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12화 (412/441)

# 412

힐통령 412화

124. 마스터(1)

회의가 끝나자 패트릭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며 세 사람을 쫓아내듯 내보냈다.

-그럼 저희도 슬슬 인사할까요?

-부디 여신 님을 부탁하지. 여차하면 나의 힘을 빌리게나.

“예, 감사합니다. 두 분도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인사를 마치자 자연스럽게 사도들의 기운이 사라졌고, 카이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온 몸의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지친다.

카이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슬며시 눈을 뜬 카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만 세 시간을 한 건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배웠고, 선대의 사도들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다.

“뮬딘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카이가 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니 뮬딘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중에 마르코 사장이나 짐 박사를 또 만나게 되면 한 마디 해야겠어.’

왜 놈을 그딴 식으로 프로그래밍 했느냐고.

‘그리고 슬슬 왕궁에도 들러야 할 시간이야.’

베오르크 국왕이 자신을 찾는다는 기별을 들은 것이 벌써 이틀 전이다.

노곤한 몸을 일으킨 카이는 신출귀몰을 이용해 왕궁으로 향했다.

“카이 님을 뵙습니다.”

인사를 받은 카이가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리자, 기사들은 여타의 말 없이 길을 비켜섰다.

카이의 기분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평소에는 인사를 건네면 마주 인사를 해오던 카이였으니까.

‘대충 용건만 끝내고 오늘은 좀 쉬자.’

접속을 종료하고 목욕탕이라도 갈까 싶다.

남부 영지에는 유명한 온천이 있었지만, 게임이 아닌 현실의 피로를 풀고 싶었다.

저벅저벅.

넓은 복도를 걸어가며 어떻게 해야 뮬딘을 죽일 수 있는지 한참 고민하는데, 맞은 편에서 누군가가 마주 걸어왔다.

“……카이였나.”

철혈 기사단장 바체였다.

그는 카이의 안색을 확인하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바체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겁에 질린 시종과 시녀들이 복도 벽에 내몰린 채 몸을 떨고 있는 중이었다.

“진한 살기가 느껴지기에 누군가하고 와봤더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로군.”

“……살기라고요?”

그제야 겁에 질린 사용인들을 인지한 카이가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 사과했다.

“이런, 미안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서 사라지자, 카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한심했기 때문이다.

그런 카이를 흘깃 쳐다본 바체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인가본데. 땀이라도 좀 흘리지.”

“……땀이요?”

바체를 따라가자 나온 것은 연무장이었다.

예전에 바체에게 검술을 배울 때, 제법 오랫동안 신세를 졌던 그 연무장.

“가끔씩 그 시간들이 그립더군. 뭐 얼마나 지났냐만은.”

스트레칭을 하던 바체가 그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알고, 맞춰주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미안하게…….’

마음이 조금 풀린 카이는 연무장에 비치된 철검 한 자루를 뽑아 검의 무게 중심을 확인했다.

“저랑 어울려주실 시간 있으세요? 바쁘실 것 같은데.”

“바빠도 구국의 영웅을 홀대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나.”

“영웅은요.”

카이는 겸손하게 중얼거렸지만, 이미 그의 인기는 라시온의 모든 기사를 아우르는 상태였다.

검 한 자루로 300만 대군을 쓸어버린 그의 신화는 고리타분한 책에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쓰여진 역사였으니까.

“그대의 검술 실력이 하늘에 닿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하늘이라.”

카이가 고개를 들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술이 하늘에 닿는다면 신을 베어낼 수 있을까.

‘무리겠지.’

검 한 자루로 세상을 평정했던 패트릭조차 실패했으니까.

하늘을 쳐다보던 카이가 바체에게 시선을 돌렸다.

“바체 님.”

바체가 왜 부르냐는 눈빛을 던졌다.

“바체 님은 그…… 뭐랄까, 신념이라는 게 있으십니까?”

“신념? 별일이군. 그런 걸 왜 묻지?”

“그냥…… 문득 저의 신념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바체가 피식 웃었다.

“싱겁군. 그나저나 신념이라.”

흘러 넘길 수 있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지하게 답변해 주었다.

“물론 나에게도 있다. 전하께 이 검을 하사받았던 순간 이곳에 새겨넣은 신념이지.”

바체가 주먹으로 자신의 심장을 툭툭 두드렸다.

“어떠한 신념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리 거창한 건 아니다. 나의 검 한 자루로 전하의 뜻을 실현시키겠다는 다짐일 뿐이니까.”

“충분히 거창합니다만…….”

중얼거리던 카이는 살짝 놀랐다.

“설마 바체 님이 그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아마 바체 님의 이미지가 살짝 차가우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반면에 품으신 신념은 완전히 열혈 쪽이니까…….”

“검사는 두 개의 심장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검을 쥐었을 때와, 쥐지 않았을 때.”

카이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바체가 은은한 미소를 드러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철학적인 생각을 품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그대의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것과 관련이 있나보지?”

“뭐, 그렇죠.”

자신만의 신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신념을 관철하며 성물을 만든다.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운 일이었다.

“인생이란 참 어렵네요. 예전엔…… 아니지, 불과 1년 전만 해도 말입니다. 저는 강한 힘을 지니고 돈만 많으면 세상이 제 위주로 돌아갈 줄 알았어요.”

“오만이군.”

“네, 오만이죠.”

카이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제가 위대하건 비루하건. 세상은 그냥 지멋대로 돌아가더라고요. 힘이 있고 돈이 있으면 분명 세상을 살아가는 게 편해지긴 하지만…… 그게 제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는 뜻은 아니었나 봐요.”

“뭐, 굳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지. 게다가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듯, 그대 인생의 주인공 또한 그대일 것이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 어?”

바체의 말에 부정을 하려던 카이가 돌연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만, 주인공이라?’

카이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뮬딘이 헬릭을 미워하고, 배제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결국은 그 녀석도 자기 혼자 다 해먹고 싶은 거잖아. 마치 주인공처럼.’

헬릭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만 빠져 스스로 사고의 폭을 좁히고 있었다.

하나 그 간단한 벽을 무너트리자, 생각이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더 넓어졌다.

‘뮬딘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자.’

그 녀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당연히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거나 봉인당한 뒤, 이 세상의 주인공이 헬릭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을 만들어서 협박한다면?’

짐 박사는 이미 알려주었다.

헬릭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가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뿐이라고.

“거짓말이 아니었어……?”

당시에는 분노로 머리가 꽉 차서 당연히 헬릭이 사라져야 한다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면 이야기가 상당히 재미있어진다.

‘헬릭 님이 봉인 된다는 소리는, 뮬딘과 그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리.’

헬릭을 죽이고 스스로 낮과 밤을 아우르는 존재가 되고픈 뮬딘은 당연히 그 상황을 반길 리 없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진행되면 뮬딘이 직접 움직일 거야.’

결국 헬릭을 미끼로 뮬딘을 언제든지 불러낼 수 있다는 소리다.

‘봉인 당한 헬릭 님을 데리고 지상으로 내려온다면?’

뮬딘 또한 울며 겨자먹기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

지상에 유능한 부하들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현재 지상에서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는…… 단언컨대 없다.

‘게다가 봉인이라는 형태는…….’

자신의 생각처럼 그리 심각한 게 아니다.

짐 박사는 칼 라샤를 들먹이며 봉인을 운운했었다.

‘그게 힌트였어.’

즉, 봉인은 당사자인 신이 풀고 싶을 때 언제든지 풀 수 있다는 뜻이다.

그녀도 그러했으니까.

“……됐다.”

정말 얼떨결에 뮬딘을 인간계까지 꾀어내는 방법은 발견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런데 놈을 불러내봤자 죽일 수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오히려 사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

헬릭 님을 빼앗기고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전에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해.’

자신의 성물, 자신의 신념.

인간을 초월하여 신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품격을.

“음. 얼굴을 보니 내가 무언가 도움이 된 건가?”

“예! 모두 바체 님 덕분이에요!”

카이가 환하게 웃으며 철검을 부웅부웅 휘둘렀다.

“답례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대련에 임하겠습니다.”

“……고마워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모르겠군.”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 바체가 검을 잡았다.

“예전에 절 가르치실 때를 생각하시면 큰일 나실 수도 있습니다.”

카이가 말을 마쳤을 때 바체는 이미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한쪽 손을 등 뒤로 돌린 채, 검을 늘어트린 자세.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바체가 카이를 무시하거나 방심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자세는 빈틈투성이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바체를 눈여겨 본 카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거, 진심이신가 본데.’

카이는 바체의 자세를 보고 살짝 감탄했다.

‘뭐, 어디 들어갈 만한 곳이 없네.’

어디로 들어가도 바체가 공격을 받아치는 그림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하나 카이 또한 이제는 검의 달인이라고 불릴 만한 몸.

없는 빈틈마저 만들어낼 만한 실력자였다.

휙!

시시콜콜한 대화는 없었다.

카이는 몸을 날렸고, 바체가 검을 휘둘렀다.

쇄액!

카이의 검을 빠르게 열두 번 찔러 넣었다.

머리부터 하체에 이르는 열두 개의 급소를 노린 날카로운 공습이었다.

까앙!

서로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정확히 한 번 울렸다.

열 두 번의 공방이 한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역시 바체의 검은 유려해.’

카이의 두 눈이 바체의 검을 좇았다.

그의 검은 마치 검무를 추는 것처럼 선이 가늘고, 동작들이 하나하나 섬세해서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하나 그 검로를 하나하나 낱낱이 분해해 보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우선 바체의 검술에는 뒤가 없다.

한 번 출수한 검은 반드시 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맹수처럼 상대방에게 달려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뭘까.’

바체와 검을 나누던 도중, 하나의 상념이 카이를 붙잡았다.

누군가는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누군가는 벽을 마주한 순간이라고도 부른다.

벽을 깨부순다면 새로운 경지에 이르겠지만, 반대로 넘지 못하면 심각한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

검을 맞대고 있던 바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빨리 깨달았고, 때문에 검에 힘을 더 실었다.

그 상황에서 오히려 검에 힘을 뺐다면 카이의 집중력이 깨질 수도 있었으니까.

까아앙!

바체의 검이 점점 더 흉포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카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땀을 흘릴 작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어설프게 행동하면 카이가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이를 꽉 깨문 바체의 검에는 가히 산을 갈라버릴 정도의 힘이 실려 있었다.

카이가 무언가 성취를 얻기를 바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콰아아아아앙!

거력이 담긴 검을 받아낸 카이의 신형이 연무장 바닥을 쭈욱 미끄러졌다.

그가 자세를 재정비하기도 전에.

쇄애액!

심장을 노린 검이 빛살처럼 뿌려졌다.

“크윽…….”

황급히 검을 세로로 들어 검면으로 이를 막아낸 카이의 몸이 충격으로 허공에 붕 떴다.

동시에 바체의 비어있는 왼 주먹이 카이의 명치를 파고들었다.

콰당탕!

연무장을 몇 바퀴나 굴러간 카이가 한 쪽 무릎을 세워 속도를 줄였다.

하나 그 순간 바체는 이미 카이에게 달려들던 중이었다.

“……!”

한쪽 무릎을 꿇고 연무장 바닥에 앉아 있는 카이.

그런 카이를 향해 쇄도하던 바체가 무언가를 느끼곤 돌연 몸을 뒤쪽으로 날렸다.

주변을 가득 채운 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정답이라고 외치기라도 하듯.

파사사삭!

바체의 발 앞에 존재하던 연무장 바닥이 모두 잘려나갔다.

꿀꺽.

바체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내가 조금만 늦게 반응했어도…….’

최소한 팔 다리 중 하나는 잘려나갔을 것이다.

‘지금 카이는 날 신경써줄 여건이 안 된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하느라 바쁠 것이다.

아마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공격을 쏟아내는지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후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대련이었는데.’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바체는 호흡을 안정시키며 다시 한 번 자세를 바로잡았다.

‘장단은 맞춰줄 테니…… 뛰어넘어라.’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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