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24화 (424/441)

# 424

힐통령 424화

128. 룰 브레이커(1)

카이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쿵쿵 뛰는 마음을 가라앉혔고,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목을 가다듬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오스 님의 신격을 저에게 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이오스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이에 카이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에 앞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얼마든지 하게.”

“현재 이오스 님은 드래곤이십니다. 신격을…… 강탈당하신 상황 아닌가요?”

“으음.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 것 같군.”

이오스의 입에서 묵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 인간들의 세상에는 명문 귀족가(家)마다 족보라는 것을 관리하지 않는가.”

“관리하죠.”

족보는 한 가문의 계통과 혈연관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정리한 책자다.

어떠한 인간이 이 가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니다를 확실하게 정리해 주는 편리한 책.

때문에 귀족 가문의 족보는 어떠한 보물보다도 훨씬 더 값어치가 있으며, 몰락한 귀족들의 족보를 사기 위해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는 상인들조차 있을 정도다.

“몰락한 귀족 가문조차 족보를 지니고 있네. 그리고 그 족보는 엄청난 가치를 띄고 있지.”

“귀족 가문이었던 곳의 자손이다. 이것은 확실히 이 세계에서는 큰 메리트죠.”

“신격도 마찬가지일세. 비록 나는 더 이상 신성력을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신념과 신격을 건네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네. 아이가 태어나면 족보에 그 아이의 이름을 기입하듯, 나도 자네를 후계자로 삼으면 되는 것뿐이니까.”

“……신격을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고요?”

카이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묻자, 이오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게 전부는 아니라네.”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음. 자네도 알란가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는 ‘두 개’라는 개념은 희미하다네. 해도 하나, 달도 하나. 아침과 낮, 밤도 제각각 하나뿐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오스가 쉽게 설명해 줬다.

“자네를 나의 후계로 지정한 뒤, 내가 자연 소멸해야만 신격이 계승되네.”

“……!”

한 마디로 목숨을 제물로 바쳐 자신에게 신격을 넘겨주겠다는 소리였다.

이에 카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말씀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너무 슬프게 듣지는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네.”

이오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자신의 두 손을 향했다.

“카이여.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들의 숫자가 몇인 줄 아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신들의 연회 때 70명이 넘는 신들을 보긴 했지만, 그들이 천계의 모든 거주민은 아니라고 했다.

“333명.”

이오스가 말했다.

“주신께서는 태초에 빛과 어둠의 신을 만들고. 그 뒤로 331명의 신들을 만들어 각자의 역할을 부여해주셨다.”

“음. 333명이라…… 어라, 하지만…….”

카이의 시선이 이오스를 향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이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와 함께 추방된 42명 신을 제외한다면 290명이겠지. 허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네.”

“더 있다는 소리인가요?”

“그 반대지.”

그 반대라면?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의 수가…… 그것보다 더 적다는 소리인가요?”

“맞네.”

이오스는 마치 손자, 손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계는 시간이 갈수록 ‘완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일세. 애초에 주신께서 신을 만든 이유도, 이 세계에 ‘관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네. 세계를 안정화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의 역할은. 세계가 완성될수록 옅어질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태양교의 성세가 너무 강대합니다만…….”

“그래. 오직 태양교의 성세‘만’ 강력하지.”

“……!”

카이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신전의 종류가 과연 몇 개나 될 것이라 생각하나.”

“어…… 40…… 아니, 50개 정도……?”

카이가 자신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21개라네.”

21명의 신.

그것이 현재 이 땅의 인간과 아인종, 몬스터들이 믿는 모든 신들의 숫자였다.

“나는 1만 년 전부터 이 사실을 꿰뚫어봤네. 그때는 신전이 없었지만 중간계의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의 신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네. 비를 숭상하는 부족이 있었고, 번개를 숭상하는 부족이 있었네. 바람을 믿는 자들이 있었으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을 모시는 이들도 있었지.”

“애니미즘…….”

확실히 지구에서도 그랬다.

예전에는 온갖 다양한 대상을 숭배하였으나, 현재 남은 종교는 몇 되지 않는다.

“아마 최종적으로 이 땅에 남는 신전은 기껏해야 두세 개 정도일 걸세.”

이오스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그 또한 주신의 뜻이겠지. 그러니 난 나의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

말을 잇던 그가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정정하지. 뮬딘. 그 녀석에게 복수를 하는 것. 그것만이 나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미련일세.”

“복수는 직접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로서는…… 불가능하다네.”

이오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나의 전생이라고 해봤자 하위 신에 불과하지 않나. 최상급 신인 뮬딘을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네. 애초에 드래곤이 된 지금, 천계로의 복귀는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고.”

“이오스 님조차 못한 일입니다. 저의 어떤 부분을 보고 신격을 주신다고 하시는 겁니까?”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이오스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스스로는 모르는건가? 그대가 지닌 힘은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초월하기 직전이라네. 제대로 된 격만 갖춰진다면…… 뮬딘과의 승부도 충분히 해볼 만하겠지.”

“종을…… 초월하기 직전이요?”

“그토록 강대한 힘을 지닌 자네가, 비록 하위 신격이긴 하지만 나의 신격을 손에 넣는다면. 뮬딘을 상대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것 아니겠나.”

결국 이오스의 신격을 얻는다고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라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오스 님의 신격을 얻는다고 해도, 뮬딘에게 제 힘이 통할 거라는 확신은 없으신거죠?”

카이의 제법 묵직한 질문에 이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그렇다네. 허나 가능성 자체가 올라가는 것은 분명한 일일 것이야.”

그야 그럴 것이다.

인간과 최상급 신의 격 차이보다는, 하급 신과 최상급 신의 격 차이가 더 좁겠지.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되는 걸까.’

이미 이오스는 뮬딘에게 한 번 패배를 해보았다.

그것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굴욕적인 패배였다.

‘진정한 격의 차이였지.’

자신이 하위 신격을 손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과연 뮬딘에게 대항할 수 있을까?

그 부분에 대해서 회의적이던 카이는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다.

“저는 현재 태양교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오스 님의 신격을 이어받는다면, 그 부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음. 안타깝지만 태양교와의 연결고리는 사라지게 될 걸세.”

답변을 들은 카이는 입을 꾹 다물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오스도 그런 그를 재촉하지 않고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카이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신격에 대한 건은, 없었던 일로 해주시지요.”

“……!”

이오스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이건 무려 신격을 건네받는 일이라네. 무려 천계의 거주민이 될 수 있다는 소리지. 아, 물론 자네는 모험가라서 통찰의 힘을 사용할 수는 없겠지만…….”

통찰의 힘은 즉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눈이다.

‘NPC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유저는 사용 할 수 없는 힘이지.’

이곳은 게임이다.

유저가 아무리 진귀한 능력을 손에 얻는다고 해도, 타인의 속마음을 읽어내거나.

무언가를 보고 이전에는 알 수 없던 사실을 꿰뚫어보는 것은 힘들었다.

‘차라리 힘의 신, 지식의 신의 신격을 잇는다면 스탯이라도 크게 상승하겠지만.’

그것이 아닌 점이 안타까울 따름.

“표정을 보니 결심은 확고한 것 같군…….”

살짝 섭섭한 목소리를 뱉어낸 이오스가 질문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뮬딘에게 복수를 할 셈인가? 인간의 격으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텐데.”

“사실 그 부분 때문에 이오스 님을 찾아뵌 겁니다.”

“나를?”

“예. 드래곤이 천계에서 추방당한 존재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그 부분이 궁금했습니다.”

“오호라…… 뮬딘의 방법을 역으로 이용하겠다라?”

이오스가 제법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예, 기억하십니까?”

“물론이네. 당하고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했었으니까.”

우우우웅!

동시에 대기에 엄청난 양의 마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오스가 작정하고 자신의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이 드래곤 로드의 힘……!’

앙골모아보다는 못하지만, 일반적인 유저 입장에서는 재앙이나 다름 없을 압도적인 힘.

카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봤지만, 딱히 위협을 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것이네. 나와 일족들이 천계에서 떨어진 이유.”

“이것이라니…… 이건 그냥 마나…… 아?!”

카이가 입을 쩍 벌린 채 이오스를 쳐다봤다.

그의 두 눈에는 경악만이 담겨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한 줄의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신성력은 홀로 오롯이 존재하는 숭고한 기운이다. 신성력은 해당 관리자의 신념 그 자체. 어떠한 경우에도 변질되어서는 아니되며…….]

[반대로 말해서 신념이 변질된다는 소리는, 신성…… 성질…….]

그것은 잘려있던 파피루스의 문구.

하지만 어째서인지, 퍼즐이 딱딱 들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아무리 뮬딘이라도 타인이 품은 신념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겠지.’

허나 이 세계에서 신념 = 신성력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그 말은 즉.

‘신념을 바꿀 수는 없어도…….’

우우웅.

카이의 시선이 눈앞에서 공명하는 마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신성력을 오염시킬 수는 있겠지.’

천계의 신들이 지위를 잃고 떨어진 이유.

“……신성력만이 존재해야 할 체내에 마나가 주입되었기 때문이군요.”

“맞네. 몸 속에 마나가 파고드는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변질된 기분을 맛봐야 했지.”

“애도를 표합니다.”

카이가 진심을 담아 위로를 건넸다.

이오스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됐네. 그나저나 어떤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 같나?”

“예. 가능할 것 같습니다.”

“호오.”

카이가 확신을 내비추자 이오스가 이채를 드러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자네를 잠깐 관찰해도 되겠나.”

“기꺼이.”

허락이 떨어지자 이오스가 카이를 우묵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그가 탄성을 뱉어냈다.

“과연!”

“어땠나요. 제 미래는?”

“이건 가능하다. 확실히 가능해! 하지만 그 뒤가 문제로군.”

“그 뒤라뇨?”

카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뮬딘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미래가 보이질 않아.”

“이오스 님처럼 신위를 박탈당하고 천계에서 추방되지 않을까요?”

“그를 나와 같은 선상으로 보면 곤란하다네.”

이오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최상급 신. 경우에 따라서는 천계의 율법 자체를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지. 어쩌면…… 체내에 다른 기운이 들어오더라도 버틸지도 몰라.”

“으음. 그건 곤란한데요.”

“하지만 그리 걱정하지는 말게.”

이오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카이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허허 웃으며 한마디만 남겼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미래가 뒤틀릴까 봐 차마 말을 하지는 못하겠군. 하지만 정말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잘해낼 걸세.”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향한 이오스의 신뢰도가 부쩍 상승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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