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27화 (427/441)

# 427

힐통령 427화

129. 초월자(1)

“…….”

거대한 스크린을 보고 있던 마르코 사장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어둡던 회의실의 조명이 다시 켜졌고, 가벼운 한숨 소리가 회의장을 채웠다.

“초월자라…… 짐 박사, 저런 시스템이 원래 우리 게임에 있었나?”

“…….”

짐 박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초월자? 스탯이 5천을 넘으면 격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라무스의 개발자인 그조차 모르던 설정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게. 지금 미칠 것 같으니까.”

결국 품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낸 마르코는, 회의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입에 시가 하나를 머금었다.

마르코가 시가 끝에 불을 지필 때쯤, 말을 아끼고 있던 짐 박사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라무스가 자체적으로 만든 설정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왜 최고 개발자인 박사조차 모르는 설정을 라무스가 만들었냐 묻는 거네, 지금.”

“그야 미드 온라인은 저희가 만들었지만, 저희가 ‘완성’시킨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짐 박사의 말에 할 말이 사라진 마르코는 시가만 뻑뻑 피워댔다.

그야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짐 박사의 말이 맞았으니까.

심지어 회의실에 자리해있던 페가수스 사의 중역들조차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장님, 요즘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세계가 여섯 개의 대륙과 일곱 개의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기존의 5대양 6대주에서, 미드 온라인의 세계를 포함한 6대양 7대주.

세상에는 그런 말이 나돌고 있었다.

그만큼 미드 온라인이 현대 사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영향력도 크다는 소리였다.

“그 넓은 세계에서 일어날 갖가지 모험과 퀘스트 전부를 사람이 짜 넣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후우…….”

마르코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담배 연기도 함께였다.

“알고 있네. 그래서 슈퍼 A.I인 라무스에게 세계관을 짜는 일을 맡겼었지.”

“예. 기본적인 역사와 틀은 저희가 디자인하되, 그 안의 세세한 부분은 라무스에게 일임했습니다. 게임의 큰 줄기는 저희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겠지만, 그 사이사이에 돋아난 잔가지는 하나부터 열까지 라무스가 채워 넣었죠.”

미드 온라인에서는 하루에만 수백만 개의 퀘스트가 새롭게 갱신된다.

마을 청년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편지를 전달해주기를 부탁하는 소소한 퀘스트부터.

도시에서 오크 부락을 토벌할 모험가를 구하는 퀘스트.

강력한 몬스터를 잡아주기를 원하는 퀘스트까지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하루에 수백만 개의 퀘스트를 사람의 머리로 쥐어짜낼 수는 없는 법이다.

“미드 온라인은 이미 또 하나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저희가 게임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게임의 기본적인 통제권은 페가수스 사에서 쥐고 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 이제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다.

기호지세, 즉 역사와 같은 큰 줄기를 함부로 비틀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역사를 바꾼다는 것은 대륙에 존재하는 수억 NPC들의 기억을 바꾸는 일.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고, 그 과정에서 버그라도 발생하면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흐음. 한 마디로 이것 또한 필요한 설정이었다. 이 말인가?”

“예.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유저들을 위한 설정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어느 유저가 감히 스탯을 5천 이상, 6천 이상이나 쌓을 수 있겠는가.

“그건 우리가 당초 기획하고 있던 30년 서비스 계획의…… 후반에나 될까말까 한 수준이니까.”

“맞습니다. 그러니까 즉…….”

말을 멈춘 짐 박사의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계적인 회사의 사장과, 천재 과학자를 눈앞에 두고도 제 할 말을 다하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당찬 청년.

“카이, 아니. 미스터 한이 비정상적인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이미 페가수스 사에서는 카이라는 존재를 재단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의 게임 플레이는 24시간 교대로 모니터링되는 중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비서가 가져다 준 재떨이 위에 시가를 올려놓은 마르코가 두 손을 모았다.

“기도나 하지.”

“……?”

회사의 중역들이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자, 눈을 감고 있던 마르코가 버럭 소리쳤다.

“아, 뭣들 하고 있어! 미스터 한이 제발 더 이상 콘텐츠를 소모하지 않도록 다들 기도나 하게!”

일명 기도 메타.

그것이 페가수스 사에 모인 세기의 천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 방안이었다.

***

“일시적이라.”

일시적으로 부여된 초월자의 격이 유지되는 것은 버프 스킬이 걸려 있을 때.

즉, 신성 폭주와 블레스가 걸려 있을 때뿐이었다.

‘이건 위험해.’

카이는 레벨을 올려야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뮬딘 교는 다양한 저주로도 유명한 곳. 당연히 뮬딘 또한 그렇겠지.’

그렇다면 천에 하나, 만에 하나의 경우까지 생각해야 한다.

만약 뮬딘이 상대의 스탯을 떨어트리는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면?

‘남은 2주 동안 레벨을 최대한 많이 올려야 해. 레벨을 올려서 얻은 포인트는 모두 신성에 투자한다.’

결심이 서자 행동은 자연스레 빨라졌다.

카이가 연공실을 나서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성기사 두 명이 그에게 정중하게 목례했다.

“성혈단주님을 뵙습니다.”

“성혈단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올린 성기사들의 시선이 카이에게 향했을 때.

그들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뭐…… 뭐지?’

‘성혈단주님에게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위대하고 강대하던 기운은 전부 어디로……?’

‘아니, 지금은 위대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털썩.

성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에 깜짝 놀란 것은 오히려 카이였다.

“아니, 왜들 이러십니까?”

“죄,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는 잘…… 그저 존경심이 들어서 예를 갖추고 싶었을 뿐입니다.”

‘갑자기……?’

따지고 보면 바뀐 것이 없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연공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는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그러고보니.’

스페셜 칭호!

그 존재를 기억해낸 카이가 재빨리 칭호 도감을 펼쳤다.

[초월자]

등급 : 스페셜

내용 :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에게 주는 칭호.

효과 : 초월자의 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 어떠한 현상에도 구속되지 않는 초월의 힘을 얻게 됩니다.(이 효과는 칭호를 장착하지 않아도 적용됩니다.)

‘초월자의 격이라.’

저들에게 있어 현재 자신은 신이 보낸 성자.

딱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함부로 돌아다닐 수는 없겠어.’

카이는 사제복에 달려 있는 후두를 덮어쓰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앞날에 빛이 함께하기를.”

늘 인사말처럼 건네던 덕담인데도 불구하고, 두 성기사는 눈시울을 붉혔다.

“아아, 이토록 성스러운 축복은…… 태어나서 처음 받아봅니다.”

“성혈단주께서 신이 내린 사자라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감동에 겨워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카이는 곧장 아르칸 아카데미로 향했다.

초월자의 격을 얻었으니, 헬릭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면 헬릭 님이 어디에…….”

학원의 정원을 거닐면서 헬릭과 라샤를 찾아다니기를 잠시.

저 멀리서 알버트 교황이 사제와 성기사들을 이끈 채 헐레벌떡 달려왔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알버트는 카이의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카이가 빤히 쳐다보자, 알버트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엄청난 신성력의 유동을 느끼고 이리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신 귀인이신지……?”

“아…… 전 또 뭐라고.”

괜히 머쓱해진 카이가 후드를 넘겼다.

“접니다, 교황님.”

“……카이 님?”

“교황님을 뵙습니다.”

카이가 가볍게 목례를 건네자 사제와 성기사들이 탄성을 뱉어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한 쪽 무릎을 꿇어 극상의 예를 갖추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아무리 성혈단주를 향한 존경심이 생겨난다지만, 그들은 교황의 직속 호위대였으니까.

“잠깐 못 뵌 사이에…… 무언가가 크게 바뀌셨군요. 혹 깨달음이라도 얻으신 겁니까?”

“예. 운이 따랐습니다.”

카이가 겸손하게 말하자, 알버트가 감탄했다.

“카이님에게서 성자의 기운이 흘러나옵니다. 성경을 보면 초대 교황이신 시미즈 님께서는 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경심을 심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오늘 카이님을 보니 그 구절이 떠오릅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보다 잠시 둘이서 대화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알버트 교황이 눈빛으로 부탁을 하자, 눈치 빠른 사제와 성기사들이 멀찍이 떨어졌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저는 정말 깜짝 놀랐지 뭡니까.”

“정말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알버트의 신발을 쳐다보던 카이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예? 그게 무슨…… 이런!”

그제야 자신이 색이 다른 짝짝이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알버트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이건 신전에서 그, 급하게 나온다고 그만…….”

“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하하하.”

“정말 짓궂으십니다.”

알버트 교황은 그제야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혹 카이 님께서는 천계의 거주민인 천사가 되신 것입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카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제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는 저도 자세히 모릅니다. 그래서 헬릭 님을 뵙고 여쭤볼 생각에 이곳에 왔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헌데…….”

알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릭 님을 뵙는데 왜 이곳에 발걸음을 하셨는지……?”

‘아차.’

카이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알버트 교황은 헬릭과 헬리자베스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이런, 말실수를 했군요. 제 말은 이곳에 들렸다가 헬릭 님을 뵈러 천계에 방문할 생각이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나이가 들수록 말실수가 잦아지더군요. 오늘도 라샤와 헬리자베스를 보러 오신 겁니까?”

“네. 찾고 있었습니다만 안 보이네요. 혹시 두 사람이 오늘도 밭에 갔습니까?”

“아닙니다. 아까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쳤는데, 오늘은 도서관에 가는 것 같았습니다.”

“도서관이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깨달음을 얻으신 것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저도 카이 님이 남기신 발자국을 부지런히 따라가겠습니다.”

교황의 사람 좋은 미소를 뒤로한 카이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직 학기가 시작하기 전이라 그런지 도서관은 조용했다.

입구 부분에 사서가 한 명 있을 뿐이었고, 대륙 각지에서 공수한 희귀한 책들이 수만 권이나 비치된 넓은 도서관에는 단 두 명의 소녀만이 있었다.

소곤소곤.

아무도 없는 도서관이지만 입구에 ‘정숙’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기 때문일까.

헬릭과 라샤가 서로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아이, 진짜! 그 부분은 시험 범위에 안 나온다니까?”

“그걸 그대가 어떻게 아느냐?”

“교수님이 설명해 주셨잖아. 솔직히 말해. 너 수업 시간에 졸았지?”

“아, 아니거든…….”

“그런데 이걸 왜 기억 못 해? 바보야?”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보이니라.”

“생각해보니까 너 그 때 졸았어. 나 확실히 기억났어.”

“아, 아니라니깐…… 믿어다오…….”

일시적이지만 얻게 된 초월자의 감각 때문일까.

입구에서도 두 사람의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매우 선명하게 들렸다.

오늘도 사이가 좋은 두 사람에게 천천히 걸어가자.

헬릭과 라샤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 기운은…….”

“신!? 아…… 그건 아닌데.”

동시에 카이의 얼굴을 확인한 두 소녀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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