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1
힐통령 431화
130. 분리수거(3)
신전의 내부는 어두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공간 속.
옥좌에 앉아 있던 해골의 텅 빈 눈두덩에서 돌연 귀화가 피어올랐다.
“후우. 역시 뮬딘 님이시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은 매번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군.”
해골, 아트록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모시는 신을 찬양했다.
카이가 언젠가 암흑 지대의 사원으로 찾아올 것이라는 것.
뮬딘은 그것을 예상했고, 그를 위한 함정을 파놓았다.
‘몬스터 합성에 대한 자료는 사전에 옮겨두었으니 피해가 없다.’
굳이 피해를 따지자면, 수백 명의 뮬딘교도들과 연구원들 정도다.
하지만 그가 모시는 신은 항상 이런 말씀을 전하셨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언제나 필수불가결하다고.
‘이번 작전에서 카이를 배제하는 것은 그들의 목숨 값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
스스로의 행위에 만족스러움을 느낀 아트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포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로브 자락이 신전의 바닥을 쓸면서 지나갔다.
화륵, 화르륵!
그가 걸음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바닥과 벽에 달려 있던 횃불에 푸른색 불이 타올랐다.
자리에 우뚝 멈춰선 아트록이 자신의 주변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곳엔 교단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수백의 이단심판관과 대사제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일어나라.”
아트록의 날카로운 음성이 공기를 긁었다.
“우리들의 신을 모시러 갈 시간이다.”
***
툭, 툭.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카이는 기침을 뱉어냈다.
“쿨럭, 쿨럭.”
현재 그가 위치한 곳은 사원의 지하, 지옥문이 있던 장소였다.
‘여기가 지하 5층이었나…….’
지상 7층까지 세워져있던 사원이 무너지면서 잔해가 그대로 그의 몸을 깔아뭉갠 것이다.
“정말 철저하게 준비했네.”
그의 주변에는 사원을 이루고 있던 돌덩이들의 잔해와 파편으로 가득했다.
몸을 움직이기도 편치 않았고, 움직일 때마다 먼지 섞인 흙이 폐부로 들어와 그를 괴롭혔다.
“드래곤 로드라도 죽을 거라는 말…… 단순한 허풍은 아닌 것 같네.”
그만큼 적들의 노림수는 날카로웠다.
자신이라는 사람을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짤 수 있는 작전이었으니까.
“내가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라…… 제법인데?”
사람은 스스로도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지 잘 모른다.
헌데 그걸 타인이 정확하게 예측을 한다?
‘무서운 녀석.’
혀를 내두른 카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선 여기서 나가자.’
신출귀몰을 사용해봤지만, 여전히 공간 이동 스킬의 사용은 불가능했다.
“조금 시끄럽겠지만 결국 힘으로 뚫고 나가야 하나.”
카이는 전신의 힘을 끌어모았다.
이대로 내지르기만 하면 사원에는 다시 한 번 대폭발을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허나 그는 힘을 쏟아내기 직전, 돌연 힘을 갈무리했다.
‘잠깐만…… 이건 혹시 엄청난 기회 아니야?’
그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트록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뮬딘이 이번 작전에 직접 나선다고 했어.’
그 말은 즉, 뮬딘이 중간계에 제 발로 내려온다는 뜻.
카이가 고생스럽게 이런저런 준비를 한 것들이 소용없어진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불쾌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잘된 거지.’
아무런 리스크도 없이 뮬딘이 호랑이 굴로 들어오는 셈이니까.
‘아마 그는 지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최대의 위험 요소인 자신이 배제된 지금, 뮬딘에게 걸리적거리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카이가 빠르게 판을 짜기 시작했다.
‘나는 이대로 죽어있는 편이 쉽겠어.’
뮬딘을 의심 없이 지상으로 내려오게 만들려면, 자신은 지금처럼 ‘죽은 상태’여야 한다.
“하지만 헬릭 님에겐 귀띔해 드려야겠지.”
카이가 폰을 꺼내 타자를 두드렸다.
***
페가수스 본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순식간에 각 부서의 팀장 이상 인선들을 소집한 마르코 사장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기도는 실패한 것 같군.”
“…….”
“…….”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거 진심이었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이를 뱉어내는 간 큰 이는 없었다.
“아트록이 뮬딘교의 최정예들을 이끌고 아르칸으로 향하는 중이다.”
“아트록……!”
“뮬딘교의 추기경?!”
이번에는 반응이 달랐다.
저마다의 입에서 경악 혹은 탄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아무래도 카이와 전면전을 펼칠 생각인가 본데…… 나와 짐 박사는 이번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게임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본다.”
“그야 그렇죠.”
“만약 아트록이 이긴다면…….”
솔직히 말하면, 페가수스 입장에서는 그것이 베스트다.
어쨌거나 뮬딘교는 게임 초반부터 흑막의 포스를 줄기줄기 뿜어내던 어둠의 세력.
일반 유저들 입장에선 그들의 등장이 갑작스러울지 몰라도, 개연성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니까.
“대륙이 피에 잠기고, 낮보다는 밤이 더 길어지겠지.”
“몬스터들의 레벨과 A.I도 향상될 겁니다. 뮬딘교에서 연구 중이던 분야가 그거였으니까요.”
“각 구역 별로 새로운 필드 보스가 생기고, 던전들이 생길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아트록이 이기는게 게임을 위해서는 더 낫겠군요.”
팀장들이 내는 의견에 마르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카이가 이긴다면?”
“…….”
그 질문에 모두의 입이 합죽이처럼 다물어졌다.
“짐 박사는 이번 싸움의 승률을 50:50이라고 보고 있더군.”
“예.”
“카이가 이기면 그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갈 거야.”
“그가 아트록을 이긴다면 그 다음 목표는 뮬딘이겠지요.”
“만약 뮬딘교가 그렇게 사라져버린다면…… 게임의 콘텐츠가 메말라 버리는 것 아닌가?”
“도합 수만 개의 메인, 서브, 사이드 퀘스트가 사라지는 건 사실입니다.”
“으음. 어떻게 카이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마르코 사장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짐 박사가 고민에 잠겼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마르코 사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저희는 카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개발사가 일개 유저의 도움을 받다니…….”
“우선, 카이는 더 이상 일개 유저의 수준이 아닙니다.”
짐 박사의 단단한 음성에 회의실의 모두가 집중했다.
“지금 그의 인벤토리에 잠들어있는 돈만 해도 5억 달러(5,000억)가 넘습니다. 저희 회사가 아무리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해도, 그만한 현금을 한 번에 내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부분은 동의하네. 게다가 결국 그 금액은 전부 골드로 이루어진 가상 화폐. 그만한 금액이 시장에 풀리면 결국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지.”
그 또한 회사가 전부 끌어안아야 할 리스크다.
한 번 떨어진 화폐의 가치가 반등하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가 보유한 자본금만 그 정도입니다. 그럼 이제 인게임에서 그의 위치를 살펴보지요. 아르칸, 리버티아, 하베로스…….”
짐 박사의 입에서 수십 개에 달하는 영지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이하의 영지를 휘하에 둔 그의 작위는 무려 대공, 공왕입니다.”
“흐음,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쉽게 말하자면, 그는 현재 라시온 왕국의 명실상부한 실세라는 점입니다. 만약 이번 싸움에서 아트록이 승리한다면, 뮬딘교는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음. 결국 대륙의 국가들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 올 테고…… 카이의 힘도 필수불가결하다?”
“예. 더군다나 그는 뮬딘교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태양교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아닙니까.”
“확실히 그렇게 들리니…… 사람이 제법 거대해 보이는군.”
랭킹 1위, 수억 달러의 자본가, 공왕, 태양교의 우두머리.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을 하나씩 나열해보니, 저것이 단 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반대로 카이가 승리를 해도 저희는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뮬딘교를 너무 빨리 끝내지 말아달라는 부탁인가?”
“아뇨, 그 반대입니다.”
“그 반대?”
마르코는 물론이고, 회의실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예. 중간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뮬딘교의 최대 전력인 아트록 추기경. 그가 사라진다면 결국 뮬딘교는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음…… 한 마디로 뮬딘교만으로는 메인 에피소드를 끌어갈 힘이 사라진다는 소리로군?”
“예. 이후 게임의 방향은…… 좋든 싫든 저희 회사와 카이가 사전에 협의를 하고 디자인하는 형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말이 협의지, 결국 페가수스에서 카이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이야기의 본질을 꿰뚫어본 마르코 사장이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거야 원…… 회사의 꼴이 말이 아니로군.”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잘된 걸 수도 있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기존에 준비해 놨던 모든 시나리오가 다 날아갈 판에 오히려 더 잘된 것일 수도 있다니?”
“카이는 저희 미드 온라인의 대표적인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가 몰락하든, 여기서 더 높이 올라가며 비상을 하든. 저희는 그의 행동에 보폭을 맞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이냐고 묻는 걸세.”
마르코 사장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짐 박사는 말을 아꼈다.
“그건…… 제가 카이를 만나 대화를 나눠본 뒤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계획이 있긴 하군.”
“예. 하지만 확신은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그의 조건을 맞춰줄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요.”
“다녀오게.”
마르코 사장이 한 큐에 OK사인을 보냈다.
“한국으로 가서 그 곰 같은 여우를 구워 삶아보게나.”
그날, 짐 박사는 페가수스의 운명을 품에 안은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
“호에에!”
헬릭이 돌연 비명을 지르자 라샤가 태연스레 물었다.
“왜? 간식 먹고 싶어?”
“웅! 먹을래…… 가 아니라, 라샤여! 큰일 났느니라!”
자신의 폰을 내민 헬릭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무슨 일…… 어?”
그녀의 폰을 확인한 라샤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이거 진짜야?”
“웅. 카이에게서 온 문자니까 진짜일 것이다.”
“아니, 갑자기 왜…… 아트록이 직접 온다고?”
“웅. 경우에 따라서는 뮬딘도 올 수 있다고 하니라.”
“돌아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라샤가 헬릭의 손목을 붙잡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놈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천계로 돌아가자. 그럼 아무 피해도 없을 거야.”
“라샤여.”
“중간계에서는 우리의 힘이 크게 약해진 상태이기에, 아트록…… 그 녀석에게도 큰 피해를 입을 수가 있어. 천계로 돌아가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안전해지면 그때 다시…….”
“라샤여.”
헬릭의 침착한 음성이 라샤의 두 귀를 흔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 라샤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네 일인데, 넌 어떻게 항상 이렇게 침착한 건데?”
라샤가 살짝 삐진 음성으로 중얼거리자, 헬릭이 배시시 웃으며 그녀를 꼬옥 껴안았다.
“그야 항상 나의 사람들을 믿기 때문이다.”
“……카이 님이 뭐라고 하셨어?”
“연기를 해달라고 하는구나.”
“연기?”
눈을 동그랗게 뜬 라샤가 이내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설마 카이 님이 너한테 미끼 역할을 해달라고 한 거야? 그렇게 안 봤는데……!”
당장이라도 카이에게 따질 기세였기에, 헬릭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이미 동의했느니라.”
“뭐? 넌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왜 위험을 자처하는 건데?”
“말했잖느냐. 믿기 때문이라고.”
헬릭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카이를 믿느니라, 그가 나에게 약속을 했으니까.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게 만들지 않을테니 도와달라고.”
“……그래서 도와준다고?”
“응. 그는 여태까지 나에게 그 정도의 믿음을 주었으니까. 그 믿음에 믿음으로 보답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
“어휴, 나는…… 난 모르겠어.”
잔뜩 지친 라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아트록 그 녀석은 언제 온대?”
“지금 오고 있을 것 같구나.”
“그렇게 빨리!?”
상상 이상의 속도다.
라샤가 침을 꿀꺽 삼키자, 헬릭이 그녀를 토닥였다.
“그대는 천계에 돌아가 있어도 되느니라. 이건 나와 뮬딘…… 태양교와 뮬딘교의 싸움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아얏!”
라샤가 헬릭의 머리에 따콩! 벼락같은 꿀밤을 먹였다.
눈물이 핑 돈 헬릭이 서럽게 울먹거리며 두 손으로 제 머리를 문질렀다.
“왜, 왜 때리느냐……? 아프다아…….”
“흥, 네가 먼저 잘못한거거거든? 나한테 소중한 친구를 버리고 도망치라고 했으니까.”
고개를 휙 돌리는 라샤의 표정은 누가 봐도 삐진 사람의 그것이었다.
이에 헬릭은 아픈 것도 잊은 채, 헤헤거리면서 라샤에게 다가갔다.
“화내지 말거라. 그대를 생각해서 예의상 건넨 말이었으니까.”
“예의 차릴 거면 평소부터 잘하던가. 같이 쓰는 방 청소는 나 혼자 다 하거든?”
“그, 그건…… 노력해 보겠느니라.”
“그것뿐만이 아니야. 물건 쓰고 나면 항상 있던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했지? 맨날 이상한 데에 던져 놓고. 그리고 샤워 끝나면 수도꼭지 제대로 잠그라고 했어 안했어? 왜 맨날 머리도 안 말리고 침대로 달려가는 거야? 감기 걸리고 싶어? 아, 맞아. 생각해보니 숙제도 제때제때 안하다가 제출 전날만 되면 나한테 도와달라고…….”
“으으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라샤의 잔소리에 헬릭이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이여, 빨리 와서 구해다오…….’
지금만큼은, 뮬딘보다 라샤가 더 무서운 헬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