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17화 (417/441)

# 417

힐통령 417화

125. 지피지기(3)

밭일 덕분에 옷에 흙을 덕지덕지 뭍혀놓은 두 여신은, 간식을 먹자 고개를 꾸벅거리며 떨구기 시작했다.

카이는 자꾸만 테이블에 고개를 박으려는 두 여신의 어깨를 흔들었다.

“밖에서 주무시면 안 돼요. 감기 걸려.”

“우우웅…….”

“졸려요…….”

“아이고.”

결국 잠에게 패배한 두 여신을 중력장으로 가뿐하게 들어올린 카이는, 그녀들을 기숙사 침대에 눕혀주었다.

“지금 자면 밤에 조금 늦게 잠들 수도 있겠지만…….”

원래 어린애들은 낮잠을 자주 자는 편이니까.

‘그럼 성물에 대한 것도 다음에 물어봐야 되겠네.’

괜히 심술이 난 카이는 코오 자고 있는 헬릭의 코끝을 살짝 밀어올렸다.

“크어, 크허억, 크하으응…….”

헬릭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쿡쿡거리며 웃은 카이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덮어주었다.

일어나면 꼭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쪽지를 남겨둔 카이는 아르칸 아카데미를 떠났다.

“아, 성혈단주님 오셨습니까.”

“예.”

태양교 본단을 지키는 성기사들이 카이를 알아보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카이는 그들에게 당부했다.

“당분간 연구할 것이 있으니까, 사무실에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세요.”

“아, 저기 그런데…….”

성기사 하나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쪽에서 성혈단주님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다.”

“……저를요?”

“네. 지인이라 하셔서 우선 안쪽에 모셔놓긴 했는데…… 정말 지인이 맞는 지는 저희도 잘…….”

태양교 본단까지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은 없는데?

혹시 성혈단원 중 누군가가 찾아온 걸까? 성기사들의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고개를 갸웃거린 카이는 문을 열고 내부를 확인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집무실을 구경 중인 사람을 발견한 그의 눈이 커졌다.

“하린 씨?”

“아시는 분입니까?”

“아……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성기사들이 인사를 마친 뒤 물러가자, 유하린이 베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저 왔어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지, 우선 앉으세요.”

그녀를 자리에 앉힌 카이는 급히 시원한 차를 두 잔 준비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요즘 바쁘시죠?”

“뭐…… 아무래도 좀 그렇죠.”

카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최근 도서관에 처박힌다고 그녀에게 변변한 연락 한 번 보내지 못했었으니까.

‘물론 게임을 종료하고 나가면 하루에 10분씩 꼬박꼬박 전화를 하긴 했지만…….’

그들은 새내기 커플이다.

한창 풋풋하고, 알콩달콩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꿀이 떨어져야 할 시기.

그런 시기에 여자친구를 혼자 내버려 두는 남자는 아마 자신밖에 없으리라.

카이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유하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런 표정 지으세요? 죄 지은 사람처럼.”

뜨끔한 카이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비꼬는 말인지, 정말 순수하게 묻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그냥 미안해서요.”

“뭐가요?”

“요즘 제대로 연락도 잘 못하고 있잖아요. 하루에 10분씩 통화를 한다고는 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녀와 사귀고 난 뒤 데이트조차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 정말 나쁜 놈인데……?’

카이의 어깨가 축 쳐지자, 유하린이 쿡쿡 웃었다.

“아아, 알긴 아시는구나? 연락 잘 안 하시는 거.”

“죄, 죄송합니다.”

“자꾸 사과하지 마요. 사과 받을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단 말이에요.”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치더니 고개를 요리조리 돌렸다.

“어라, 또 사과하네. 이렇게 계속 사과할 정도로 잘못하신 건가? 앗, 그럼 나 화내야 하나?”

혼자서 말을 이어나간 그녀가 카이를 쳐다봤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 있죠? 그러니까 그렇게 자꾸 미안하다고 하지 마요.”

“죄, 죄송…… 아니. 알겠어요.”

“물론 저한테만이 아니라, 밖에서도요. 책에서 읽었는데 사과하는 것도 중독이래요. 썩 좋지 않은 버릇.”

“고칠게요.”

“그런 모습 보기 좋아요. 꾸준히 발전하시는 모습.”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유하린이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럼 뭐부터 하면 돼요?”

“……예?”

카이가 되물었다.

“무슨 볼일이 있으셔서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으으응.”

유하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요즘 바쁘신 거 전부 헬릭 님 때문이죠? 정확히는 뮬딘.”

“그렇죠. 뮬딘을 처치할 수 있는 방법…… 을 찾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모아두신 자료는 좀 있으세요?”

“예, 여기에.”

인벤토리에서 정보 길드의 보고서를 꺼내자, 유하린이 거기서 반을 딱 가져갔다.

“생각보다 많네요. 하지만 이 정도는 뭐…….”

“어라, 같이 조사해주시게요?”

“그럼요. 그리고 헬릭 님을 위하는 마음은 카이 님만 있는 거 아니거든요.”

귀엽게 백과사전을 살랑살랑 흔든 유하린이 인벤토리에서 안경을 꺼내들었다.

“어, 안경 끼셨어요?”

“아뇨. 저 시력 좋아요. 그런데 이 안경에 집중(Concentration) 마법이 달려있거든요.”

“아아.”

확실히 집중 마법을 사용한다면 같은 시간 대비 일의 효율이 증가한다.

“하린 씨는 안경 쓰셔도 예쁘시네.”

“에? 무, 네?!”

깜빡이 없이 들어온 덤프 트럭급 칭찬에, 유하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보면 볼수록 의지가 되는 사람이라니까.’

생각해보면 그녀는 정말 완벽한 인간이 아닐까 싶다.

조각 같은 미모와 출중한 능력은 물론이고, 생활력도 강하며 마음 또한 너그럽다.

커뮤니티에서 그녀를 여신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은 외관만 보고 하는 소리지만, 카이는 오히려 그녀의 내면이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배려해 주는 마음.

그게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누구나 가질 수는 없는 마음이었으니까.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녀에게 짧게 고개를 숙인 카이는 남아있는 보고서를 챙겨 들었다.

사르륵, 사륵.

단장실에는 한동안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

카이와 유하린은 함께 보고서를 읽고, 몸이 찌뿌둥하면 함께 연무장으로 나가서 몸을 풀었다.

그리고 배가 고파지면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기까지.

“어라, 이거…… 데이트죠?”

유하린이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글쎄…… 데이트는 이런게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카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단어를 골랐다.

그가 아무리 모태 솔로라지만, 데이트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밥도 먹고 커피도 먹고…… 어?’

함께 땀을 흘리면서 운동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기까지.

무언가를 깨달은 카이가 고개를 맹렬하게 끄덕였다.

“이거 데이트였네요?”

“그쵸? 제 말이 맞죠?!”

어리석은 커플 한 쌍이 신기하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데이트가…… 생각보다 재미없는 장소라서 마음이 좀 그러네요.”

“아니예요, 장소가 무슨 상관이겠어요. 가, 같이 있는 사람이 중요하지.”

귀까지 발갛게 물든 유하린은 괜히 고개를 돌리며 보고서로 제 얼굴을 부채질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카이가 피식 웃었다.

“그렇죠. 같이 있는 사람이 중요한 거죠.”

카이의 달달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던 유하린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여기 보고서에 중요한 정보가!”

“어? 어떤 부분이요?”

카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요?”

“여, 여기…….”

유하린이 들고 있는 보고서를 받아든 카이는 해당 페이지를 빠르게 읽어내렸다.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토론은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인간이 과연 신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다수의 신학자들은 불가능이라는 답을 내어놓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례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들은 신이 될 수 있는 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신위(宸威).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거룩한 힘.]

[두 번째는 신격(神格). 신으로서의 자격이나 격식.]

[신학자들은 사람들이 믿는 신들의 공통점을 분석한 결과, 저 두 가지가 필수 조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역사에는 수많은 영걸들이 존재했다. 마법의 힘으로 대륙을 둘로 갈라놓았다는 최초의 마도사에 대한 이야기부터, 검 한 자루로 산을 베었다는 성기사 이야기까지.]

[그들은 하나 같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힘을 지니고 있었고, 수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받던 존재들이었다. 허나, 그들 중 신이 된 자는 없었다.]

[고블린이 아무리 똑똑하고 강하다 한들 인간이 될 수 없듯, 인간 또한 신이 될 수 없다. 수많은 신학자들은 이를 인간의 한계라고 결론지었다.]

“신격이라.”

카이는 우선 신위에 대한 부분을 제쳐두고, 신격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확실히, 사람한테 기도를 올리는 사람은 없지.’

아무리 아득한 힘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 존재는 사람이니까.

그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만약 지금 당장 카이가 대륙을 돌아다니며 숱한 몬스터들을 해치워 명성이 크게 오르더라도.

그를 칭송하는 자들은 많아질지언정, 그에게 기도를 올리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게 신학자들이 말한 인간의 한계인가.’

그는 인간이니까.

몸이 뼈와 살로 이루어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니까.

실제로 신이라고 칭송 받는 이들을 보면, 그들의 실체를 본 이는 아무도 없다.

당장 헬릭만 봐도 그렇다.

지상에서 그녀를 본떠 만든 동상과 장식들도 모두 멋드러진 중년인의 모습을 띄고 있지 않은가.

‘이게 사실이라면…….’

스스로의 격을 상승시켜서 뮬딘을 처치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카이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유하린이 그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올렸다.

“카이님.”

“……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같이 찾다보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네, 분명.”

말을 꺼내는 유하린조차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조사한 모든 자료에서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고 나와 있어요. 어쩌면…… 그건 미드 온라인이라는 게임에 설정된 절대 불변의 법칙일지도 모르죠.”

사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미드 온라인은 싱글 게임도 아닌 온라인 게임.

그것도 수억 명의 유저들이 즐기는 초대형 온라인 게임이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건…… 100 스테이지까지밖에 없는 게임에서, 101 스테이지를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닐까라는 생각.”

그리고 그 부질 없는 노력의 끝은 생각보다 허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물들이는 부정적인 생각이다.

“으음. 그 부분에 대해선 저도 드릴 말씀이 없지만…… 꼭 카이님이 신이 되어야 하나요?”

“네. 마왕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신은 자신보다 격이 낮은 상대에게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요…… 물론 신이 인간계에 내려온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실제로 패트릭이 뮬딘에게 상처를 입힌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죽일 수 있다는 걸 증명하지는 않지.’

그저 상처를 입히는 것만이 가능하고 죽일 수 없다면, 결국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 카이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뮬딘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

그래야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음…….”

콧잔등을 찡긋거린 유하린이 안경테를 살짝 올려 고쳐 썼다.

“그러니까 신이 인간계로 내려오면 피해를 입는다는 소리죠? 원래 무적인데.”

“네.”

“그 얘기를 들으니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유하린이 우물쭈물, 자신 없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카이 님의 격을 끌어올릴 수 없다면…… 반대로 상대의 격을 낮추는 방법을 찾아보면 되는 거 아닐까요?”

“……예?”

카이가 고개를 돌려 유하린을 쳐다봤다.

‘뮬딘의 격을…… 신격을 낮춘다고?’

그의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

허나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한 대화가 흘러지나갔다.

-드래곤들은 먼 옛날 신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패배하여 물질계로 추방된 하위 신들이에요. 짧게는 수천 년, 길게는 만 년이 넘게 물질계에서 죽지도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벌을 받은 거죠.

예전에 시미즈가 지나가듯이 해줬던 말이었다.

카이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드래곤.”

“네?”

“드래곤이요. 제가 알기로 그들의 정체는 먼 옛날 상급 신들에게 대항했다가 천계에서 추방당한 하위 신들입니다.”

“어…… 정말인가요? 하지만 역사를 보면 드래곤은 인간들에게도 종종 사냥 당했잖아요? 물론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유하린의 질문에 카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 부분이 제일 중요한 겁니다. 인간에게 사냥을 당한다. 즉, 죽을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이 여전히 신의 ‘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해선 안 된다.

신격을 지닌 이는 하위 ‘격’을 지닌 이에게 피해를 입지 않으니까.

‘하지만 드래곤은 상처를 입는 것은 물론, 죽기까지 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드래곤들에게는 더 이상 신격이 없다.’

한 때 신이었다가 ‘격’을 잃고 물질계에 떨어진 이들.

하위 존재가 신이 되는 건 몰라도, 그 반대는 가능하다.

이미 드래곤이라는 확실한 전례가 있다.

“하린 씨,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어떤 말이요?”

머릿속이 맑아진 카이가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역사는 반복된다.”

History repeats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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