니다.”

진짜 공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 아카데미엔 이사장실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니까.

“헤에…… 그럼…… 내일 아침에 뵈어요.”

누가 친구 아니랄까봐, 라샤도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두둥실.

그녀를 가볍게 들어올린 카이는 헬릭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에 보냈다.

두 사람 모두 이불을 씌워줬고, 인체 공학적인 자세로 눕혀주기까지 했다.

“음. 완벽해.”

두 여신이 도로롱거리며 꿈나라를 여행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카이가 방의 불을 껐다.

“좋은 꿈꾸세요, 두 사람.”

***

똑똑. 똑똑똑. 똑똑. 똑똑똑.

“으, 으으…….”

접속을 해제하지 않고, 가수면 모드로 잠을 자던 카이가 눈을 떴다.

아침부터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부실 듯한 기세로 두드렸기 때문이다.

“누구…… 누구세요.”

잠긴 목소리로 방문을 쳐다보며 묻자, 쾌활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대여! 아침이니라!”

“카이 님, 어서 일어나세요!”

“…….”

카이는 조용히 인터페이스 창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아침 7시.

‘어제 이것저것 자료들을 조사하다가 2시가 조금 넘어서 잤으니까…….’

다섯 시간을 채 못 잔 셈이다.

반면에 두 여신은 어제 9시가 되기도 전에 꿈나라로 떠났다.

“으으.”

역시 어린 아이는 잠이 많은 건가.

카이는 두 여신의 등쌀에 못 이겨 결국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좋은 아침이니라!”

“좋은 아침이예요, 카이 님.”

실컷 자고 일어난 두 여신은 피부마저 뽀송뽀송해 보였다.

그 모습에 괜히 심술이 난 카이가 그녀들의 볼을 쭉쭉 잡아당겼다.

“아, 아아앗…….”

“왜 이러세혀…….”

“아침 인사예요.”

카이의 인사가 끝나자 그의 왼쪽에는 헬릭이, 오른쪽에는 라샤가 자리잡았다.

“자, 어서 가야 되느니라.”

“늦으면 안 돼요!”

“저기, 어딜 가는데요?”

카이의 질문에 헬릭과 라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당연히 식당이지 않으냐.”

“카이 님은 아침 안 드시나요?”

“아뇨, 먹긴 먹는데…….”

잘 자다가 깨어나서 1분 만에 먹진 않죠.

하지만 카이는 별다른 말없이 그녀들을 따랐다.

“그런데 이렇게 서둘러서 가는 이유가 있나요.”

“있느니라.”

“어라, 설마 카이 님 모르고 계시나요?”

“뭘요?”

물론 이 아카데미를 지은 것은 카이지만, 식당 메뉴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때문에 두 여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는지 그로서는 궁금할 따름이었다.

“매일 아침 식사에는 선착순 30명만 먹을 수 있는 특별 메뉴가 존재하느니라.”

“진짜 맛있어요. 셰프님이 직접 요리하는 스페셜한 요리예요.”

“아…… 그런 게 있군요.”

카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에 헬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는 먹고 싶지 않느냐? 엄청 맛있는데…….”

“아뇨, 저도 먹고 싶긴 한데.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알데바란의 전쟁이 종결된 이후, 그나마 남아 있던 학생들도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지금까지 아카데미에 있는 학생들이라고 한다면.

‘사정이 있어 집에 돌아가는 게 끔찍이도 싫은 사람이거나…….’

카이가 시선을 내려 두 여신을 빤히 쳐다봤다.

‘특별 메뉴인지 뭐시기를 먹고 싶어서 안 가는 사람 정도겠지.’

하지만 그건 굉장히 안일한 생각이었다.

“뭐, 뭐야.”

식당에 도착한 카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아카데미에 상주하고 있는 학생은 17명을 넘지 않는다는 보고를 어제 받았었다.

‘아니, 어제 분명히 프레스콧한테 그런 보고를 받았는데?!’

하지만 현재 식당에는 못해도 50명이 넘는 학생들이 밥을 먹는 중이었다.

“어라, 이사장님 아니십니까.”

한쪽 구석에서 밥을 먹고 있던 프레스콧이 벌떡 일어나 카이에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프레스콧. 그런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뭐가 말씀이십니까?”

“어제 프레스콧이 교내에 거주 중인 학생이 17명 정도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아아, 맞습니다.”

프레스콧이 제 콧수염 끝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식사 시간에는 텔레포트를 이용해 학교에 오는 학생들의 수가 제법 많습니다.”

“……고작 밥을 먹으려고 식사 시간마다 텔레포트를 써서 여기에 온다고요?”

“그렇습니다.”

“맙소사.”

텔레포트 비용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물론 카이야 신출귀몰 스킬도 있고, 텔레포트 비용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불할 정도의 막대한 재력이 있다.

‘학생들 대부분이 귀족이라지만…… 밥 한 끼 먹자고 매번 텔레포트 비용을 쓴다고?’

대체 무엇을 위해서?

카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의 양옆에 서있던 두 여신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늦었…… 늦었느니라…….”

“다 끝났어요…….”

특별 메뉴인지 뭐시기를 놓친 두 사람의 반응에 괜히 마음이 안쓰러워진 카이였다.

그는 곧장 프레스콧에게 속삭였다.

“프레스콧. 오늘의 특별 메뉴는 뭐였나요.”

“셰프의 시그니쳐 샌드위치였습니다. 두툼한 햄과 각종 채소들, 셰프의 시그니쳐 소스가 가미된 메뉴였지요.”

“그거 따로 못 만드나요.”

“예? 그 말씀은…….”

프레스콧이 잠시 두 소녀들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이사장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죄송하네요.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되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이 님이 없으셨다면 이 아카데미도 없었습니다.”

프레스콧은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방에 가서 기다리죠.”

카이는 어깨가 축 늘어진 두 여신의 손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

아르칸 아카데미의 식당을 책임지는 셰프는 굉장히 유명한 요리사였다.

고용비만 하루에 백 골드에 육박하는 값비싼 인사.

그런 인물이 직접 재료들이 담긴 카트를 끌고 이사장실로 찾아와, 눈앞에서 요리를 했다.

당연히 카이를 바라보는 두 여신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대는…… 그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카이를 바라보는 헬릭의 눈동자에선 존경심이라는 감정이 뚝뚝 떨어졌다.

누가 보면 당장이라도 기도를 올릴 기세.

이쯤 되면 누가 신이고, 누가 신도인지 도저히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셰프님을 소환해서 눈앞에서 요리를…… 카이 님은 성공하신 분이었군요.”

“…….”

문득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천상의 정원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라시온 왕국의 동부 지역을 대표하는 대영주, 로드 오브 이스트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때 두 사람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대영주? 흐응, 그렇구나.’

‘축하드려요.’

그게 그녀들이 보였던 반응의 전부였다.

하나 지금은 달랐다.

“특별 메뉴를 원할 때마다 먹을 수 있는 남자…….”

“정말이지 대단한 권력자예요!”

반응만 보면 국왕보다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겠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세 사람을 위한 셰프의 시그니쳐 샌드위치가 준비되었다.

두 여신은 밥을 먹기 전에 간단한 기도를 했고, 고개를 돌려 카이를 쳐다봤다.

“음? 안 드시고 왜 저를 보세요?”

“프레스콧 교수의 도덕 수업 때 배웠느니라.”

“식사를 할 때는 웃어른이 먼저 한입 드시고 난 다음에 먹으라고 하셨어요.”

“아이구, 그런 걸 또 배우셨어요?”

카이는 예뻐 죽겠다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더니 샌드위치를 들어올렸다.

“그럼 제가 먼저 한입 먹어볼게요.”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먹은 카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마, 맛있잖아!’

아무리 맛있어봤자 결국 샌드위치라는 생각이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동시에 헬릭과 라샤과 왜 그리 특별 메뉴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 정도 수준의 식사를 아침마다 먹을 수 있다면…….’

과연 일찍 일어날 만도 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면,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특별 메뉴를 먹는 법이다.

“맛있느니라!”

“흑흑, 행복해요.”

아침 식사를 맛있게 마친 카이는 배를 두드리며 여신들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그때, 복도의 창문을 통해 수많은 학생들이 교정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하네요. 수업도 없을 텐데 다들 어딜 가는 걸까요?”

“그야 매점이겠지.”

헬릭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매점. 그러고 보니 그런 곳도 만들어놨었지.”

그제야 기억이 떠오른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의외네요. 두 분이라면 매점에 가자고 하실 줄 알았는데.”

카이의 질문에 헬릭과 라샤가 눈만 깜빡거렸다.

헬릭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대여. 매점에서 물건을 사려면 돈이라는 것이 필요해.”

마치 어린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듯한, 굉장히 친절한 목소리였다.

“예? 그걸 누가 모르…… 아?”

카이가 저도 모르게 말을 끊었다.

‘그러고 보니…….’

헬릭과 라샤에게 딱히 용돈을 쥐어준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에 다니기 전에야 천상의 섬에 있었으니 돈을 줘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카이는 설마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저기…… 혹시 두 분, 매점을 이용해본 적이 없으세요?”

끄덕끄덕.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헬릭이 자신의 교복 스커트에 달린 주머니를 뒤집어서 탈탈 털었다.

“돈이 없느니라.”

“저도요.”

옆에 있던 라샤도 함께 주머니를 털었다.

“크흡…….”

카이는 눈물이 핑 도는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녀들의 순진무구한 눈빛을 마주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돈이 없어서 매점을 가지는 못하고, 그곳을 방문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처지라니!

‘우리 애들…… 아니, 우리 여신님들이 이런 대우를 받게 할 수는 없지.’

카이는 인벤토리를 열어 골드 주머니를 각각 하나씩 꺼냈다.

“헬릭 님, 라샤 님. 이건 용돈이라는 겁니다.”

“용…… 돈?”

헬릭이 홀린 듯이 손을 뻗으려 하자, 라샤가 이를 말렸다.

“안 돼, 헬릭.”

“왜, 왜 안 되느냐?”

“프레스콧 교수님이 그랬잖아. 아무런 노력도 없이 대가를 얻어서는 안 된다고.”

“그랬…… 었지.”

헬릭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하지만 미련이 덕지덕지 뭍어 있는 시선은 여전히 골드 주머니를 향해 있었다.

“받으셔도 괜찮아요.”

카이가 두 여신의 손에 주머니를 강제로 쥐어주었다.

“하, 하지만 카이 님…….”

“라샤 님, 이건 그냥 드리는 게 아니에요.”

카이가 검지를 휘휘 저었다.

“이번에 시험 성적이 좋았으니까 드리는 보상이에요. 다음에도 좋은 성적을 받아오시면, 또 드릴거구요.”

“시험…….”

제 손에 들려있는 골드 주머니를 쳐다보던 헬릭이 비장하게 중얼거렸다.

“1등 하겠느니라. 정말이니라.”

“헬릭, 타인에게 선물을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더라?”

라샤의 부드러운 음성에 헬릭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배꼽 인사를 하며 카이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용돈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해요.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두 소녀에게 90도 배꼽 인사를 받게 된 카이가 눈시울을 붉혔다.

‘아아, 이게 행복인가.’

왜 명절 때마다 친척 어르신들이 용돈을 주시면서도 그렇게 좋아하셨는지 알 것 같다.

귀여워 죽겠잖아.

“두 분, 그럼 이제 매점에 가셔서 평소에 사고 싶었던 것들을 구매해 보세요.”

“웅! 다녀올게!”

“저도요!”

사이좋게 손을 잡고 복도를 뛰어가는 두 여신을 바라보던 카이가 소리쳤다.

“복도에서 뛰어다니시면 안 돼요!”

대체 무엇일까.

결혼도 못 해봤는데 벌써 학부모가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