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29화 (429/441)

# 429

힐통령 429화

130. 분리수거(1)

“그럼 다녀올게요.”

아르칸 아카데미에 위치한 도서관을 나선 카이가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두 명의 소녀가 보내오는 염려의 눈길에 괜스레 발이 무거워졌다.

“다치지 말거라.”

“위험하다 싶으면 허겁지겁 도망치세요.”

누누이 말했지만, 두 사람의 걱정은 때때로 좀 과하다.

허나 자신을 깔보려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카이는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 제가 도망치는 건 자신 있거든요.”

전투 시 타깃 1순위인 사제 출신이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카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두 소녀를 잠시 쳐다보더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시야가 바뀌었다.

이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신출귀몰의 운용.

“흐읍…… 하아.”

숲의 공기가 카이의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허나 대부분의 숲이 뿜어내는 이슬 젖은 냄새나, 새벽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여긴 정화되려면 아직 멀었나 보네.”

암흑 지대의 베이스캠프.

그곳에 카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웅성웅성.

베이스캠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야, 맞지?”

“맞아. 어떤 정신나간 녀석이 흉내낸 것이 아니라면.”

“갑자기 여긴 또 무슨 일이지? 여기서 사냥하면 레벨도 잘 안 오를 텐데.”

시선의 끝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카이가 위치해있었다.

이제는 그가 입고 있는 의상이 사제복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하나, 그가 사제라고 무시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을까?”

“무슨 트러블?”

“오늘 흑룡도 와있고, 리미트리스 애들도 와있지 않아? 물론 둘 다 카이에게는 덤빌 생각도 못하겠지만.”

“쉿.”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가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명성이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하나, 그들은 여전히 세계 8대 길드다.

소속된 세력이 크지 않은 일반 유저들이 안주 삼아 씹기에는 주변에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미쳤냐? 주변에 조약돌처럼 깔린 게 세계 길드 녀석들인데.”

“크, 크흠. 조심해야겠네.”

“조심하기에는 벌써 늦었고.”

옆에서 들려오는 껄렁한 목소리에 두 유저가 고개를 돌렸다.

푸석푸석한 금발의 머릿결을 자랑하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여인.

불량한 표정으로 껌을 씹던 리미트리스 길드의 마스터, 캐서린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히, 히익……!”

“그, 그게 아니라요.”

“다 들었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야, 너도 들었지?”

리미트리스 길드의 부마스터인 리로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도 안 된다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

“아니, 생각할수록 얼탱이 빠지네. 너네 나 알아?”

“아, 아뇨.”

캐서린은 그것만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괜히 한쪽 다리로 바닥을 쿵쿵 밟았다.

“니네 시바, 무도가 정신 모르냐? 결투장에서 이기고 지고의 결과는 그 뭐냐. 무도가의 페어플레이 정신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거든? 안 쪽팔리다고.”

“그…… 그렇군요.”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캐서린은 꼴 보기도 싫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알았으면 꺼져.”

“어어…….”

“여기 저희 자리…….”

“안 꺼져?”

캐서린이 눈을 부라리자, 일반 유저들이 저들의 짐을 챙겨 황급히 도망갔다.

“짜식들이 말이야.”

캐서린은 그제야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 쏙 앉았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리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비켜달라고 하시지, 굳이 이런 방법을 써야만 했습니까?”

“뭐래. 내가 쟤들한테 나 뒷담 까라고 시켰냐? 지들이 먼저 잘못한 거지.”

이러나저러나, 결국 만석이던 카페테라스의 목 좋은 자리를 얻게 된 캐서린이 콧김을 뿜어냈다.

“그런데 리로드, 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뭐가 말입니까.”

“그…… 뭐냐. 내가 덤빌 생각도 못할 것 같냐고. 카이한테.”

“거기에 관해서라면…….”

리로드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랫사람이라면 모쪼록 간언보다는 충언을 일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였지만.

캐서린은 꼭 충언을 할 때마다 노처녀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하지 못할 말이라면 그냥 입 다무는 게 나아.’

리로드가 모아이 석상처럼 입을 꾹 다물자, 캐서린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얘 좀 봐라? 너 나 무시해?”

“아뇨.”

“근데 왜 대답 안 해.”

“애초에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본인이 제일 잘 알거면서.”

“아씨…… 몰라. 너 앞으로 말 시키지 마라. 짜증나니까.”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린 캐서린은 베이스캠프를 그대로 걸어 나가는 카이를 쳐다보았다.

‘나쁜놈. 결투장 관리는 내가 다 하는데, 챔피언 매치에 도전도 못하게 하고…….’

스페셜 칭호인 챔피언.

모든 스킬 레벨을 하나씩 올려주는 그 꿀 같은 칭호를 빼앗긴 것은 여전히 아쉬웠다.

“길 가다가 돌 밟고 넘어져서 코나 깨져…… 히이잇!”

저주를 퍼붓는 순간, 고개를 휙 돌린 카이와 눈이 마주친 캐서린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황급히 테이블 위에 널부러져 있는 잡지를 세워 제 얼굴을 가렸다.

“야, 야. 혹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냐?”

“누가요.”

“누구긴! 카이지.”

“아뇨. 그냥 가던 길 가는데요.”

“그치? 그냥 우연이겠지?”

아무리 귀가 좋아도 이 거리에서 중얼거린 것을 들었을 리가 있나.

그런데도 쫄아서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니.

캐서린은 리로드의 눈가를 스치는 한심한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어어? 이 녀석…… 고용주한테 보내는 눈빛 보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세요. 평소에 늘 보내던 눈빛이니까.”

“……그래?”

“예.”

평소에도 한심하게 쳐다봤을 뿐이지만.

캐서린을 가볍게 설득시킨 리로드가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카이 말입니다. 뭔가 분위기가 좀 변한 것 같지 않습니까?”

“너도 그렇게 느껴?”

슬며시 잡지를 내려 눈을 빼꼼 내놓은 캐서린이 대꾸했다.

‘확실히 뭔가 변했어.’

이 먼 거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질 정도다.

‘뭐지? 뭐가 변한 거지……?’

단정지어서 말할 수는 없다.

허나, 하나는 알 것 같다.

‘절대로 덤벼선 안 돼.’

사실 결투장에서 그와 맞붙었을 때, 심지어 그에게 패배했을 때조차 캐서린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일대일로 졌으면 졌지, 그것 때문에 기죽을 위인은 아니거든.’

실제로 길을 가다가 카이랑 시비라도 붙으면, 자신의 패배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코뼈에 주먹을 날릴 정도의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안 나거든.”

캐서린은 위기를 눈앞에 뒀을 때, 심장이 오히려 차가워지는 타입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카이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예전에도 그를 대하는 것이 꺼려지기는 했다.

하나 그때는 이유가 있었다.

‘나한텐 지켜야 할 것이 많으니까.’

우선 리미트리스라는 길드.

그것이 있기에 혼자서 움직이는 카이에게 밉보이면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를 꺼려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선행되었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떠한 본능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와 함부로 엮이지 말라고.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예전엔 쳐다보면 목이 아픈 나무였는데, 지금은 쳐다보면 목이 달아나는 나무가 된 상태였다.

“…….”

다행스럽게도 캐서린은 자신의 감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를 십분 활용하는 타입이었다.

“야, 짐 싸.”

“……?”

갑작스러운 명령에 리로드가 눈만 끔뻑거렸다.

“갑자기 짐은 무슨 짐입니까. 애들이 다 준비해 놨을 텐데.”

“철수할 짐 싸라고.”

“예? 오늘 길드 단합 사냥하는 날 아닙니까. 암흑 지대에 위치한 던전에 대한 정보도 비싼 돈 주고 사셨으면서.”

“아, 그 놈 참 말 많아? 오늘 아니면 못해? 됐으니까 짐 싸라고.”

“밑에 애들도 다 모여 있습니다. 한가한 애들도 아니고, 수백 명이 스케줄을 비우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만…….”

“그냥 회식이나 가자.”

“오늘 아침만 해도 결투장에만 있으니 좀이 쑤신다고, 빨리 몬스터 패고 싶다고 하시던 분 아닙니까?”

“몸 찌뿌둥한 건 나중에 필라테스랑 요가로 풀면 돼.”

리로드는 묘하게 서두르는 캐서린을 빤히 쳐다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마스터가 원하신다면.”

말을 내뱉는 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카이에게 향했다.

이제는 작은 점이 되어 암흑 지대의 숲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저벅, 저벅.

카이는 암흑 지대의 어두운 숲 속을 홀로 걷고 있었다.

지난번엔 유하린이 함께였지만, 지금은 혼자다.

‘이곳에서 골리앗과 싸웠지.’

그 뿐인가, 스팅과도 싸웠다.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탓일까, 카이의 심장 박동이 묘하게 빨라졌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걷기를 잠시.

“음.”

뮬딘 교의 사원에 도착한 카이는 근처의 부쉬에 몸을 숨겼다.

사원의 주변에는 뮬딘 교의 교도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역시.”

이곳의 장소는 이미 자신과 유하린에게 발각되었다.

여태까지 뮬딘 교의 성격을 본다면, 꼬리가 밟힐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다시 사람을 보내 관리한다?’

행동이란 상대방의 생각이 드러나는 행위다.

카이는 이것으로 뮬딘 교 수뇌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곳을 버리지 못할 특별한 이유가 있구나.’

프스슥. 카이가 부쉬를 헤집으며 나타나자, 정적이 땅거미처럼 내려앉았다.

사원 주변을 분주히 돌아다니던 사제와 암흑 기사들이 뚝하니 멈춘 것이다.

흐읍, 흐으읍.

그들이 뱉어내는 숨소리만 가느다랗게 들려오는 숲 속에서.

스윽.

카이의 눈동자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굴러갔다.

동시에 공격이 이루어졌다.

서걱!

그 어떤 예비 동작조차 없이 상대방을 벨 수 있는 한없이 자유로운 검.

무형검.

가장 선두에 서있던 암흑 기사는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 피가 왜…… 어? 뜨거워? 왜……?”

털썩!

죽기 직전까지, 본인이 공격 당했다는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는 수준의 쾌검(快劍).

동료가 쓰러지자, 모두의 시선이 빠르게 카이를 향했다.

“흐음.”

카이는 그 순간까지도 뒷짐을 진 상태였기에, 적들의 생각이야 뻔했다.

“기, 기습……!”

“습격이다! 카이가 세력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훗.”

딱 예상한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는 적들이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적들은 척 보기에도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세력 따윈 없어. 그저 잠깐의 혼란이면 충분해.’

그리 길지 않아도 된다. 잠깐, 아주 잠깐이면 충분하니까.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카이는 그제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암흑 기사들은 최대한 녀석을 막아! 자료와 대사제님들의 대피를 우선시 한다!”

제법 직급이 높아 보이는 이단심판관이 철퇴를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 순간, 그의 옆에서 뜨거운 숨결이 불어왔다.

‘뜨거운 바람……? 여긴 숲 속, 그것도 암흑 지대의 숲인데?’

불안함을 느낀 이단심판관은 옆을 보지도 않은 채, 냅다 철퇴를 휘둘렀다.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정답이었다.

객관식 문제였다면, 동그라미를 받았을 정도로 정확한 해답.

“하지만…… 삶이라는 건 객관식 문제가 아니더라고.”

제 머리통보다 커다란 철퇴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든 카이가 중얼거렸다.

우드드득.

단순히 악력만으로 철퇴에 금이 갔고, 이내 수천 조각이 되어 깨져나갔다.

“옳은 선택지를 골라도 힘이 있냐, 없냐에 따라 결과가 바뀌더라고.”

카이는 이단심판관의 투구 너머로 비치는, 공포에 사로잡힌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게 뮬딘 교가 걸어왔던 길이잖아? 강력한 힘으로 약자를 핍박하는 거.”

우우웅!

허공에서 밝은 빛을 뿜어내며 생성된 성검이 그대로 이단심판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러니까…… 나도 한 번 해보려고, 그거.”

레벨 455의 이단심판관이 쓰러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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