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0
힐통령 430화
130. 분리수거(2)
털썩!
사원의 바깥을 지키고 있던 마지막 암흑 기사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흠.”
주변에는 이미 백이 가볍게 넘는 시체들이 쌓여 있는 상황.
적들을 실컷 유린한 뒤 돌아온 네 개의 창은 카이의 등 뒤를 조신하게 부유했다.
“……뭔가 좀 찜찜한데.”
여전히 음침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사원을 쳐다보던 카이가 중얼거렸다.
하나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크게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원 입구로 들어서자 초월자의 감각이 발휘되었다.
‘423명. 많기도 하네.’
사원 전체에 골고루 퍼뜨려져 있는 생명의 기운이 하나씩 느껴졌다.
“우선…… 아래쪽부터.”
카이는 사원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일전에 자신이 4중첩의 태양광자포로 지하까지 뚫어놓은 구멍이었다.
‘역시 지옥문이 목적이었나?’
뮬딘 교도들은 사슬로 감아놓은 지옥문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카이가 땅에 착지하기도 전에, 그를 따르던 네 개의 창이 먼저 출수했다.
쐐애애앵!
마치 머리맡으로 전투기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터지더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카이는 적들의 비명을 일일이 귀에 담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발을 움직여 지옥문 쪽으로 다가갔다.
“일단 파괴해 둘까.”
뮬딘 교가 마계로 통하는 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영 찜찜했으니까.
게다가 마르코 사장과 짐 박사에게 부탁도 받았던 참이었다.
그들은 마계가 일찍 공개되는 것을 꺼려하는 눈치였다.
‘이걸로 빚 하나는 달아놓는 셈이네.’
카이의 검지 끝에서 한 줄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르르르르릉!
지옥문은 물론이고, 뒤쪽의 기둥과 벽까지 완전히 소멸시킨 카이는 다시 구멍 위쪽을 쳐다봤다.
‘지난번에는 탐험할 시간이 없어서 곧장 이곳으로 왔었지.’
하지만 이 사원은 지하와 지상이 공존하는 형태의 건물이다.
그리고 초월자의 감각에 의하면, 지하보다는 지상에 위치한 생명의 숫자가 훨씬 많다.
‘아마 대사제라는 녀석도 위층에 있겠지.’
생각을 정리한 카이의 신형이 그대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구멍을 빠져나온 카이는 사원의 복도를 걸으며 계단을 찾았다.
“찾았다! 이쪽이다!”
“죽여서 위층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
중간중간 그를 방해하는 뮬딘 교도들이 우르르 몰려왔지만, 그들의 공격은 카이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음?”
사원의 위층을 돌아다니던 카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문.’
마계로 향하는 지옥문과는 성질이 약간 다르다.
그곳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순수한 악(惡)이었다면, 이 문에선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끼이익.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선 카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안쪽의 굉장히 넓은 공간에는 수백 개의 시험관이 놓여 있었다.
알 수 없는 액체가 가득 찬 시험관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들어 있었다.
“놀, 오크, 고블린, 그리핀…… 잠깐, 오우거까지?”
카이가 안쪽으로 들어섰지만, 시험관들의 앞에 있던 뮬딘 교의 연구원들은 신경 쓰지 않고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B4와 E12의 세포 결합 실험 시작합니다.”
“기록 측정 시작.”
그들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카이가 기운을 뿜어냈다.
“……모두 정지.”
우뚝.
그 명령에 연구원들이 일순 행동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갔다.
“잠깐, 내 말이 안 들리…….”
가까이 있던 연구원의 어깨를 잡아당긴 카이가 숨을 삼켰다.
살아 있는 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생기(生氣).
연구원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세포 합성…… 트롤의 피와 오크의 근육을…….”
마치 기계처럼 중얼거리던 연구원은 카이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리자, 다시 연구를 속행했다.
‘뮬딘 교, 너희들은 대체 어디까지…….’
카이가 이빨을 꽉 깨물었다.
이들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모든 이지를 강탈당한 채, 조종자의 명령만 따르고 있을 뿐.
마치 인형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시험관들에서…… 아마 몬스터를 만들어내는 거겠지.’
아오사와 자탄 그리고 할리와 같은 강력한 생명체들.
뮬딘 교가 자랑하던 합성 몬스터의 출처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카이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역시, 모두 죽이는 수밖에…….’
이지를 상실했다고는 하나, 뮬딘 교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다.
당연히 여태까지 셀 수도 없이 많은 악행을 일삼아 왔을 터.
카이가 성검을 꽉 쥐는 순간, 연구원 하나가 고개를 휙 돌렸다.
“죽일 텐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이가 눈매를 찌푸렸다.
“뭐?”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나의 조종을 받는 이들. 뮬딘 교와는 관계가 없는 일반인들이다. 그럼에도 죽일 텐가?”
“……결국 네가 원흉이라는 거네.”
타인의 몸을 빌리는 기술.
일전에 한 번 겪어본 바가 있었다.
“여전히 직접 몸을 드러내진 못하고, 졸렬하게 남의 몸을 빌려 까부는구나, 아트록.”
“큭, 그렇게 매도해도 상관없다. 스스로는 신중하다고 생각하는 중이니까.”
뮬딘 교의 추기경, 아트록.
그와의 두 번째 재회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아무리 네 조종을 받고 있다고 해도, 이들은…… 사람이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어.”
카이가 어딘가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실험 실패, 실험체 폐기.”
실험이 실패했는지, 시험관에 들어 있던 액체가 모두 빠져나갔고, 안에 들어 있던 몬스터는 짐짝처럼 쓰레기통으로 사라졌다.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과 해도 될 행동. 그것을 정하는 건 누구지?”
“그건…….”
그런 부분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는 법이라는 강력한 수단으로 어느정도 틀이 잡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더라도,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행동이 인도적인 것인지, 반 인도적인 것인지에 대해서.
“내가 모시는 신, 뮬딘께서는 이를 허락하셨다. 나는 그 어떤 인간 왕국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지. 마땅히 지켜야 할 법규도 없는 나에게 이것은 옳고 바른 일이다. 한데 네놈은 무슨 근거와 명분으로 나의 행동을 제재하려는 거지?”
“그걸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네놈과 할 말은 없어.”
서걱!
카이의 성검이 연구원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하나 카이의 뒤쪽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생각했던 것보다 매정하군. 정말 베어버릴 줄이야.”
아트록은 다른 연구원의 몸을 통해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주신께서는 빛과 어둠, 두 가지 형태를 만드셨다. 그중에 옳고 그른 것은 없어. 그저 서로가 다를 뿐이지. 너처럼 착해 빠진 녀석이 있다면, 나처럼 악한 녀석도 있다는 소리다.”
“악한 건 상관없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뭐라고 하겠어? 다만…… 그렇게 살고 싶다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는 말았어야지.”
카이의 시선이 내부의 시험관들을 다시 한번 훑었다.
“사회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 섞이려면 좋든 싫든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해야 해.”
“흠, 그것도 결국 너의 기준이 아니던가? 왜 자꾸 우리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려 하지?”
아트록이 손을 휘휘저었다.
“뭐, 되었다. 시답잖은 말다툼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럼 꺼져.”
파아앙!
카이의 손가락이 빛줄기를 토해내자 연구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어김없이 새로운 연구원이 태연하게 걸어오며 말했다.
“카이, 네놈에 대한 조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철저하게 이뤄졌다.”
“그래서?”
“우리는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넌 우리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트록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 차이가 결국 너를 무너뜨릴 것이다.”
“백 번의 말보다는 한 번의 행동이야.”
서걱!
다시 한번 연구원의 목이 잘렸다.
“의심해 본 적은 없나? 우리는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한데 왜 이곳을 다시 가동시켰을까?”
새롭게 등장한 아트록의 말에 카이는 멈칫했다.
그 부분은 스스로도 계속해서 의심해 오던 부분이었으니까.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맞다. 널 위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지.”
연구원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씨익 웃었다.
눈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기에, 마치 시체가 웃는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미 느꼈을지는 모르지만, 이미 네놈이 빠져나가기에는 늦었다.”
“…….”
카이는 그 말을 듣고 가볍게 감각을 집중시켰다.
‘과연.’
주변에서 알 수 없는 마력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이것은 과거 뮬딘 교와 전쟁을 벌일 때, 텔레포트 능력을 강제시켰던 흐름과도 비슷했다.
“어떠한 마법이나 신성 주문을 사용해도 사원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고작 내 발목을 몇 분 잡아놓겠다고 이런 함정을 준비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야 물론이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모험가는 한 번 죽으면 사흘 동안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고 하더군.”
현실의 24시간, 게임에서의 72시간.
그것이 사망한 플레이어가 부여받는 접속 불가 페널티였다.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뮬딘 님께서 헬릭의 신병을 구속하시기에는 말이지.”
“……뭐?”
그 엉덩이 무거운 뮬딘이 직접 몸을 움직인다고?
그것도 자신을 배제시켜 놓은 상태로?
인상을 찌푸린 카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할 수 있으면 해봐.”
“그야말로 자신감이 넘치는군.”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호오…….”
알 수 없는 웃음 소리를 남긴 아트록이 입을 열었다.
“그럼 사흘 후에. 뒤바뀐 세상에서 만나도록 하지.”
“그럴 일은 없…….”
카이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지하에서부터 쿵쿵!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왔다.
눈을 가늘게 뜬 카이가 바닥을 내려다보자, 아트록이 설명했다.
“뮬딘 님께서 직접 지휘하고 힘을 쓰신 작전이다. 중간계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 로드조차 이 공격을 맞으면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하지.”
카이는 아트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곧장 스킬을 시전했다.
“영체화.”
화아아악!
그 순간 카이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모든 물리 피해에 면역이 되지만, 마법 피해에는 2배의 피해를 입는 영체화 상태가 된 것이다.
‘지금의 난 사실상 무적.’
왜냐하면, 현재 카이의 마법 저항력은 100%를 돌파했기 때문이다.
기존에 들어오던 대미지가 0이라면, 그게 2배가 되어도 마찬가지로 0인 법이니까.
“헛수고. 오히려 몇 없는 뮬딘 교의 전력만 깎아 먹는 한 수가 되었어.”
“끌끌, 분명 그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지하에서부터 터져 나간 사원이 붕괴되고, 바닥이 붕괴되며 카이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솟구치는 어둠의 신성력이 시험관과 연구원들을 모조리 집어삼킬 때도.
예상했던 대로 카이에게는 그 어떠한 피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음?”
그 순간, 초월자의 감각으로 무언가를 느낀 카이가 몸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잡힌 것은, 불길에 휘감긴 상태에서도 웃고 있는 연구원의 모습이었다.
“디스펠.”
‘뭐?’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반투명하던 카이의 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영체화의 쿨타임은 5분…….’
그 말은 즉, 연달아서 사용할 수 없다는 뜻.
“크하하하하!”
아트록의 광소가 귀를 뒤흔드는 것과 함께, 카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끄으윽!”
어둠의 신성력이 옮겨붙은 전신에서 힘이 빠지고 고통이 느껴졌다.
그리 강한 강도는 아니었지만, 체력은 1초가 지날 때마다 쑥쑥 빠져나갔다.
‘햇살의 따스함, 햇살의 따스함, 햇살의…….’
치유량보다 들어오는 데미지가 훨씬, 훨씬 더 높았다.
“햇살의 따스……!”
결국 스킬이 완성되기 직전, 어둠의 신성력이 한 번 더 폭발하며 사원을 터뜨렸다.
콰과과과광!
부서진 사원의 잔해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추락했고, 카이는 자신이 추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등이 지하 5층, 지옥문이 존재하던 바닥에 닿는 순간.
우드드득!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그의 생명력이 0에 도달했다.
삐이이-
캐릭터가 사망할 시 들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망하셨습니다.]
‘……죽었다고? 내가?’
카이는 폴리곤 파편이 되어 흩어지는 자신의 몸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캐릭터가 사망한 플레이어는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주변에 자신을 부활시켜 줄 수 있는 사제가 있다면 다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닌 이상 곧 강제적으로 로그아웃이 된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목숨.’
강자도, 약자도 딱 하나의 목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카이는 남들에게 없는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었다.
페가수스의 개발자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유저나 몬스터도 알지 못하는 기회.
아무리 조사해도 나올 리가 없는.
말 그대로 카이가 지닌 최후의 한 수라고 불릴 만한 스킬.
스멀스멀.
폴리곤 조각이 되어 흩어진 카이의 파편들이 다시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내 다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낸 폴리곤 조각에서 검붉은색의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불사의 의지 스킬 발동되었습니다. 죽음에 저항했습니다.]
[불사의 의지 스킬 효과로 전체 체력의 1%가 회복됩니다.]
[불사의 의지 스킬 효과로 5초 동안 불사(不死) 상태가 되며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번쩍!
무너진 사원의 잔해들에 파묻혀 있던 카이가 눈을 떴다.
콰르르릉!
손을 휘저어 몸을 일으킬 만한 공간을 만들어낸 카이가 중얼거렸다.
“……재미있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배제시켜 놓고 헬릭을 직접 치겠다라.
뮬딘의 발상을 떠올린 카이가 낮은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