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2
힐통령 422화
127. 1만 년 전(1)
“헬릭 님!”
카이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나 헬릭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일은 없었다.
‘아…… 맞다. 여기 로드의 기억 속이었지.’
이곳은 로드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허구의 공간.
카이는 원래라면 이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당연히 기억 속 인물들이 그를 알아차리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저게…… 1만 년 전의 헬릭 님?’
다소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힌 카이가 다시 한 번 헬릭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달라.’
자신이 알던 그녀와 다르다.
우선은 키와 몸집이 더 작았다.
대충 현재의 헬릭보다 2~3살 정도 어려보이는 모습.
‘그래도 귀여운 건 여전하시네.’
헌데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무감정한 표정이 그 귀여운 매력을 다 죽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미즈가 그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천 년 전의 헬릭은 굉장히 성숙했고, 일도 잘했다고.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누구 얘기냐고 반문했지만, 지금은 왠지 알 것 같았다.
‘하물며 이건 천 년 전이 아닌 만 년 전이니까…….’
카이는 알 듯 말듯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사진을 스크린샷으로 찍었다.
나중에 현실로 돌아가면, 그녀에게 보여주며 두고두고 놀릴 생각이었다.
띠링!
[드래곤 로드의 시크릿 메모리, ‘프롤로그 1-2’가 재생되었습니다.]
“음, 프롤로그 1-2라.”
그 말은 즉 이 앞에 하나의 영상, 1-1이 더 있다는 소리다.
‘우선은 이 기억부터 보고 갈까.’
카이는 수백의 신들이 좌우로 서있는 넓은 정원을 지나, 헬릭에게 다가갔다.
가는 길에 종종 낯이 익은 신들의 모습도 보였다.
‘힘의 신 가우스, 재회의 신 히사시부리, 천공의 신 이스카도 있네. 아, 로비는 이때부터 어른의 모습이었잖아?’
반가운 모습들을 지나쳐 헬릭에게 다가간 카이는 그녀의 볼을 잡아당기려했다.
후웅, 후웅.
하지만 카이의 손은 마치 홀로그램을 지나가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통과했다.
쯧, 카이가 가볍게 혀를 찼다.
‘아쉽다. 1만 년 전의 헬릭 님 볼을 잡아당길 수 없다니.’
그 순간, 헬릭이 코를 살짝 찡그리더니 카이를 휙 쳐다봤다.
“……!”
깜짝 놀란 카이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누군가가 그의 몸을 통과하며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카이의 두 귀를 간지럽혔다.
남녀노소 누가 들어도 좋아할 만한 남성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나를 본 것이 아니었구나.’
카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눈앞에 위치한 남자의 등을 쳐다보았다.
흑발, 흑의.
그는 피부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흑색으로 뒤덮여져 있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헬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그 단어를 듣는 것과 동시에 카이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오라버니라면…….’
눈앞에 위치한 흑의인의 정체가 뮬딘이라는 소리였다.
저벅, 저벅.
걸음을 옮겨 뮬딘의 앞으로 걸어간 카이가 그를 노려보았다.
“…….”
뮬딘은 굉장히 잘생긴 청년이었다.
어둠과 파괴를 관장하는 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선한 인상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특히 헬릭을 바라보는 그는 웃는 낯이었는데, 반달처럼 곱게 휘어진 눈매가 특징이었다.
“이 녀석이…… 뮬딘이라고?”
그를 쳐다보는 카이의 심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인상만 보면 누가 봐도 착할 것 같은 이 녀석이, 헬릭을 울린 녀석이었고.
지금은 헬릭을 죽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아 붓는 녀석이었으니까.
주변을 돌아보던 뮬딘의 시선은, 앞에 무릎이 꿇린 채 포박되어 있는 43인의 신들에게 향했다.
“조금 늦게 온 감이 없잖아 있구나. 판결은 내렸니?”
“네. 주신께서 천계와 중간계, 마계를 나누신 데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는 바. 그 규율을 어지럽힌다는 건 곧 천계의 율법 그 자체에 대한 도전입니다. 오라버니의 조언에 따라 중간계로 추방하기로 정했습니다.”
“역시 태양신. 천계의 NO.1 다운 일 처리구나.”
“별 말씀을요.”
헬릭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이 기억 속에서, 헬릭이 처음으로 지어보이는 미소였다.
‘뮬딘에게만 미소를 보여준다라…….’
그만큼 의지하고, 따랐다는 소리일 터.
그 대상에게 배신을 당했을 헬릭을 생각하니, 다시 한 번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한 조정을 좀 해야 할 것 같구나.”
“조정이라니요?”
“이들을 그냥 중간계로 추방시킨다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그건…….”
헬릭이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뮬딘이 선수를 쳤다.
“이들의 기억을 모두 지우도록 하자.”
“……!”
“……!”
그의 돌발 선언에, 수백의 신들이 깜짝 놀랐다.
헬릭 또한 살짝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신들의 기억을 지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시나요.”
“신념의 삭제.”
뮬딘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히려 잘된 것 아니더냐. 이들은 천계의 규율을 어지럽혔고, 어차피 이제 중간계로 추방당할 몸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신념이 왜 필요하지? 인간 세상에서 신이 보낸 사자 놀이라도 하라고 보내는 것이 아니잖느냐.”
그는 헬릭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모인 수백의 신들을 쳐다보면서 말을 뱉어내는 중이었다.
마치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는 것처럼.
“다시 한 번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이것은 형벌이다. 당연히 이들은 고통스러워야하지. 신에게 있어 신념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 어떤 아픔보다 지독할 터.”
“……누누이 말하지만, 오라버니는 일을 해결할 때의 방법이 항상 폭력적이시네요.”
“그야 난 파괴와 어둠의 신이니까.”
뮬딘이 자조적인 목소리로 가볍게 코웃음 쳤다.
가늘게 뜬 그의 눈동자가 일순 차갑게 빛났지만, 이를 목격한 것은 카이밖에 없었다.
“아무튼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주장하겠다.”
척, 뮬딘의 손가락이 무릎 꿇은 43인의 신들을 향했다.
“첫 번째. 이오스 외 42인의 신들을 중간계로 추방할 것.”
거기까지는 헬릭의 판결과 똑같았다.
하나 이어지는 추가 사항에 신들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더 이상 신이 아닌 이들에게 신체(神體)를 쥐어줄 수는 없는 노릇. 그들을 아예 새로운 종으로 만들어 내려보낸다. 각 개체의 수명은 대략 1만 년 정도까지.”
“세 번째. 그들의 모든 기억을 소멸시킨다. 단, 그들이 신이었을 때의 기억을 앗아갔으니, 이후의 기억 정도는 풍족하게 만들어줘야 균형이 맞겠지. 그들은 일생의 자그마한 조각조차 망각하지 못하는 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건 너무 지독한 형벌이에요.”
이야기를 듣던 헬릭이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마디로 지금 뮬딘은, 저들을 단순히 추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만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고통을 주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나 헬릭의 조심스러운 반대에도 불구하고 뮬딘은 당당했다.
그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보이는 헬릭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인자하게 타일렀다.
“헬릭. 이건 감정의 문제로 해결할 일이 아니란다. 너도 알잖니. 천계의 율법은 거역한 것은 단순히 취급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이 오라버니를 믿어줬으면 좋겠구나.”
뮬딘이 부탁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헬릭을 빤히 쳐다보았다.
“…….”
잠시 침묵을 지키던 헬릭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릎이 꿇려진 채 온몸, 심지어는 입의 자유까지 구속당한 신들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로드인가.’
가장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신의 이목구비가 로드와 닮아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악어의 눈물인지, 진실된 눈물인지 알 길은 없었다.
다만 헬릭은 그 눈빛을 계속 마주할 자신이 없었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좋아요. 대신 그 일을 스스로 진행할 자신이 없어요.”
“걱정하지 말거라. 너는 용기를 내서 힘든 판결을 내려주었다. 이후의 일은 모두 내가 진행하도록 하마.”
뮬딘이 헬릭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것을 끝으로 주변 공간이 흐릿해졌다.
띠링!
[프롤로그 1-2가 종료되었습니다.]
[프롤로그 1-1을 재생하시겠습니까?]
“흐음.”
카이가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그는 이 기억을 통해 자신이 얻은 정보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헬릭은 처음부터 하위 신들을 드래곤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어.’
그건 전적으로 뮬딘의 머리에서 나온 기획이다.
의문점은 여기서 발생한다.
‘도대체 왜?’
그가 무엇을 위해 헬릭을 설득하면서까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천계의 규율을 바로잡기 위해서?
“개소리지.”
우스울 따름이다.
천계의 최상급 신인 헬릭을 죽이네 살리네 하는 녀석이, 율법을 어긴다고 저리 방방 날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수상해.’
냄새가 난다. 뭔가 좀 구질구질한 냄새가.
‘그리고 이 냄새에 대한 해답은…….’
프롤로그 1-1에 있을 것이다.
***
[드래곤 로드의 시크릿 메모리, ‘프롤로그 1-1’가 재생되었습니다.]
‘여긴…… 천상의 정원인가?’
카이는 제법 많은 신들의 섬을 방문해봤다.
헬릭의 천상의 정원이야 뭐,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넓고, 쾌적하면서 깨끗하다.
말 그대로 천상에 위치한 정원처럼 느껴진다.
반면에 대지의 신 호른의 섬 같은 경우에는 대장간이 설치되어 있어 공방의 느낌이 강하다.
천공신 이스카의 경우에는 섬에 돌기둥들이 군데군데 세워져있고.
이렇듯, 신들의 정원에는 그들만의 특징이 어느 정도 베여 있다.
‘그런데 이곳은…….’
항상 오던 천상의 정원과 구조가 똑같다.
하나 분위기가 다르다.
‘식물들이 전부 죽어 있어.’
게다가 백색 대리석이 상징인 천상의 정원과는 달리, 칙칙한 흑색 돌이 섬을 장식하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카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두 명의 남자가 위치해 있었다.
‘뮬딘이구나.’
카이는 그 순간 직감했다.
이 섬의 주인은 뮬딘이라고.
섬 전체에 드리워진 죽음과 어둠의 기운은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예,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뭐가 그리 급한가. 우선 앉지.”
뮬딘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반대편 자리를 남자에게 권했다.
‘드래곤 로드…… 아니, 천계에선 이오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신이지.’
카이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오스. 그대의 신념이 분명 통찰이었지?”
“예, 그렇습니다.”
통찰의 신 이오스.
그것이 로드가 천계에 머무를 때 가졌던 이명이었다.
“오늘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서 그대를 불렀네.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야.”
뮬딘이 돌연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통찰력으로 볼 땐, 나의 섬이 어때 보이는가.”
“…….”
이오스는 말을 아꼈다.
누가 봐도 볼품없는 그의 정원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감 없이 말해도 상관없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지.”
뮬딘이 재차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하자, 결국 이오스의 말문이 트였다.
“……우선 정원에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또?”
“음. 헬릭 님의 정원과 구조가 상당히…… 아니, 똑같군요. 심지어 배치된 식물의 종류들까지 동일합니다.”
“호오, 그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캐치해 낸 건가? 역시 듣던 대로 통찰력이 대단하군.”
“과찬이십니다.”
이오스가 옅게 웃었다.
비록 악신이기는 하지만, 최상급 신격을 지닌 뮬딘에게 좋게 보여서 나쁠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정원을 이리 꾸민 이유도 꿰뚫어 볼 수 있는가?”
“어…….”
이오스가 뮬딘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장난스럽게 웃고만 있었다.
“말했잖나. 오늘 자네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테니 걱정하지 말고 말하게.”
이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오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 공간의 배치도에서는 뮬딘 님의…… 헬릭 님에 대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어떠한 마음?”
“동생을 사랑하는 인자한 마음, 같은 신으로써 그녀를 인정하는 존경심, 그리고 동시에…….”
말을 이어가던 이오스의 안색이 돌연 딱딱하게 굳었다.
“왜 말을 하다가 마는가? 계속해 보게.”
뮬딘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이오스는 그와 같이 웃을 수가 없었다.
“이,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이오스가 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는 순간, 뮬딘이 먼저 선수를 쳤다.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뭘. 그냥 열등감이잖나. 질투심 때문에 친동생을 죽이고 싶어 하는 못난 살의이기도 하고.”
뮬딘의 얼굴은 맥이 탁 풀린 것처럼 흐트러졌지만, 반대로 그 공간의 긴장감은 콱 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