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
힐통령 413화
124. 마스터(2)
세상에 백만 명의 검객이 있다면, 그 세상엔 백만 개의 검술이 있는 셈이다.
검술이란, 이를테면…… 헤어스타일 같은 것이다.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미용실을 방문해도, 서로의 두상과 모발의 상태, 머리카락의 길이에 따라 결과물은 확연히 달라진다.
검술 또한 마찬가지다.
똑같은 검술을 배우더라도 검사의 신체조건, 성격, 검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검술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뭐지?’
카이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질문해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검술이란 한낱 수단에 불과했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몬스터들을 잡아야 했고, 몬스터를 잡기 위해선 검을 휘둘러야 했다.
즉, 그에게 검술이란 레벨을 올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나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의 검은 몬스터를 잡았고.
그의 검은 NPC들을 구출했으며.
그의 검은 구출한 NPC들을 보호하기까지 했다.
검을 드는 이유가 점점 더 많아진 것이다.
‘내가 검을 드는 이유.’
나아가서 자신의 검에 담고 싶은 신념은 무엇일까.
바체의 경우엔 철혈이었고, 패트릭의 경우엔 필살이었다.
파발은 아군을 지키고자 수호라는 신념을 검에 담았다.
‘내 신념은 뭐지?’
신념이란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본인의 신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신념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다.
신념이란 개인의 가치관을 형성시켜주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카이는 진지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봤다.
헬릭을 지키고 싶으니까 수호의 신념이 맞는 걸까.
뮬딘을 처치하고 싶으니 몰살이나 파괴의 신념이 더 어울릴까.
한참을 생각하던 카이가 돌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것들이 아니야.’
태양의 사제로 전직하기 전의 카이, 한정우가 품어왔던 바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자유.”
잘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세상과 단절하여 방구석에 처박힌 그가 원했던 것은 자유였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타인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미드 온라인의 세계에 발을 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유라는 녀석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유란 누군가에게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러시아의 유명 작가, 톨스토이가 남긴 명언이다.
어렸을 적 지나가듯 보았던 책의 한 구절이 십수 년이 흘러 카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가. 당시의 내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건…….’
스스로가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기 때문인가.
쩌어어엉!
카이가 날아오는 바체의 검을 강하게 내려쳤다.
우드득!
“크읏!”
한쪽 무릎이 강제적으로 꿇려진 바체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카이는 정수리가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안개가 끼어 있던 것처럼 답답하던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유를 손에 넣는다는 건, 그 자유에 따른 책임 또한 짊어진다는 뜻이지.’
직장에서의 자유, 학업에서의 자유.
말만 들으면 달콤하다.
하지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어떨까.
아무리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가 짊어져야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우니까.’
하나 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행사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를 책임지는 건 당연한거야.’
그것은 자유를 쟁취한 자의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니까.
‘그러니까 앞으로 나는…….’
머리보다는,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고 싶다.
헬릭을 구하고 싶으면 헬릭을 구하고.
적들을 몰살시키고 싶으면 적들을 몰살시키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싶으면 선행을 베풀고 싶을 뿐이다.
그런 자유로움을 얻고 싶었다.
아니, 그런 자유를 스스로에게 주고 싶었다.
“바체 님.”
카이가 돌연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바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저릿저릿한 손을 억지로 감추며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린 건가.”
“예, 덕분에.”
“그렇다면 보여다오.”
바체가 자세를 취했다.
“그대가 자신의 검에 불어넣은 신념은 무엇인지.”
이미 그들이 서있는 장소는 연무장이라기보다는 폐허에 가까운 상태였다.
하나 바체의 자세는 처음과 같았다.
한결 같은 자세로 카이의 검을 기다렸다.
후우웅.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바체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동시에 카이의 신형 또한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바람이 되어 세상에 동화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어디…… 어디에?’
라시온 제일검이라 불리는 바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자신이 누군가의 움직임을 놓쳐본 것이 얼마만이던가.
그런 그의 시야로 별안간 날카로운 철검이 나타났다.
까아앙!
바체가 황급히 팔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하나, 그는 공격을 막은 직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뭐지?’
카이의 검술이 바뀌었다.
그것도 자신과 대련을 하던 잠깐 사이에.
그때부터 바체는 카이의 검을 눈으로 좇는 것도 벅차기 시작했다.
‘검술에…… 형(形)이 없다?’
검술이란 베기, 내려치기, 올려치기, 사선 베기, 찌르기 등등.
다양한 기초 검법을 조립해서 만들어지는 완성품이다.
하나 현재 카이의 검에는 그러한 형이 없었다.
바람처럼 뻗어 나오는 검은 자유의 의지를 품었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을 배회했다.
마음 가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카이의 손에 들린 검은 세상에 풀려난 개구쟁이처럼 종횡무진하며 바체를 압박했다.
난생처음 상대해보는 생소한 검술에 바체의 체력과 정신력은 빠른 속도로 방전되었다.
“…….”
잠깐의 공방 후, 카이는 자신이 쥐고 있던 철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게 아니다.
분명 지금 자신이 휘두르는 검은 한없이 자유롭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자유라는 건, 그 어떠한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힘이야.’
문득 답답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마치 자신의 검법이, 손 안의 별거 아닌 철검에 갇혀 있는 듯한 갑갑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철검을 그냥 놔버렸다.
철그렁.
폐허가 된 바닥에 떨어진 철검이 투박한 소리를 토해냈다.
“……무슨 뜻이지?”
바체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질문했다.
대련을 속행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체 님.”
“음.”
바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듣고 있다는 의사를 전했다.
“제가 검에 담은 신념은 자유입니다.”
“자유……?”
바체가 눈을 깜빡였다.
수많은 기사들을 봐왔고, 개중엔 대륙에 위명을 진동시키는 기사들도 있었다.
하나 자유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라는 직업 자체가 누군가에게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사단에, 교단에, 귀족에게, 국가에게, 주군에게.
자신의 검을 누군가에게 바치는 자.
그것이 바로 기사다.
하지만 카이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저 검을 든 사제일 뿐.
‘그렇기 때문에…… 자유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건가.’
바체의 전신에 흥분이 끓어올랐다.
“오라.”
여태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자유’를 추구하는 검.
그런 검술과 검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커다란 영광이요, 훈장이었다.
“그럼…… 갑니다.”
카이가 한쪽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선선한 바람이 손바닥을 때리더니,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갔다.
검을 들고 있을 때는 손 안에 쥔 검 하나가 공격 수단의 전부였다.
하나 카이가 검을 놓은 순간.
그가 마음에 품은 자유의 의지는 세상과 동조했다.
서걱!
“…….”
바체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절삭음에 저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연무장 주변을 두르고 있는 15미터 높이의 담벼락이 미끄러지듯 뒤로 넘어갔다.
할 말을 잃어버린 바체가 저도 모르게 담벼락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잘린 단면을 보더니 탄성을 뱉어냈다.
“날카롭다…….”
잘린 단면에 손을 갖다대자, 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고였다.
그 정도로 날카로운 단면이었다.
“카이. 이건 대체?”
궁금증을 참지 못한 바체가 물었다.
자유의 검은 바체의 몸을 뛰어넘어 담벼락만 베어냈다.
일반적인 검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의 경지였다.
카이가 진이 다 빠졌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저도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무형검, 혹은 심검.
그 어떤 이름을 붙이더라도 결국 말장난에 불과하다.
“검은 그냥 검이죠, 뭐.”
“……그런 건가.”
카이의 말에 바체 또한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맞다. 이건 그냥 검일 뿐.”
그는 발걸음을 옮겨 카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키가 주먹 하나 크기 정도 더 큰 바체가 카이의 어깨를 손을 올렸다.
전투 직후라 그런지 그의 손바닥에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잠시 카이를 내려다보던 바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부턴, 그대가 라시온 왕국의 제일검(第一劍)이다.”
“예? 제가 무슨…….”
“아니, 확실하다. 이제 이 나라에서…… 어쩌면 이 대륙에서 그대보다 검술이 뛰어난 자는 없을 것이다.”
바체 댄 블랙.
그의 두 번째 검술 스승은 자신이 건네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이에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진 카이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바체의 귀에 간신히 들릴 정도로 낮게 울린 중얼거림이었다.
그와 동시에, 카이의 눈앞으로 무수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여명의 검법 숙련도가 최대치에 이릅니다.]
[여명의 검법이 마스터 랭크로 상승합니다.]
[당신의 검에 대한 이해도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불가해의 영역인 자유의 힘을 손에 넣게 됩니다.]
[자유란 내부나 외부로부터 그 어떠한 구속이나 지배도 받지 않는 온전한 상태를 이릅니다.]
[마스터 전용 스킬, ‘무형검’을 획득하셨습니다.]
[플레이어 중 최초로 스킬을 마스터하셨습니다.]
[스페셜 칭호, ‘최초의 스킬 마스터’를 획득하셨습니다.]
[천계의 신들도 놀랄 정도의 위대한 업적입니다.]
[태양신 헬릭이 당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선행 스탯이 50만큼 상승합니다.]
[태양 목격자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선행 스탯이 추가로 25만큼 상승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스탯 포인트를 30개 획득했습니다.]
[당신의 검술이 하늘에 닿았다는 소문이 라시온 왕국을 기점으로 퍼지기 시작합니다.]
[명성이 1,250,000 상승합니다.]
[여러 세력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태양교의 명성이 크게 증가합니다. 한 달간 교단의 전파 속도가 25% 빨라집니다.]
[당신이 보유한 영지의 발전 속도와 영지민들의 행복도가 매우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후우.”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대단한 양의 텍스트들.
하나 카이는 그것들을 보는 순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스킬 마스터.’
사제인 주제에 검술 스킬을 마스터한 것이 웃기긴 하지만, 애초에 여명의 검법 외에는 마스터할 수 있는 스킬 자체가 없었다.
초급, 중급, 고급.
이렇게 세 개의 단계로 나뉘어서 성장하는 스킬만이 마스터.
즉, 극의를 노릴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태양의 사제는 대부분의 스킬들이 MAX LV.10으로 고정되어 있는 스킬들뿐.
만약 여명의 검법이 아니었다면, 카이는 평생 스킬 하나조차 마스터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축하한다.”
바체가 싱그럽게 웃었다.
“다행히 그대를 붙들고 있던 분노도 사라진 모양이군.”
“예, 모두 바체 님 덕분입니다.”
만약 오늘 바체를 만나지 못했어도 자신은 검술을 마스터할 수 있었을까?
새삼스레 인생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카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거 괜찮은 걸까요? 너무 날뛴 것 같은데.”
“괜한 걱정을 다 하는군.”
바체가 빙그레 웃으며 카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대는 돈이 많지 않은가.”
“…….”
구국의 영웅이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