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8
힐통령 428화
129. 초월자(2)
카이를 바라보는 두 소녀의 눈에는 호기심과 신기함이 가득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라샤였다.
“축하드려요, 카이 님.”
“감사합니다.”
“신기하네요. 초월자를 직접 본 건 몇백…… 아니, 몇천 년 만이었더라?”
그녀가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헬릭이 소리쳤다.
“무, 무야!”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헬릭이 카이의 주변을 다람쥐처럼 몇 바퀴나 맴돌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이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대가 너무 바뀌어버려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헬릭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초월자가 되면 굳이 타인의 사도를 안 해도 되잖느냐.”
“그래도 계속할 건데요?”
카이가 아주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하자, 헬릭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쫑긋 움직였다.
고개를 휙 들어 올린 그녀의 눈동자가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반짝거렸다.
“저, 정말이느냐? 그대는 이제 인간으로 치부할 수 없는 존재인데도?”
“네.”
“종의 한계 때문에 신격을 획득하지는 못했다지만, 초월자의 격이라면 능히 천계의 거주민이 될 자격이 있느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대를 믿는 사람들을 거느릴 수도 있는…… 그런 존재가 되었는데도?”
“무슨 상관인가요. 내가 사도하겠다는데.”
왈칵!
카이의 의리 그득한 발언에 헬릭이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대여! 믿고 있었느니라!”
카이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헬릭이 매미처럼 울었다.
‘아니…… 안 믿었으니까 그렇게 시무룩하셨던 것 아닌가.’
어깨를 으쓱거린 카이는 헬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았다.
“사실 초월자의 격이라고 해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해요.”
“일시적? 무슨 뜻인가요?”
헬릭과는 달리 침착한 라샤의 질문에, 카이는 블레스 상태를 해제했다.
띠링!
[초월자의 격이 사라집니다.]
[신체 밸런스에 약간의 부조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신체 감각이 약간 무뎌집니다.]
신성 스탯이 6천 밑으로 떨어지자, 당연한 소리지만 초월자의 격이 사라졌다.
‘흠. 심지어 칭호까지?’
자신에게 주워졌던 스페셜 칭호, ‘초월자’마저 잠금 상태로 전환된 상태였다.
즉, 칭호를 잃어버린 건 아니지만 효과를 적용 받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아아……!”
백 번의 말보다는 한 번의 행동.
카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라샤가 탄성을 뱉어냈다.
“축복을 통해 일시적으로 신성을 끌어올리셨군요. 그렇게 초월자의 반열에 들어서신 거구요.”
“맞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반쪽짜리 초월자라고 봐야 맞겠지요.”
“반쪽이라…… 사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요.”
라샤가 배시시 웃으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뮬딘을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겠죠. 이런 상태로는 말입니다.”
뮬딘의 이름이 나오자 헬릭의 울음이 뚝 그쳤다.
카이의 다리를 미련 없이 놓아준 그녀는 조용히 의자에 앉더니,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녀석은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에 특화가 되어 있는 녀석이니라. 어쩌면 그대의 신성력을 감소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련을 떠날 생각이에요.”
“또 가느냐?!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떠나는 것이냐…….”
“2주입니다. 그 뒤에는…… 뮬딘과 어떻게든 담판을 지을 생각입니다.”
“2주…….”
입 안에서 몇 번이나 중얼거린 헬릭의 눈동자로 약간의 걱정이 떠올랐다.
“싸운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느냐? 위험할 텐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카이가 그녀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에 허둥지둥 당황한 헬릭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솔직히 뮬딘 녀석이 원하는 것은…… 결국 권력이니라. 나는 사실 권력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큰 욕심이 없느니라. 어느 정도 대화만 통한다면…… 그가 무차별적인 파괴만을 일삼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넘기는 선에서 평화롭게 끝낼 수도…….”
“하아…….”
카이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태까지 헬릭의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쉰 적 없던 종류의 한숨이었다.
‘짐 박사의 말이 맞네.’
헬릭은 절대로 뮬딘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말.
뜬금없지만 카이는 지금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너무 무르셔.’
무르다, 헬릭은 타인을 대하는 데에 있어 항상 여지를 남겨둔다.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기대감일지도 모른다.
대화를 통해 상황을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 그것도 상대가 상대일 때의 이야기지.’
뮬딘의 머릿속에 평화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
만약 그가 대화를 시도할 마음이 있었다면, 1만 년 전부터 헬릭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작 대화를 통해 헬릭을 구슬리고, 원하는 것을 넘겨받았겠지.
‘하지만 그의 욕심은 너무 크다.’
대화를 통해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가 아니다.
기껏해야 상대방이 ‘양보’를 해주는 것 정도를 넘겨받을 수 있을 터.
때문에 뮬딘은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정도로는 본인이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가 원하는 것은 All or Nothing.
전부 혹은 제로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번의 도박에 배팅한 녀석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대화? 평화라고?’
카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뮬딘은 절대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는 라샤 또한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헬릭을 힐긋힐긋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카이 님의 말이 맞아. 내가 생각하기에도 뮬딘은 절대 평화로운 방법을 택하지는 않을 거야.”
“……나의 기대가 너무 큰 것일까.”
“예. 기대도 상대를 보고 가져야 하는 겁니다. 뮬딘은 그런 종류의 기대를 받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인물이고요.”
“하지만……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그건 싫은데…….”
헬릭이 카이를 쳐다보고, 라샤를 쳐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땅에 존재하는 자신의 신도들과, 생명체들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다.
“그대의 계획은 결국 뮬딘을 중간계로 끌어내리는 것이잖느냐.”
“예. 천계에서는 싸움이 성립되질 않으니까요.”
“……이 땅에 수많은 피가 흐를 것이야.”
“감수해야죠.”
카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그걸 최대한 줄이는 것 또한 저의 의무입니다.”
“나는 그렇다쳐도, 그대는 정말 괜찮겠느냐. 뮬딘에게 패배한다는건, 여태까지 그대가 쌓아올린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만.”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인지.
카이는 피식 웃으며 헬릭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헬릭 님과 처음 만났을 때의 풋내기 아닙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많은 경험이 쌓였다.
“뮬딘이 원하는 것은 결국 천계의 일인자 자리. 나아가서는…… 주신의 후계자 자리일 겁니다.”
“응.”
“현재 천계의 일인자는 헬릭 님이시죠?”
“으응…….”
헬릭이 살짝 죄스러운 표정을 띄우며 대꾸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비해 하는 것이 없기에, 결국은 이런 사달이 난 것이라 믿고 있겠지.
“헬릭 님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참 이상해요. 가해자보다 피해자들이 더 끙끙거리며 제 잘못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더라고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가해자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고, 피해자는 고개를 숙이고 다닌다.
겉만 보면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 도저히 구분이 안 갈 지경이다.
“그러지 마세요. 항상 당당하게 고개 들고 다니세요.”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지혜로운 신이었다면…….”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예요. 그게 가능했다면 헬릭 님의 아버지인 주신이 진작 해결했겠죠.”
타인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
그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옆에서 아무리 생쇼를 해도, 생각과 마음가짐은 결국 본인 스스로 고쳐야 하는 것이니까.
“저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지도 마세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니까.”
헬릭을 미끼삼아 뮬딘을 끌어낸다.
그것이 카이의 작전이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헬릭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이기도 했다.
‘하나 어찌 보면 뮬딘에게도 이것은 마지막 기회일 거야.’
이미 그가 세워놓았던 대부분의 계획은 자신이 망가뜨렸다.
뮬딘은 중간계에 있는 자신의 세력.
뮬딘 교를 위협할 수 있는 이종족들의 멸망을 바랬다.
하나 결과적으로 카이는 그들을 모조리 살려냈다.
‘게다가 비장의 한 수였던 드래곤들까지 아군으로 회유시켰지.’
아마 뮬딘 입장에서도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답답할 것이다.
일만 년이나 기다려왔던 열매가, 떨어질 생각은커녕 익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등만 떠밀어주면 돼.’
조무래기들을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네가 직접 해결하라고.
헬릭을 이용해 메시지를 보내면 그 또한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겠지.’
이미 계획은 모두 세워두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겁니다.”
카이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아하. 그럼 또 수련을 하러 가셔야겠네요?”
“네, 그래서 당분간 게임에서는 못 만날 것 같아요.”
유하린과 사귀게 된 이후, 두 사람은 종종 현실에서도 밥을 먹었다.
단순히 집에서 밥을 해먹는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제법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이게 데이트…… 라는 거겠지.’
평생을 모태 솔로로 살아온 정우였지만 이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현실에서 보면 되니까요.”
유하린은 배려심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정우는 그것이 고마웠지만,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연애 초기에는 원래 데이트도 팍팍 다녀야 할 텐데…….’
게임의 일들이 바빠서 그녀에게 온전히 집중을 못 하고 있었으니까.
“일 다 끝나면 진짜 잘해야겠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을 얼버무린 정우가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그런데 수련을 가실 장소는 생각해 두셨어요? 레벨이 높으셔서 웬만한 장소에서는 사냥하기 힘드실 텐데…… 그렇다고 마계에 다시 가면, 또 한 달 동안 못 돌아올 수도 있잖아요.”
“네, 그래서 대신 생각해 둔 장소가 있어요.”
“어딘지 여쭤봐도 돼요?”
유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정우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
“혹시 암흑의 대지에 있던 뮬딘 교의 사원 기억하세요?”
“아, 저희가 마계에 가기 전에 들렸던 곳이요.”
“네. 거기가 뮬딘 교에서는 나름 중요한 거점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주변에 뮬딘 교도들도 그렇게 많았고, 사원도 규모가 제법 컸던 거겠죠.”
“음…… 하지만 지금은 적들이 얼마 없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제가 원하는 건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뮬딘 교 사제나 성기사들이 아니에요.”
그 정도 규모의 사원이라면, 반드시 관리자가 있을 것이다.
‘뮬딘 교의 본단. 그곳의 위치만 알아내면 돼.’
뮬딘 교는 철저히 음지에 숨어 있어서 그렇지, 단일 세력으로는 웬만한 국가의 전력도 상회한다.
‘당연히 본단에 거주하는 이들은 숫자도 많고, 레벨도 높을 거야.’
게다가 그곳에는 아트록 추기경이 있다.
‘그것들을 싹 다 지워 버리면, 뮬딘도 더 이상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수는 없을 거야.’
원래 개를 때리면, 그 주인이 나서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