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1
힐통령 421화
126. 드래곤 레어(4)
메모리 다이브를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
처음 사용했을 때는 ‘로엔’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고.
그의 기억을 살짝 고침으로써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다르네.’
카이는 차분한 눈빛으로 눈앞의 메시지 창을 읽어내렸다.
띠링!
[드래곤 로드의 기억 세계에 입장하였습니다.]
[경고, 대상의 기억량이 너무 많습니다. 자그마한 기억이라도 수정하거나 삭제할 시, 연쇄작용으로 대상의 성격이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만약 드래곤 로드가 흉포해질 경우, 대륙의 안전이 크게 위험해집니다.]
[대상과의 종족이 다릅니다. 대상과 동조할 시,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기억을 ‘로드’할 때, ‘관전’ 기능을 사용하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음. 로엔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정과 삭제가 안 된다는 건가.’
이건 대상이 드래곤 로드이기에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기억을 어떻게 고치느냐에 따라 드래곤 일족을 개인이 거느릴 수도 있었으니까.
‘그건 심각한 밸런스 붕괴지. 암암.’
이 게임의 밸런스가 완벽하다고 믿는(?) 카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메시지 창에서 시선을 뗀 카이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와우.”
그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메모리 다이브를 사용하면 오게 되는 무(無)의 공간.
그곳에는 대상의 기억들이 썸네일처럼 공간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로엔 때와 똑같아. 똑같은데…….’
로엔은 20살도 안 된 청소년.
반면에 드래곤 로드는 살아온 시간부터가 다르다.
1만 년.
그 아득한 시간 동안 겹겹이 쌓인 기억들.
“그 결과가 이건가.”
전후좌우, 심지어 보이지 않는 하늘의 끝까지.
공간이란 공간을 드래곤 로드의 기억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계속 보다보니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로엔의 기억은…… 중간중간 끊어진 부분도 있었는데.’
허나 드래곤 로드의 기억은 그런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카이는 그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형벌이라, 과연 그렇네.’
드래곤은 천계에서 추방당한 ‘범죄자’.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망각’을 선물 받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이래서 사룡처럼 미쳐버리는 드래곤도 나오는거겠지.’
자신이 겪어온 모든 순간들을 찰나조차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이 모든 기억들이 드래곤 로드의 머릿 속을 항상 떠다닌다는 거잖아?’
카이는 살짝 안쓰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손을 휘저었다.
“키워드, ‘과거’에 대한 기억만 남기고 싹 다 치워.”
명령이 떨어지자 카이의 주변들 파노라마처럼 돌아다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그래도 제법 많네.”
과거라는 키워드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떠돌아다니는 기억은 무려 수백 여 개.
카이는 주변을 떠다니는 기억들 중 제법 중요해보이는 기억 하나를 가리켰다.
그러자 썸네일이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날아왔다.
“기억 로드.”
띠링!
[경고, 대상과 종족이 다릅니다. 동조할 시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그래도 동조하시겠습니까?]
“아니, 관전으로.”
시스템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누차례 경고해 줬다.
그렇다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는 법.
게다가 스스로도 두려웠다.
‘순간이지만 내가 드래곤이 되는 거잖아.’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걸어야 하며, 등 뒤에 날개가 생긴다.
모든 사물이 자그맣게 보일 것이 분명하며 잠깐의 기억조차 망각할 수 없다.
‘그런 경험은 사양이라고.’
[기억이 ‘관전’ 모드로 재생됩니다.]
[기억 속에 당신의 아바타가 생성됩니다.]
주변의 시야가 도트 그래픽처럼 점멸하더니,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타닥, 타닥.
조그마한 횃불 하나만이 비추고 있는 어두운 방 안.
그곳에 위치한 테이블 앞에는 네 명의 청년이 앉아있었다.
“로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뭐지?”
“우리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다.”
‘저 사람이 로드?’
벽에 붙어있던 카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아까의 노인과 이목구비가 상당히 닮아있었다.
다만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나, 다부진 몸 등은 확실히 다르다.
젊은 시절의 로드는 아까의 인자한 노인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베오르크 국왕과 비슷한 분위기라고 할까.
‘일단 지켜보자고.’
카이는 벽에 기댄 채 그들을 지켜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상하다. 42마리. 가장 먼저 눈을 뜬 내 다음으로 차례대로 눈을 뜬 일족의 총 개체 수다.”
“하아, 또 그 소리야?”
“이제 그만 좀 하자. 벌써 천 년이나 지났어.”
“과거에 대한 기억이 좀 없으면 어때? 우린 이 땅에서 신과 같은 존재고, 그 어떤 생물도 우리에게 대항할 수 없어.”
“그렇게까지 과거에 연연하는 이유가 뭐야?”
함께 모여있던 청년들이 투덜거렸다.
카이는 그제야 그들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최초의 드래곤인 로드를 저렇게 대한다는 건…… 저들이 장로 드래곤들이구나.’
이렇게 남의 기억을 구경한다는 거, 생각보다 흥미롭다.
카이는 마치 드라마를 보는 사람처럼 편안하게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의 원인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왜 이런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어째서 단 한 순간의 기억조차 망각할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나?”
“전혀 안 궁금한데?”
“그게 대체 왜 궁금하지? 그냥 우린 타고난 거야. 종 자체가 우월해서 태어날 때부터 마법을 다룰 수 있고, 머리가 존나 좋아서 아무것도 안 잊어버리는 거라니까?”
장로 드래곤들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드, 그 어떤 드래곤도 과거를 궁금해하진 않아.”
“과거보다는 현재에 대해 더 고민해보자고.”
“현재라니?”
로드의 질문에 장로 드래곤들이 이 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몰라서 물어? 요즘 들어 천계에서 계속 시비 걸잖아.”
“마치 저들이 상전인 것처럼 이거 안 된다, 저거 안 된다…… 짜증나 죽겠다니까.”
“특히 태양신, 그 녀석 간섭이 제일 심해. 인간 죽이지 마라, 엘프 죽이지 마라, 뭐 다 죽이지 말래.”
“반면에 뮬딘이라는 녀석은 말이 좀 통하긴 하더라.”
“천계…….”
장로들의 투덜거림을 듣던 로드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저희들끼리 천계의 신들을 욕하던 장로 드래곤들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로드, 과거에 대한 생각 좀 떨쳐내. 그러다가 병 된다 그거?”
“현재를 즐기라고. 지금 너 좋다고 구애하는 드래곤이 몇인데.”
“일족의 대장이 천 년 동안 과거만 쫓아다녔다는 거 소문나면, 우리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녀.”
장로 드래곤들이 텔레포트를 이용해 사라지자, 로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횃불이 일렁일 때마다 그의 근심 가득한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이는 기억을 중지시켰다.
‘이 기억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총 세 가지.’
과거를 찾기 시작한지 천 년이라고 했다.
그럼 이 기억은 현재로부터 대략 9천 년 전이라는 것.
그리고 드래곤들은 이 때부터 신들을 싫어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뮬딘에 대한 드래곤들의 평가는 생각보다 좋다는 것이었다.
‘시미즈의 말이 맞았네.’
뮬딘은 오히려 드래곤들이 날뛰는 것을 장려하기에 사이가 좋다고 했었으니까.
“기억 종료.”
주변은 다시 기억의 세계로 바뀌었고, 카이는 자신이 보았던 기억을 목록에서 치웠다.
“음. 이런 기억들도 재미있긴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건 이런 게 아니야.”
카이는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기억들의 썸네일을 하나씩 지켜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그의 입가로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거다.’
자신이 원하는 기억이 무엇인지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라고 했지.’
드래곤 로드가 말했었다.
그 날이 최초의 기억을 지닌 날이었노라고.
카이가 집은 썸네일은 잿빛 하늘과 빗방울로 가득했다.
“기억 로드.”
쏴아아아-
시원한 빗소리가 카이의 귓등을 때렸다.
“음.”
그는 어느새 숲에 위치해 있었다.
열대 밀림에서나 자랄 법한 거대한 야자수 나무와 잎사귀들이 가득 보였다.
‘비는 안 맞는구나.’
떨어지는 빗줄기는 카이의 몸을 그대로 관통했다.
“로드는…… 아, 저기 있다.”
카이는 숲 속에 누워있는 드래곤에게 다가갔다.
드래곤의 몸집은 대략 8미터 정도.
‘해츨링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크기네.’
말 그대로, 드래곤이 갓 태어나면 이 정도 크기가 아닐까 싶다.
부르르.
시원한 빗줄기가 드래곤의 몸집을 두드리기를 잠시.
로드의 눈꺼풀이 가볍게 경련하더니, 위로 올라갔다.
쏴아아아, 쿠르릉!
로드는 눈을 깜빡이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잿빛의 하늘과 빗줄기, 간간이 떨어지는 벼락만이 반사되었다.
주르륵.
이를 쳐다보던 로드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끼잉…… 끼이잉…….”
로드는 신음을 뱉어내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 순간에도 그의 눈동자는 잿빛의 먹구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먹구름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듯한 아련한 눈빛이었다.
“……기억 정지.”
뚝.
카이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쏟아지던 비도, 내리치던 번개도 그대로 멈추었다.
“슬슬 시작해볼까.”
가볍게 목을 돌린 카이가 중얼거렸다.
‘로드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이것은 확실히 그가 기억하는 ‘최초’의 날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지.’
카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뒤로 가기.”
동시에 세상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현상들이 카이의 눈을 즐겁게 어지럽혔다.
땅으로 떨어지던 비가 위로 솟아나고, 내리치던 번개 또한 먹구름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멈추었다.
띠링!
[이 기억의 앞부분은 강력한 힘에 의해 잠금되어 있습니다.]
[기억의 앞부분을 보고 싶으시다면, 잠금을 해제해 주세요.]
카이의 눈앞으로 떠오른 기억의 썸네일이, 쇠사슬에 칭칭 감겼다.
‘강력한 힘이라…… 아마 천계의 신들이 걸어놓은 일종의 락(Lock)이겠지.’
반대로 말하면, 이 락을 해제하기만 하면 기억을 볼 수 있다.
드래곤 로드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1만 년 이전에 존재했던 그의 기억을.
카이는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었다.
“무형검.”
기억 속 세상에서, 카이의 몸은 어떠한 물리력도 행사할 수 없다.
허나 무형검은 애초에 형(形)이 없는 검술이다.
자유라는 신념으로 빚어낸,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자유분방한 검.
‘베어낸다.’
카이의 강력한 의지가 무형검에 실려 쇠사슬을 강타했다.
동시에 그의 머리가 강력하게 조여왔다.
“크으윽……!”
무형검은 그의 자유로운 의지가 빚어내는 검.
기본적으로는 노 코스트, 즉 사용시 마나나 신성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단지 사용만으로 그의 정신력을 갉아먹을 뿐.
‘별 거 아닌 사물이나 마법을 베어낼 땐 괜찮았는데…….’
이건 신들이 직접 잠가 놓은 드래곤 로드의 기억.
순간적이지만 카이의 정신이 붕 떴다.
마치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삑- 삐삑!
[플레이어의 뇌파 수치가 불안합니다.]
[이 상태가 지속될 시, 플레이어의 안전을 위해 강제로 접속을 종료합니다.]
[접속 종료까지 남은 시간, 29초.]
[28초.]
[27초.]
…….
카이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그의 시야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중이었으니까.
이에 그는 아예 눈을 질끈 감고, 더욱 집중해서 무형검의 날을 날카롭게 갈았다.
그러한 노력이 통한 걸까.
까드득, 기묘한 마찰음을 뱉어내던 쇠사슬들이 돌연 서걱!
시원한 소리와 함께 잘려 나갔다.
띠링!
[기억의 잠금이 해제되었습니다.]
[드래곤 로드의 시크릿 메모리. ‘프롤로그’를 해금하셨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스탯 포인트를 15개 획득했습니다.]
[플레이어의 뇌파 수치가 정상화되었습니다.]
[강제 접속 종료를 취소합니다.]
“허억, 허억…….”
바닥에 주저앉은 카이는 주변 공간이 뒤바뀌는 것을 감지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숲 속은, 태양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장소로 바뀌었다.
‘……잠깐만, 여긴?’
주변을 둘러보던 카이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그야 당연했다.
그곳은 그가 제 집 안방처럼 잦게 방문하던 장소.
“……이하의 죄질에 따라, 이오스 외 42인의 하위 신들을 중간계로 추방하겠느니라.”
천상의 정원이었으니까.
수백의 신들이 고개를 숙인 자리에서, 황금빛 단상 위에 서있던 헬릭이 딱딱하게 말했다.
“헬릭…… 님?”
그녀의 무감정한 표정과 차가운 눈빛은, 카이로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