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6
힐통령 416화
125. 지피지기(2)
띠리리, 띠리리.
시끄럽게 울리는 알림에 가수면 모드 상태에 빠져 있던 카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으암…….”
미드 온라인에 지원되는 가수면 모드는 이럴 때 좋았다.
게임을 종료하지 않아도 잠을 보충할 수 있고, 알림이 울리면 곧장 뇌파로 신호를 보내니까.
“정보 길드에서 온 우편이네.”
메시지 창을 확인해보니, 우편함에 새로운 소포가 도착했다는 알림이었다.
슬슬 도서관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인지한 카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태양교의 모든 역사를 저장해놓은 대도서관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지도 어연 2주째.
처음 방문할 때만해도 깨끗하고 정갈하던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너저분한 상태였다.
테이블 위로 무질서하게 놓여져 있던 책과 양피지들.
심지어 바닥에는 카이가 만복도를 채우기 위해 먹었던 음식 통들이 즐비하게 쌓여 있었다.
“끄응.”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청소한 카이는 처음과 같이 깨끗해진 도서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2주 동안 고생많았다.”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지난 2주 동안 자는 시간을 빼면 밥을 먹으면서도 책만 읽어댔으니까.
수능 공부조차 그렇게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스스로가 독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얻은 수확이 없지는 않아.’
오히려 차고 넘쳤다.
고대의 파피루스들에는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들이 많이 적혀 있었으니까.
‘고작 게임 주제에 이렇게 난해할 줄이야.’
확실히 미드 온라인은 여타의 게임과는 궤를 달리했다.
단순히 스토리가 정해져 있고, 그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엔딩을 맞이하는 게임과는 달랐다.
일반적으로는 알 수 없는 세계관과 스토리, 설정 등이 있었고.
그 설정을 찾지 못한다면 깰 수 없는 퀘스트나 업적 등도 존재했다.
‘격을 올린다는 것…… 생각보다 쉬운 일일 수도 있겠어.’
빙그레 미소를 지은 카이는 곧장 도서관을 나와 우편함으로 향했다.
신성 왕국 라피스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수많은 사제와 성기사들은 카이를 볼 때마다 성호를 그리며 인사했다.
딸깍.
‘확실히 있다.’
우편함을 열자 그 안에는 백과사전 다섯 권 분량의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
이외에도 조그마한 책자가 한 권 동봉되어 있었는데, 표지에는 안내문이라고 쓰여 있었다.
‘정보를 어떤 식으로 분류해 놨는지 알려주는 용도구나.’
즉, 자신들이 조사한 정보를 어떻게 보면 되는지를 가르쳐주는 일종의 설명서였다.
중력장을 사용해 자료들을 허공에 두둥실 띄워 올린 카이는 교단 내부에 위치한 자신의 방까지 걸어갔다.
나날이 위명이 높아져가는 성혈단이었기에, 단주인 카이의 방 역시 넓고 깨끗했다.
“어디보자…….”
카이는 가볍게 안내문부터 읽었다.
“헬릭에 대한 자료는 1권에, 뮬딘에 대한 자료는 2권에, 신들의 특징에 대한 자료는 3권 이후…… 아, 그리고 마족의 뿔에 관한 부분은 5권 뒤편인가.”
읽다보니 목이 뻐근해져서, 카이는 눈을 감고 목을 천천히 돌렸다.
“어후.”
지난 2주 동안 이미 책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본 상태.
그런 와중에 쌓여 있는 자료들을 또 읽으려니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그래도 읽어야겠지. 읽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동기부여가 조금 필요할 것 같다.
결정을 내린 카이는 손가락을 튕겨 아르칸 아카데미로 향했다.
우드드드득.
쨍쨍한 태양과 맑은 하늘이 카이를 반겼다.
“으으으음, 좋다!”
2주만에 라피스가 아닌, 다른 장소에 도착한 카이가 기지개를 펴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스트레칭이 끝난 카이의 얼굴 위로는 그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찌뿌둥한 몸을 한 차례 풀고 나자 기분이 조금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몸도 풀었겠다…… 두려운 숙제를 하러 가볼까.”
밝아졌던 카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전투를 목전에 둔 전사처럼 각오를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가락 끝이 잘게 떨려왔다.
‘대체 뭐냐고.’
카이는 교단의 도서관에 쳐박혀 있던 2주 동안 헬릭, 라샤와 연결된 폰을 꺼놨었다.
독서에 집중을 해야 하기도 했고, 아무리 혼자 사용한다지만 도서관에선 정숙해야 하니까.
그래서 도서관 청소를 마친 오늘에서야 폰을 꺼내봤는데, 그녀들에게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대여, 언제 와? (๑′ᴗ‵๑)]
[대체 뭘 한다고 그리 바쁜 것이야아아? *´A`*]
[으음. 오면 사탕 두 개 주겠느니라. 아끼는 딸기 맛도 하나 주께.]
이게 헬릭한테서 온 문자.
[카이 님, 요즘 바쁘신가요? 헬릭이 연락이 통 안 된다고 걱정하네요.]
[카이 님, 폰이 고장 나신건가? 아직도 문자를 안 읽으셨네요. 왜죠?]
[카이 님. 알버트 교장 선생님께 여쭤보니 태양교 본단에 있다고 하시던데……? 흐으음.]
[카이 님 거짓말쟁이. 다시는 허락 없이 저희만 남겨놓지 않겠다고 하셨으면서, (。·ˇ_ˇ·。)]
이게 라샤한테서 온 문자다.
처음 몇 개를 읽을 때는 아빠 미소로 읽었는데, 저런 문자들이 50개가 넘게 쌓여 있었다.
하루에만 몇 개씩 문자를 보낸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빈손으로 가면 안 될 것 같다.’
그녀들의 화를 잠재우기 위해선 달콤하면서 설탕에 범벅된 것들이 필요하다.
부랴부랴 마켓에 들러 케이크와 과자, 초콜릿 등을 산더미처럼 구매한 카이가 다시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똑똑똑.
그녀들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지만,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음? 이사장님 아니십니까?”
복도를 지나가던 수속성 마법학 교수가 카이를 보고 알은 체를 했다.
“안녕하세요. 슈론 교수님.”
“예. 따님을 보러 오셨나 봐요.”
“어…… 네, 뭐.”
입학 당시 알버트 교황에게는 헬릭이 머나먼 친척이라고 해뒀지만, 다른 이들에게까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가족이라고 두루뭉실하게 말을 해뒀을 뿐.
그래서 보는 사람마다 헬릭을 동생이나 딸로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헬리자베스라면 라샤 학생과 함께 밭에 가있을 겁니다.”
“……어디요?”
“밭이요. 아시다시피 교황 성하의 취미가 농작물을 가꾸시는 거잖습니까.”
“그렇죠.”
카이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라피스의 태양교 본단에는 우습게도 그의 전용 밭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헬리자베스와 라샤 학생이 교황 성하께 간청해서 밭의 일부를 사용하는 것을 허가 받았거든요.”
“아니, 갑자기 밭에는 뭘 심으려고……?”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다가다 봤는데, 아직 뭐가 자란 걸 본 적은 없어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슈론과 헤어진 카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아카데미 내부의 밭으로 향했다.
사실 이 밭도 원래 도시를 기획할 때는 없었는데, 알버트 교황을 꼬시기 위해 급하게 만든 장소였다.
당연히 태양교 본단의 있는 밭보다 더 크고, 흙들도 고르다.
“헬릭 님, 라샤 님!”
밭에 도착한 카이는 저 멀리 농부복을 입은 체, 쪼그려 앉아있는 그녀들을 불렀다.
슬쩍, 힐긋.
뒤를 쳐다본 그녀들은 카이를 본 체 만 체하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삐지셨네. 두 분다.’
어깨를 으쓱거린 카이가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대체 두 분 다 뭘 보고 계신…….”
“거기! 밟으면 안 되니라!”
“카이 님, 뭐하시는 거예요!”
두 여신이 돌연 비명을 지르며 카이를 타박했다.
“죄, 죄송합니다. 뭔가를 밟았나요?”
황급히 뒤로 물러난 카이는 바닥을 쳐다보며 사과했다.
허나 바닥에는 평평한 흙만이 있을 뿐, 뭔가를 밟은 것 같지는 않았다.
“흙 밑에 씨앗이 있느니라.”
“식물은 소중히 다뤄야 해요. 교장 선생님께선 그 아이들도 감정이 있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두 여신이 프로 농부 같은 발언을 꺼냈다.
“아아, 이제 막 심으신 거구나. 그럼 두 분 다 출출하실 텐데 이것 좀 드시면서 하세요.”
카이는 자신이 직접 사온 초콜릿을 그녀들에게 진상했다.
“그런데 대체 뭘 심으시는 거예요?”
그 질문이 나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헬릭과 라샤의 어깨가 으쓱으쓱 위로 올라갔다.
헬릭은 뿌듯한 표정으로 흐흥거리더니 제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카이여, 이것이 무엇이더냐.”
그녀는 카이가 진상한 초콜릿 하나의 포장지를 까더니,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물었다.
“초콜릿이죠.”
“혹시 그대는 초콜릿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느냐?”
“그야…… 카카오 나무에서 카카오 열매가 열리면 그걸 추출해서 2차 가공한 뒤 완성되죠?”
“어…… 자, 자세히도 아는구나.”
헬릭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를 옆에서 보다못한 라샤가 부연 설명에 나섰다.
“카이 님이 주신 용돈으로 매점에서 이것저것 다 먹어보고, 천국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천계 거주민들이 저런 말을 하니 심각한 위화감이 든다.
“네. 그런데요?”
“그런데 세상에! 매점에서 카카오 나무의 씨앗을 파는 거예요.”
“아카데미 매점에서 그런 걸 왜……? 아니, 그것보다 설마 그걸 사신 거예요?”
“흐흥, 더 이상 숨겨서 무엇 하겠느냐. 우린 스스로 키운 초콜릿을 만들어서 먹을 거다.”
헬릭이 팔짱을 끼며 두 사람의 포부를 드러냈다.
“실제로 요즘은 그게 유행이라고 하더구나. 친…… 친한…….”
“혹시 친환경이요?”
“그래, 그거!”
친환경이라면 의도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분들, 진짜 알고 있는 건가?’
카카오 나무는 열대 지방에서 잘 자라며, 열매가 달리려면 최소 5년 이상이 걸린다.
대량의 초콜릿을 만들려면 당연히 열매도 주렁주렁 달려야 하는데, 그건 최소 20년은 필요하다.
“그런데에. 씨앗을 심은 지 2주가 지났는데 열매가 안 열리는 것이다.”
“헬릭이랑 제가 신성력으로 축복까지 걸어줬거든요? 근데 싹도 안 틔워요. 물도 줬는데.”
두 여신이 찡찡거리자 카이는 조심스럽게 설명해 주었다.
카카오 나무는 열대 지방에서만 열린다는 점.
그리고 초콜릿을 만들어 먹으려면 최소 5년은 걸린다는 점 등을.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두 여신은 망치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개중에서도 헬릭은, 세상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허망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두 분의 신성력을 지속적으로 쬐어주면 아예 안 자라진 않을 거예요.”
무려 태양신의 신성력이니까.
실제로 태양교를 믿는 농부들의 비율은 굉장히 높다.
그녀는 풍요를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열매가 달리려면 최소 몇 년은 걸릴 텐데, 그래도 계속 하실 거예요?”
카이의 질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헬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두 할래…….”
“저도요…….”
헬릭과 라샤는 바닥에 쪼그려 앉더니, 아무것도 없는 흙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카오야. 빨리 자라렴. 매일매일 신성력 줄 테니깐.”
“나도 기다릴게.”
두 여신은 이미 카카오 나무에 카오라는 이름까지 붙인 상태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던 카이가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제가 사온 간식은 안 드실 건가요? 케이크도 사왔는데.”
“케이크! 먹을래!”
“초콜릿 케이크도 있어요?”
“그것뿐이겠어요? 딸기 케이크도 사왔는데.”
“허, 허억. 딸기 케이크!”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 여신은 밭을 나서는 카이를 졸래졸래 따라왔다.
카이는 화원에 앉아 그녀들이 간식을 냠냠 먹는 모습을 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