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23화 (423/441)

# 423

힐통령 423화

127. 1만 년 전(2)

바람조차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이오스는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

얼굴에서 쉴 새 없이 식은땀을 흘리던 이오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건 너무 과장된 해석입니다. 단순히…… 부러움을 느끼실 뿐이겠지요.”

“그게 아니라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팔짱을 낀 뮬딘은, 자신의 윗 입술을 아랫 입술 사이로 밀어넣었다.

“흐으음.”

그 상태로 심각하게 고민을 하던 뮬딘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역시 안 되겠다.”

“……예?”

“그대의 능력 있잖나. 통찰안.”

“예에…….”

“너무 위험해. 공간 하나 봤다고 대상의 마음까지 파악하다니, 차후 변수가 될 가능성이 커.”

“무, 무슨 말씀이시온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이오스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나, 미중유의 힘이 그의 전신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어느 틈에 뻗어나왔는지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나와 헬릭을 만든 이, 흔히 주신이라고 하지. 그 양반이 얼마 전에 세계를 개편한 거 알지?”

뮬딘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밸런스가 안 맞다고 멀쩡한 세상을 천계와 중간계, 마계로 나누었단 말이지. 그런 뒤에 지는 은퇴를 해버렸네? 심지어 정식 후계자를 공표하지도 않고 말이야.”

으드득.

뮬딘의 입 안에서 사나운 소리가 들렸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뭐,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아. 어차피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는 나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없어보였으니까. 차라리 헬릭과 경쟁해서 쟁취해 내는 게 더 편하지. 게다가 모든 세계가 하나였을 때는 가망이 안 보여서 반쯤 포기했는데…… 곰곰이 생각을 해봤거든. 세계가 나뉘어져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를.”

톡톡.

뮬딘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있더라고, 내가 헬릭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말이야.”

그는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축하한다. 그 계획의 첫 단추가 이오스, 너다. 너를 포함해 차후 내 계획에 방해가 될 만한 모든 신들을 중간계로 추방시킬 생각이거든.”

“마, 말도 안 되는……!”

이오스가 거칠게 소리쳤다.

하지만 뮬딘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자, 어둠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듣기만 해라. 본인이 왜 죽어야 하는지는 알고 가라고 설명해 주는 거니까.”

이오스를 조용히 시킨 뮬딘이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들의 기억을 모두 지운 채 새로운 종(種)으로 만들 생각이다. 성격은 오만하고, 흉포하지만 능력은 굉장히 출중하게 만들어주지.”

딱 거기까지만 이야기를 들은 이오스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그의 통찰안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뮬딘이 그리고 있는 그림의 형태가 어렴풋이 보였다.

“호오.”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뮬딘이 어깨를 들썩였다.

“역시 판단이 옳았군. 가만히 냅뒀으면 위험할 뻔했어.”

그 태평한 모습을 지켜보던 이오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한심하고, 이 상황이 원통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뮬딘은 이오스에게 질문했다.

“네 녀석의 통찰력이 극에 달해 미래를 예견하는 수준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나의 미래는 어떠한가?”

능글능글한 뮬딘의 목소리에 이오스는 눈을 꾹 감아버렸다.

자신을 포함한 43인의 신들이 ‘드래곤’이라는 이름으로 중간계로 추방되는 것.

그곳에서 폭력을 일삼는 자신들에게 헬릭과 신들은 서서이 간섭하기 시작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드래곤들은 천계의 신들과 사이가 틀어지게 되고.

그때 뮬딘이 손을 내밀게 된다.

중간계에서 가장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드래곤.

그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기 위해서.

‘아아, 주신이시여!’

이오스의 머릿속으로 명확한 이미지가 그려졌다.

태양을 상징화한 문양의 신전들이 드래곤의 브레스에 녹아내린다.

사제와 성기사들이 대항하지만, 비명을 지르며 죽어나간다.

드래곤의 지나간 자리에는 한 때 찬란했을 문명의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그저 폐허만이 존재할 뿐.

‘이 작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몇 년 후까지의 계산을 마쳤단 말인가.’

이오스의 몸이 한 차례 더 떨렸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두려움.

눈앞에 있는 뮬딘이라는 존재에게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통찰안이 없다. 예견에 특화된 능력도 없다.

오직 본인의 능력만으로 그 모든 것을 계산하고 판을 짠 것이었다.

이오스의 숨결이 가늘어졌다.

마치 뮬딘에게 숨소리를 들려주는 것조차 두렵다는 것처럼.

“하긴, 입을 막아놨으니 말을 못하겠군.”

뮬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세계가 세 개로 나뉘었지만, 마계는 신들의 힘이 닿지 않는 곳. 나로써도 어찌할 방도가 없지. 하지만.”

말을 잇는 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이미 모든 일의 결말이 정해진 것을 알고있는 사람처럼.

“중간계를 나의 땅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곳을 나의 신념으로 가득 채운다면, 내가 천계에서 다룰 수 있는 힘도 커질 터.”

그 힘으로 헬릭을 끝낸다.

“물론 억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덜 익은 열매가 아니라 달콤한 과실이니까. 중간계에 거주하는 이들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최대한 융성해졌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드래곤들을 움직일 것이다.”

뮬딘의 얼굴이 돌연 일그러졌다,

“나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아. 하나뿐인 가족을 지워낸다는 것. 가슴 아픈 일이지. 하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일 뿐. 나는 이 고통을 견뎌내고 천계를 손에 넣겠다.”

그렇게 말하는 뮬딘의 목소리는 정말로 슬프게 들렸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미친놈.”

제 욕심을 위해 가족을 희생하면서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추악한 자기 합리화나 다름이 없었다.

“음, 지금쯤 시간이 되었겠군.”

하늘을 바라보던 뮬딘이 중얼거렸다.

“조금 전, 중간계에선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을 거다. 그곳에선 다양한 신들의 신성력이 검출될 테고. 나는 그것을 빌미로 너희들을 ‘내 세계’에서 쫓아낼 것이다.”

이오스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그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지만 마지막 희망의 끈만은 놓지 않았다.

‘부디, 기억이 남아있기를…….’

현재진행중인 이 무서운 음모를 헬릭에게 알려야 한다.

이오스는 오직 그것만을 바라며 침묵했다.

동시에 영상 또한 끝을 고했다.

***

[시크릿 메모리, ‘프롤로그’가 종료되었습니다.]

“…….”

카이는 입을 꾹 다물고 이오스와 뮬딘의 대화를 생각했다.

어떤 의미로는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드래곤의 탄생 비화가…… 저런 거였다니.”

그것은 무려 1만 년 전부터 뮬딘이 손에 넣은 등 뒤의 비수였다.

‘이거, 진짜 무서운 새끼네.’

그저 오래 전부터 준비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존엄성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는 참혹함.

본인이 적으로 상정한 헬릭의 성격과 행동 패턴까지 손에 그린 것처럼 내다보는 비상함.

그 모든 것들을 쥐고있는 녀석이 바로 뮬딘이었다.

“잠깐, 그럼…… 이건 좀 위험하지 않아?”

카이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뮬딘이 말했던 중간계가 최대한 융성해졌을 때. 그 때는 아마 지금쯤 아닐까?’

물론 몇 년 정도의 오차는 있을 테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게임이니까.

‘그런 식으로 계속 이벤트를 열어줘야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렇다면 결국 유저들이 최대한 성장했을 때, 드래곤 일족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메인 시나리오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됐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자신도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현재 자신을 제외하고, 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은 기껏해야 세계 8대 길드.

그리고 그 밑의 언더독 길드 몇 개 뿐이니까.

‘이 부분은 기억 세계에서 나간 뒤, 이오스…… 아니. 로드와 상담을 해보면 되겠다.’

[기억 속 세계에서 퇴장하시겠습니까?]

“어.”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야가 바뀌었다.

남색의 어둡던 공간에서, 제법 깔끔한 동굴 속으로.

부르르르.

카이의 손은 여전히 로드의 이마에 올려져있는 상태였다.

로드는 두 눈을 부릅 뜬 채,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뭐지? 로엔 때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언가가 잘못된 것일까?

덜컥 겁이 난 카이가 입을 열려는 찰나.

주르륵.

로드의 주름진 뺨을 타고 두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로드?”

카이의 부름에도 로드는 대꾸조차 않았다.

“끅…… 끄읍…….”

그저 숨을 삼키며 눈물만 뚝뚝 흘려댔다.

그 와중에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치 지금 눈을 감으면,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아. 설마?’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카이가 가볍게 탄성을 뱉어냈다.

‘그러고보니 내가 기억의 잠금 장치를 풀었었지.’

한마디로 기억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을, 자신이 추가시킨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로드 또한 자신이 보았던 시크릿 메모리.

프롤로그 시리즈를 ‘기억’해 냈다는 뜻.

카이는 말 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토닥토닥.

힘들고 지친 사람, 서러움을 느끼는 사람에게 있어선 백 마디의 근사한 말보다.

그 투박한 손길 한 번이 더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

동시에 카이의 손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햇살의 따스함이 발동한 결과였다.

“…….”

그 상태는 제법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크흐읍, 로드가 묵직한 침을 삼키면서 분위기가 해소되었다.

고개를 든 로드와 눈을 마주친 카이는 깜짝 놀랐다.

‘눈빛이…….’

이전의 눈빛도 세월이 담겨있는, 현자의 그것이었다.

물의 현자 타르달의 눈빛보다도 훨씬 깊어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격’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나의 신상 정보가 털리는 것 같은 기분…….’

잠시 카이를 쳐다보던 드래곤 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네. 그리고…… 고맙네.”

두 번째 고맙다는 말을 꺼낼 때, 그의 시선은 제 어깨 위에 올려진 카이의 손을 향해 있었다.

그제야 손을 내린 카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닙니다. 그저 가벼운 위로였는데요, 뭘.”

“가볍다, 무겁다라는 감정은 주는 사람이 아닌 받는 사람이 하는 법. 자네의 손길에 담긴 감정은 무거웠네.”

로드는 감사하다는 말을 참 거창하게도 하는 능력이 있었다.

“나이 먹고 못난 꼴을 보여줬군. 부끄럽네.”

“나이 먹는다고 감정을 못 느끼는 기계가 되는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군…….”

로드가 피식 웃었다.

“그동안 참 많이 생각해 왔고, 궁금해했네. 나와 일족은 왜 드래곤이 된 것일까…… 라고 말이네.”

그는 눈을 감았다.

통찰의 힘이 깃든 눈동자가 눈꺼풀에 뒤덮이자, 그의 겉모습은 평범한 촌부에 불과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봤던 청년 시절의 카리스마도.

천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보여줬던 이오스 시절의 지적인 면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네.”

“……지금 로드가 느끼는 심정은 제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없을 거네. 그리 확신해. 1만 년…… 무려 1만 년이네. 그건 신에게도 그리 짧지 않은 세월이야.”

그런 세월을 내다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본인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탐욕 때문에.

“나와 일족은 뮬딘에게 우리들의 1만 년을 도둑 맞았네.”

“도둑 맞았다라…… 적절한 표현이군요.”

이에 깊이 공감한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 일을 묵과할 수는 없어. 복수를 하고 싶네.”

로드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이전에 없던 형형한 눈빛, 그 사이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분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를 대신해서, 나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진 일족을 대신하여 복수를 해주게.”

“물론 저도 뮬딘을 처치하고 싶어 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할 거야. 자네는 인간이고, 그는 천계의 수좌를 다투는 신이니까.”

그러니까, 로드가 말을 이어나갔다.

“하나…… 내가 자네에게 나의, 통찰의 신 이오스의 ‘신격’을 넘긴다면 어떨 것 같나.”

로드의, 아니.

이오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카이의 숨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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