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10화 (410/441)

# 410

힐통령 410화

123. 사도회의(2)

두 여신이 매점으로 놀러 가자, 카이는 신출귀몰을 이용해 리버티아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집 주인이다.”

“영주다.”

“카이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요정들이 그를 반겨주었다.

“영주가 왔다고 사람들한테 알릴까?”

“굉장히 반겨줄 거야.”

“축제가 열릴 거야.”

요정들이 요구했지만 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그리고 회의를 할 생각이니까…… 한 세 시간만 조용히 해줘.”

“응응.”

“세 시간, 세 시간.”

제 입을 틀어막은 요정들은 해맑에 웃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후우.”

자신의 집무실로 이동한 카이는 일인용 고급 소파에 몸을 묻은 뒤, 성물들을 내려다보았다.

새삼스럽지만 성물의 힘은 위대하다.

‘시미즈가 입었다던 성의, 체란티아가 끼고다녔다는 성환, 패트릭이 휘둘렀다는 성검…….’

각각 수백 년이 지난 성스러운 유물들.

역사적인 가치까지 따지자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구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건, 이미 사자(死者)가 되어버린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지금까지는 시끄러울 것 같아서 동시에 불러내본 적이 없었지.’

오늘은 사도들을 모두 소환한 뒤, 함께 회의를 해볼 생각이다.

당연하지만 주제는 헬릭을 살리는 방법이다.

“시미즈, 체란티아, 패트릭.”

담담하게 그들의 이름을 부르자, 성물들이 제각기 한 차례 빛났다.

-부르셨나요?

-음? 나를 부른 건가?

-…….

사도들의 목소리가 카이의 머릿속에서 한 번에 울렸다.

“안녕하세요, 다들 잘 지내셨죠?”

-저야 잘 지냈는데…… 잠깐만요. 방금 체란티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이 하이톤의 목소리는…… 설마 시미즈인가?

-어머머? 지금 초대 교황한테 말을 놓는 건가요? 저 태양교 사제단 1기예요, 1기.

-거, 다 같이 죽어서 천사 된 마당에 시시콜콜한 거 따지지 맙시다.

-이이…….

이래서 한 번에 부르지 않은 것이었다.

부르기만 하면 오디오가 꽉 차는 두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동시에 울리면 귀찮으니까.

“두 분 일단 조용히 해주시고…… 패트릭 님.”

-무슨 일이지.

-어머, 패트릭까지 있군요?

-호오, 그 재미없는 목소리는 분명 광휘의 것이로군.

-오래 있고 싶지는 않군. 용건만 말해다오.

패트릭은 벌써부터 두 사람에게 질렸는지, 탈출할 생각부터 품었다.

“아쉽지만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오늘 여러분들을 모신 건 회의를 하기 위해서거든요.”

-회의?

“예, 회의.”

카이가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하게 읊조렸다.

“그래서 말씀인데, 패트릭 님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들어보고 판단하지.

“지난번에 처음으로 패트릭 님이 제게 강림되셨을 때 말입니다.”

-아, 기억나요 기억 나. 그 때야말로 저를 부르실 줄 알았는데 말이예요.

-나는 분명 내가 지목될 거라 믿고 있었다.

“……두 분은 좀 조용히 해주시고요.”

옅은 한숨을 내쉰 카이가 말을 이어갔다.

“그때 패트릭 님이 절 심상 공간에 초대해 주셨잖습니까.”

-그랬지.

“그 곳으로 저희를 한 번 더 초대해 주실 수 있나요? 아무래도 중요한 사안이다 보니,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네 번째 사도여, 수양이 부족하구나. 눈에 보이는 것은 결국은 허상일 뿐.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회의는 충분히 가능하다.

패트릭이 칼 같이 거절했다.

자신의 공간을 두 사람에게 공개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모양이었다.

허나 나머지 두 사람의 의견은 달랐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전 패트릭의 심상 공간에 방문해 본 적이 없는데요.

-생각해보니 나도 없군. 한 번도 초대를 해주지 않았으니까…….

-저희도 초대해주세요. 가보고 싶은 걸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번 기회에 한 번 가보고 싶긴 하군. 물론 원활한 회의를 위해서네.

-…….

보이지는 않았지만, 패트릭의 원망 섞인 눈빛이 느껴지는 듯했다.

-후우.

결국 옅은 한숨을 내쉰 패트릭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초대하지.

동시에 카이의 시야가 바뀌었다.

‘똑같네.’

여전히 삭막하지만 깨끗한 신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패트릭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기도 중이었다.

“어머, 그립네요, 이 신전~”

“음. 과연 광휘인가. 심상 공간마저 신전일 줄이야. 독실하군.”

뒤쪽에서 시미즈와 체란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자리에 앉지.”

기도를 마친 패트릭이 몸을 일으키곤 손을 휘저었다.

그의 심상이 만든 공간이라서 그런 것일까.

예배 의자들이 환영처럼 사라지더니, 그 자리로 원형의 탁상과 의자가 들어섰다.

“다들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아, 물론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못 봤지만.”

시미즈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뭐, 다들 죽었어도 바쁜 몸들이니 말입니다. 천사의 일이라는게 마냥 한가하지는 않으니까.”

체란티아가 그녀의 말을 받았고, 카이와 패트릭도 자리에 앉았다.

“패트릭, 목말라요.”

시미즈가 칭얼거리자 패트릭은 카이를 한 차례 노려보더니, 물컵을 소환했다.

“어, 나는 가능하면 차로…….”

“물 밖에 없습니다.”

딱딱한 패트릭의 음성이 떨어지자 시미즈는 결국 물만 꿀꺽꿀꺽 마셨다.

“천계의 업무가 밀려서 바쁘다. 대체 무슨 용건인데 심상 구현까지 요청한 거지?”

패트릭의 시선이 카이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내면 당장 쫓아내겠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카이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헬릭 님에 대한 사안입니다.”

그 한 마디로 사도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다분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시미즈는 물론이고.

아예 두 눈을 감고 있던 체란티아가 두 눈을 뜨고 카이를 쳐다봤다.

“무슨 뜻인가.”

처음부터 카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패트릭이 물었다.

“얼마 전에 새로운 소식을 입수했습니다. 현재 헬릭 님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위험이라뇨? 대체 어떤 존재가 태양신을…….”

“……내 얄팍한 지식으로는 한 존재밖에 떠오르지 않는군.”

팔짱을 낀 체란티아가 묵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뮬딘.”

패트릭이 중얼거리자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뮬딘. 그 녀석이 머지않아 헬릭 님을 죽이기 위해 움직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정보의 출처는?”

“신빙성은요?”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제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합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카이의 진지한 표정은 이 상황이 거짓이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으음.”

동시에 사도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녀석, 이번에도 같은 일을 벌일 생각인가요.”

“처음이 어려울 뿐, 두 번째, 세 번째는 쉬운 법이지.”

“그래서 우리에게 요청할 도움이란 것은 뭐지?”

패트릭이 차분하게 요점을 물어왔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뮬딘에 대한 정보를 나눠주십사,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카이의 시선이 패트릭에게 향했다.

“패트릭 님은 뮬딘에게 상처를 입힌 유일한 인간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반쪽짜리 성공이었지만, 사실이다.”

“그 방법을 저에게 전수해 주십시오. 헬릭 님의 안전을 위해서 뮬딘을 꼭 죽여야 합니다.”

죽여야 한다.

그 말에 시미즈와 체란티아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카이 님, 뮬딘을 죽이는 건…….”

“힘든 길을 걸어가는가.”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하던 패트릭마저 입을 열었다.

“네 번째 사도여. 그대가 가려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쉬운 길을 바란 적은 없습니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신을 죽여본 적은 없지. 이론상으론 불가능한 도전이다.”

“하지만 패트릭 님은 성공하셨잖습니까. 반 정도는.”

“천운에 천운이 따른 결과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패했다.”

패트릭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인간이 지닌 종의 한계, 격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허면 어떻게 뮬딘에게 상처를 입혔습니까? 제가 듣기로 신들은 천계에서 상처를 입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맞다. 하여 난 그와 천계에서 다투지 않았다.”

“그 말씀은…… 잠깐.”

카이는 뒷통수에 망치라도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인간계! 그를 인간계로 끌어내리신 뒤에 싸운 거군요!”

그의 표정이 마치 해답이라도 찾아낸 학생처럼 밝아졌지만, 패트릭은 씁쓸하게 웃었다.

“일개 인간이 신을 하계로 끌어내리진 못하네. 그가 인간계로 내려왔던 것은 오만이었고, 방심의 결과였지.”

그로 인해 뮬딘은 큰 상처를 입었다.

그렇다면 그 일을 통해 틀림없이 배웠을 것이다.

“아마 그는 두 번 다시 인간계에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힘이 봉인된 하계에서 싸워봐야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결과가 먼저 나와 있다는 것.

처음부터 모든 가능성이 부정당한다는 것.

어떤 노력을 해도 결국은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제법 속이 쓰렸다.

하지만 카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포기하면, 모든 게 끝나.’

한없이 0%에 가까운 확률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법이다.

“우선 정보를 나눠주세요. 헬릭 님에게도 여쭤봤지만, 단편적인 정보밖에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건…… 헬릭 님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셔서 그래요.”

시미즈가 울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련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음. 차마 그대에게까지 말씀하지는 못하신 것 같군.”

체란티아가 살짝 부러운 눈빛으로 카이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대체 뭘요.”

대답을 재촉하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패트릭이 말을 툭 뱉어냈다.

“뮬딘은 헬릭 님의 하나뿐인 가족이다.”

“……뭐라고요?”

카이가 자신의 귀를 가볍게 후볐다.

“죄송한데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세요.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세 명의 사도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명시했다.

“주신이 이 세계를 만들고 가장 먼저 만든 것이 두 명의 신. 바로 빛과 어둠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 분께서는 헬릭 님과 뮬딘, 그 두 신만을 자신의 ‘아이’들이라고 지칭하셨어요.”

“한 마디로 뮬딘은…… 젠장, 그 녀석이 우리 헬릭 님의 오빠가 된다는 말이지.”

“그게 무슨…….”

카이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속이 울렁거리며 메스꺼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에 타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누군가가 쥐어뜯는 격렬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 녀석이 오빠라고? 가족이라고?’

자신의 조그마한 여신 님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미친 녀석의 정체가.

헬릭 님에게 있어선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문득 짐 박사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헬릭은 절대 뮬딘을 이길 수 없으니까.’

그것이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헬릭의 힘이 뮬딘보다 약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겠지. 무력적인 측면에서 헬릭 님이 밀리기도 할 거야. 하지만…….’

헬릭은 마음이 여린 아이다.

그녀의 곁을 조금이라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만 건씩 밀려들어오는 인간들의 소원.

그것들을 일일이 들어주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소녀가 바로 헬릭이었으니까.

“헬릭 님은…… 제 손으로 가족을 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의 생각은 옳았다.

세 명의 사도는 카이의 생각에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유예요.”

“뮬딘과의 싸움에서 헬릭 님이 무조건 질 수 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뮬딘이, 계속해서 헬릭 님에게 싸움을 거는 이유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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