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8
힐통령 418화
126. 드래곤 레어(1)
카이는 유하린과 꼬박 하루 동안 보고서를 읽고, 그에 대한 내용을 서로 나누었다.
“역시 돈이 좋긴 좋네요. 이런 꿀 같은 정보들이 넝쿨째 굴러들어오고.”
“다행이에요. 어느 정도 실마리는 모인거죠?”
유하린이 안경을 벗으며 질문하자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물감들은 충분히 모였으니, 그림을 그려볼까 합니다.”
하얀 도화지를 자신의 입맛대로 채색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물감들이 필요하다.
‘다행히 쓸만한 정보들은 모두 모였어.’
이제는 조금씩 그림을 그려가야 할 시간.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고보니 하린 씨는 왕성에 이미 다녀오셨죠? 논공행상 주제로.”
“네. 전 처음에 호출됐을 때 바로 다녀왔어요.”
국왕 베오르크, 그와의 만남을 여태까지 미루고 있었으니까.
“끄응. 전 지금에라도 가봐야겠네요.”
“이틀 간 수고하셨어요.”
“저보다는 하린 씨가 더 수고하셨죠. 정말 고마워요.”
유하린에게 미소를 지어준 카이는 그 길로 왕궁으로 향했다.
땅! 땅! 땅!
왕궁에선 한창 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아니, 수리라기보다는…….
“그 쪽에는 대검 모양의 기둥을 일렬로 세울 생각입니다.”
“연무장은 10개…… 아니, 14개 정도 지었으면 좋겠군요.”
“인공 호수도 하나 지어놓는게 미관상 좋을 것 같네요. 검을 휘두르다가 지치면 쉴 수 있게.”
아예 바닥까지 다 뜯어낸 뒤 리모델링을 하는 중이었다.
카이가 지원해 준 드워프들이 공사를 전담했고, 바체는 눈을 반짝이며 그들에게 이것저것 요구 사항을 건네고 있었다.
“아주 좋아 죽으시려고 하시네요.”
“음? 자, 자네 왔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바체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연무장…… 원래 이렇게 안 넓었잖아요?”
카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훑었다.
짜놓은 틀만 보면 연무장이 아니라 무슨 주상복합 단지라도 들어서는 것 같다.
“……전하에게 허락을 얻어냈다. 기존에 잘 쓰이지 않던 숲의 일부를 개간해서 그쪽까지 연무장을 확장해도 된다고 하시더군.”
“이거 공사비 제가 대는 건데요?”
“커, 흐흠.”
바체가 고개를 슬며시 돌리며 저 멀리의 산을 바라봤다.
이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카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별로 상관은 없지만요.”
사실 공사비라고 해봐야 십억 정도밖에 안 된다.
여태껏 바체가 자신에게 해준 것들을 생각해보면, 밀린 수업료를 지불한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아무튼 이왕 짓는 거, 최대한 멋있게 지어보세요. 기사들도 팍팍 늘려야죠.”
“…….”
바체가 카이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굳게 다물어져있던 입을 열었다.
“내가 여태까지 자네를 오해하고 있었군. 이토록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아니, 성인(聖人)이었나…….”
“…….”
여태까지는 대체 평가가 어땠다는 거지?
카이가 살짝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바체가 다시 고개를 스윽 돌리며 중얼거렸다.
“적당히 이기적인 모험가라고 생각했는데…….”
“다 들리거든요?”
“자네는 귀가 참 밝다는 장점도 있군.”
결국 바체 또한 나라의 녹을 먹는 자.
연무장을 증축하고 싶었지만 매번 예산 문제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걸 자신이 해결해 준 셈이다.
당연히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천사처럼 보일 수밖에.
“나중에 연무장이 완성되면, 와서 강습이나 한 번 하지.”
“제가요? 에이, 제 주제에 무슨 강습을…….”
카이가 손사래를 치자 바체의 두 눈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대 주제가 어때서 그러나.”
“예?”
“저번에 한 말은 빈말이 아니다.”
바체의 시선이 카이를 꿰뚫었다.
“그대는 라시온 제일검. 어깨와 가슴을 펴고, 그 긍지를 심장에 새겨라. 그대는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다.”
단단하면서도 엄한 목소리에 카이는 저도 모르게 가슴과 어깨를 쭉 폈다.
“이미 파발이나 다른 기사들에게도 모두 말해놓았다. 그대가 나를 아득히 뛰어넘었노라고.”
“아니,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재미있지 않은가.”
고개를 올려 하늘을 쳐다보는 바체의 입가에는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기사 몇을 감당하지 못해 나의 도움을 받던 모험가였는데.”
아무래도 화이트홀 때의 이야기인 것 같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모험가는 정말 대단하군. 성장 속도도 놀랍지만…… 자네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느껴져.”
바체의 주먹이 카이의 심장을 가볍게 톡 두드렸다.
“라시온 제일검이 되었지만, 정체하지 말고 더욱 높이 올라가라. 검을 통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내가 직접 보진 못하겠지만 자네를 통해서라도 보고 싶으니까.”
“저는 일단 사제이긴 한데…… 아무쪼록 정진하겠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이라.
정말로 그럴까.
바체의 말대로 모험가에게는, 플레이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뭐, 가보면 알겠지.’
그 길의 끝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
“베오르크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카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이에 베오르크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무릎을 풀고 일어나라. 나라를 구한 영웅을 무릎 꿇릴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으니까.”
“아니, 무슨 말을 또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카이에게 다가온 베오르크가 그의 어깨를 몇 차례 두드렸다.
큰 힘이 실려 있지는 않았지만, 그의 고마운 마음이 담겨 묵직한 손바닥이었다.
“정말 고맙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영지민을 보호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내는 일.
영주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그조차도 안 하고 도망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이번 전쟁에 대한 보상으로 그대에게 무엇을 내려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었다.”
과연 베오르크.
시원시원한 인물답게 앞뒤 재지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왕궁의 보고(寶庫)는 이미 그대에게 몇 차례 개방한 적이 있었지. 아마 얻을 만한 것도 그 때 모두 얻어갔을 터.”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지를 내릴까 생각했지만, 그대가 지금 관리하는 영지만 수십 여 개. 그 이상은 오히려 부담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더군.”
“신하의 마음을 헤아려주신 점, 탄복하였습니다.”
그의 말처럼, 지금 카이는 자신이 관리하는 영지가 총 몇 갠지도 알지 못했다.
억지로 떠맡게 된 동부 영지들은 아직 이름조차 다 외우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더 이상의 영지는 보상이 아닌 짐이 될 뿐이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잠자리조차 뒤척였다. 참 많은 고민을 하였지.”
베오르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그의 눈밑으로는 이전에 없던 다크서클이 보였다.
“하여 대신들을 모아놓고 머리를 맞댄 결과,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경청하겠습니다.”
어찌됐든 자신에게 뭔가를 준다는 소리다.
이득을 보면 봤지, 손해를 입을 일은 없다는 뜻.
카이가 고개를 숙이자 신하 하나가 베오르크에게 금색의 양피지를 가져다주었다.
촤아악!
단숨에 양피지를 펼친 베오르크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뱉어냈다.
“지금 이 시간부로, 카이 백작을 아크듀크(Arcduke)의 위(位)에 봉한다.”
“……!”
그 말에 카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전하……?”
아크듀크는 대공을 뜻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현재 카이의 직위는 백작.
오등작의 최상위인 공작조차 아래로 보는 것이 대공이다.
한 마디로 카이를 두 단계 이상 파격 승진시키겠다는 뜻.
‘게다가 내가 알기로는…….’
대공은 백작이나 공작처럼 단순히 명예만 따르는 직위가 아니다.
그 생각이 맞다는 듯, 베오르크의 말이 이어졌다.
“이 시간부로 라시온의 동부 지역은 공국으로 취급되며, 이는 라시온 왕국과는 별개인 독립 국가로 선언한다.”
“이에 따라 이후 카이 백작의 호칭을 대공, 혹은 공왕(公王)으로 명명한다.”
독립된 별개의 국가.
카이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곧 오겠네.’
아니나다를까, 그의 귓가에 사이다 터지는 듯한 축포 소리가 터져나왔다.
띠링!
[말도 안 되는 업적! 플레이어 중 최초로 일국(一國)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스페셜 칭호, ‘공왕(公王)’을 획득하셨습니다.]
[출세가도! 라시온 왕국을 기점으로 당신의 출세 신화가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명성이 523,000 상승합니다.]
‘스페셜 칭호, 공왕이라.’
비록 국왕(國王)은 아니었지만, 칭호의 효과에 크게 차이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최고의 선물이네.’
솔직히 여기까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돈이나 무구 몇 개 정도를 챙겨주고 끝낼 줄 알았는데…….
‘베오르크 국왕, 역시 사람을 잘 챙기네.’
사람을 잘 챙기는 군주는 대대로 성군(聖君)이었다.
아랫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믿고 따르게 만드니까.
그런 사람의 밑에서 일을 하면 스스로가 하는 일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라시온 왕국은 점점 강해지겠어.’
어쩌면 훗날 제국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니, 적어도 자신이 라시온 왕국에 적(籍)을 두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제국이 될 것이다.
“전하의 성은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훗.”
베오르크는 카이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 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는 스스로가 내린 포상에, 뿌듯해하며 만족하는 중이었다.
“카이 백…… 아니, 카이 대공.”
“하명하십시오.”
“어감이 참 좋군. 혀에 딱 달라붙는 어감이로다. 카이 대공, 카이 대공…… 진작 승작시켜 줄 걸 그랬군.”
“솔직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걱정도 되는군요. 이 사실이 공표되면 많은 사람들이 반발할 겁니다.”
“흥, 마침 잘됐군. 전쟁을 하느라 뽑았던 검은 아직 검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
“…….”
괜히 철혈 군주가 아니다.
가문의 존속을 원하는 귀족이라면 감히 베오르크에게 반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나의 신하라는 점에는 다름이 없지만, 앞으로는 일일이 무릎을 꿇을 필요는 없다. 이제는 그대도 한 나라를 이끄는 몸. 그대가 무릎을 꿇는다는 건, 그대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의 무릎도 함께 꿇리는 것이라는 걸 명심해라.”
“……그렇군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카이는 이제 자신이 앉은 자리에 걸맞는 행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항상 당당하게.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항상 당당하게, 맑게, 자신있게.
카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안 했다면 함께하지.”
“초대해 주신다면 영광이지요.”
왕궁의 정원으로 이동한 두 사람은 요리사가 즉석에서 해주는 요리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전쟁도 끝났으니 앞으로 한동안은 또 두문불출하겠군.”
“마음 같아서는 저도 집에 콕 박혀있고 싶은데…… 아쉽게도 그건 불가할 듯싶습니다.”
“음?”
베오르크의 눈썹이 위로 슬쩍 올라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예. 일이라고 해야 할지…… 만나보고 싶은 존재가 있어서요.”
“호오? 이거 나까지 다 궁금해지는군. 그게 대체 누군가? 그대의 위치라면 웬만한 인물들은 당장 만나볼 수 있을텐데.”
“아아. 물론 사람이라면 쉽게 만나볼 수 있겠죠.”
“그 말은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로군?”
이해가 빠른 베오르크의 말에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입니다. 그것도 드래곤 족의 로드이자 가장 나이가 많다는 고룡(古龍), 엘더 드래곤을 만나고 싶습니다.”
“흐음. 엘더 드래곤이라…….”
베오르크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고민에 빠졌다.
“혹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만약 엘더 드래곤과 싸우려는 것이라면…….”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굳이 그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용 사냥꾼의 냄새를 풍기는 자신을 그들이 용서할 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단지…… 저는 그들을 통해 무언가 알아내고 싶은 게 있을 뿐입니다.”
“하긴, 드래곤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자들. 개체 하나하나가 지식의 보고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들이지.”
말을 마친 베오르크가 돌연 빙긋 웃었다.
“이거, 오늘 건네는 선물이 하나가 아니었군.”
“예?”
“드래곤 로드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건 같은 드래곤들밖에 없다는 사실, 알고 있나?”
“예. 그래서 정보 길드를 통해 드래곤들의 위치를 알아볼 생각이었습니다만…….”
물론 정보 길드조차 그들의 소재를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사룡 시네라스처럼 미쳐 버린 드래곤이라면 대놓고 활동을 해서 위치를 특정 짓기 쉽지만,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쥐 죽은 듯이 살아가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베오르크가 딱 잘라 말했다.
“드래곤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재해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들. 나라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그들은 항시 주시해야 하는 위험 요소들이다.”
“그 말씀은……?”
베오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알고 있는 드래곤들의 위치를 공유해주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