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2
힐통령 432화
130. 분리수거(4)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생기를 빨아들이는 죽음의 군세.
아트록이 이끄는 뮬딘교 최정예는 예로부터 ‘어둠의 군단’이라고 불리었다.
역사책에서나 살필 수 있는 그들이 다시 등장했다는 보고에, 각국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뭐? 어둠의 군단이라고? 그놈들이 갑자기 왜!”
“그건 뮬딘교가 자랑하는 최강의 군세 아닌가!”
“마법사와 레인저를 파견하여 그들의 동태를 24시간 감시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을 알아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하고 있으며 뭘 먹는지까지!”
어둠의 군단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항상 작게는 도시 몇 개.
크게는 나라 하나까지 먹어치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륙 중앙부에서 예고 없이 나타난 그들은 근처의 마을 서너 개를 몰살시키며 존재감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이에 모든 권력자의 신경이 어둠의 군단에 쏠렸다.
뮬딘교를 상대하기 위한 국제기구, 어둠 추적자에 엄청난 힘이 실렸고.
어둠 추적자에 소속된 ‘추적자’들이 어둠의 군세를 조용히 따르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속속들이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들의 진군 방향은 라시온!”
“만약 어둠의 군단이 방향을 틀지 않고 쭉 나아간다면…….”
“아르칸! 카이 대공의 영지인 아르칸이 나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라시온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알데바란과의 전쟁을 마친 지금, 그들은 전쟁 때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중이었으니까.
이미 한 번 무너졌던 라시온의 북부 관문은 여태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어둠의 군단은 코 한 번 풀지 않고 라시온의 땅에 당당히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이 아르칸 영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수많은 군대가 그들을 막아섰지만, 뮬딘교의 최정예를 상대하기에는 수준의 격차가 너무 높았다.
***
“교황님.”
아르칸 아카데미의 사제와 성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의 정체는 성혈단.
태양교 제일 무력집단이라 불리우는 자들로, 어둠의 군단이 출현하는 순간 곧장 아르칸으로 달려왔다.
일이 터지면 가장 먼저 아르칸 아카데미를 보호하라는 단주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아르칸을 보호하라는 이유는 이곳에 교황님이 계시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어둠의 군단을 우리만으로 막아낼 수 있을 런지…….’
물론 다른 국가에서도 부랴부랴 군대를 꾸려 지원을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허나 현재 라시온 전역에선 텔레포트 마법의 사용이 불가했다.
“역사책에 나와 있던 수법입니다. 공간의 좌표를 뒤틀어 공간을 이동하는 모든 계열의 마법을 금지시키는 극악의 기술이지요.”
“아르칸 아카데미는 수성하기에는 그리 좋은 성이 아닙니다.”
“아직 적들이 당도하지 않은 지금, 빠르게 교황님을 모시고 남하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이 낫습니다.”
성혈단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오고갔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버트가 입을 열었다.
“카이 단주에 대한 소식은 여전히 없는가?”
“예, 안타깝지만…… 단주님의 소식이 끊긴 지 이틀째입니다.”
어둠의 군단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이때, 카이와 연락이 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알버트로 하여금 엄청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어둠의 군단이 굳이 아르칸으로 온다는 것은…… 역시 나 때문이겠지.’
대외적으로 태양교를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교황인 자신이었으니까.
아마 대륙 전체의 사기를 바닥까지 떨어트리려면, 교황인 자신을 죽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카이 님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터지면 항상 성혈단을 아르칸 아카데미로 보내는 거겠지.’
다름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을 받은 알버트 교황이 결정을 내렸다.
“적들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지금, 섣불리 성을 나가 남하하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곳에서 수성을 하면서 시간을 끌어보지요.”
지원군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시간만 끌어준다면, 적들은 자연히 공중분해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굳이 이런 시기에 날 노리는 의도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죽인다고 해서 뮬딘교가 엄청난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매우 강력한 경고가 될 수는 있다.
자신들이 돌아왔다고.
죽음의 군단이 역사 속에서 부활했다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던지는 것이 될 테니까.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뮬딘교가 제대로 활약할지도 모르겠군.’
태양교의 전설, 광휘의 패트릭에 의해 몰살되었다고 알려진 어둠의 군단이 재창설되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권력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을 터.
‘내가 중요하겠군.’
자신이 그들에게 순순히 당해준다면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다.
알버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버티겠다고 다짐했다.
‘카이 님의 기대를 져버려서는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자신을(?) 보호하고자하는 그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
날이 밝았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기분 나쁜 구름이니라.”
이불을 개고 있는 라샤를 뒤로하고 창문을 멍하니 쳐다보던 헬릭이 중얼거렸다.
“먹구름이네. 비는 안 올 것 같은데.”
“모르지. 비 대신 더 우중충한 손님들을 데리고 올 지도.”
헬릭의 뼈가 있는 말에 라샤가 눈을 깜빡였다.
“오늘…… 올까?”
“카이의 말이 맞다면 그럴 것이다. 사흘 내로는 무조건 올 거라고 했으니까.”
그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유저의 사망 페널티 시간은 사흘.
아트록은 오늘을 넘기면 카이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늘 승부를 보려고 할 터.
“속은 괜찮아? 어제는 소화도 잘 못했잖아.”
“으음, 소화제 먹을래…….”
“기다려 봐.”
큰소리는 다 쳐놓은 헬릭이었지만, 그녀는 막상 하루가 지날 때마다 긴장을 했다.
어제는 점심 때 먹었던 급식이 체한 것 같다며 소화제를 두 알이나 먹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
“웅. 명심하겠느니라.”
헬릭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트록.
그 이름은 헬릭의 머리에도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는 벌써 수백 년 째 뮬딘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뮬딘교의 기둥이었으니까.
“카이 님은 지금 어디쯤 계실까?”
라샤의 질문에 헬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잘 모르겠느니라. 그런데……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 걸 보니, 근처에 있을 것 같으니라.”
“근처라면…… 저쪽 산에서 내려다보고 계시기라도 한 건가?”
헬릭과 라샤는 이마를 창문에 딱 붙이고 카이를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어두웠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무거운 공기가 알버트 교황을 불편하게 만들 때쯤.
온몸이 비에 젖은 사제 하나가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열고 들어왔다.
“교, 교황님!”
“진정하게. 그래, 무슨 일인가?”
“어, 어둠의 군단이…… 어둠의 군단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제의 보고에 알버트를 지키고 있던 성혈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바닥을 두드리는 빗줄기보다도 차가운 눈빛으로 저마다의 무구를 정비했다.
“손님을 맞을 시간이군요.”
“비록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긴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늦었네요. 라시온 국경을 통과한 게 엊그제 밤이라 들었는데.”
뮬딘교는 태양교의 역사적 원수다.
두 세력의 싸움은 정해진 운명 같은 관계.
게다가 지금은 요인을 보호하고 있기에 싸움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말 그대로 외나무다리 위에서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
“역사적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어둠의 군단이라, 기대되는군요.”
“놈들을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죠.”
바로 그늘진 바닥 밑으로.
각자의 전의를 다진 성혈단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신전을 철통처럼 호위했다.
우우웅!
그때, 끈적끈적한 기운이 아르칸 도시를 뒤덮었다.
“이 새끼들이…….”
성혈단 내부에서도 아직 나이가 어린, 테페른이 이를 깨물며 발끈했다.
뮬딘교의 신성력으로 도시를 뒤덮는다는 것은 명백히 그들을 도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어두워진 창 밖을 바라보던 알버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만 신경쓰지 말고, 성혈단원들은 학생들과 교수진들의 보호에도 주의를 기울여주게.”
“예. 이미 모두 강당에 모아놓고 보호를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혈단원들은 프로라는 말이 걸맞게 효율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300명으로 이루어진 성혈단원 중 50명은 강당의 보호.
100명은 성문을 수호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150명은 오로지 알버트 교황을 호위 중이었다.
그 밖에도 아르칸 자체의 기사와 상비군을 동원하니 적들도 무시할 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이대로 성 안에서 버티기만 한다면 지원군이 와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
성벽 위를 지키고 있는 병사와 기사, 성혈단원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비위가 약한 병사들 몇이 토악질을 시작했다.
“구웨엑!”
“우욱!”
허나 그들을 다그치는 이들은 없었다.
당장 성혈단원들만 하더라도,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저런 천벌을 받을 짓을!”
“……역사가 옳았다. 말 그대로 악귀 같은 놈들이로군.”
그들의 분노에 찬 반응과는 달리, 초원 위에 위치한 어둠의 군단은 태연해 보였다.
최정예 이단심판관과 대사제들로 이루어진 500명의 어둠의 군단.
뮬딘교가 자랑하던 무력 집단을 몇 세기만에 완벽하게 복원시켜 놓은 그들이었다.
하나 초원에는 500명이 아니라, 족히 1,500은 될 법한 사람들이 들어서 있었다.
“흐윽,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으어엉.”
라시온 국경을 통과하고 거리낄 것이 없던 어둠의 군단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이유.
그 이유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성문을 열거라. 태양교에선 생명을 귀히 여기고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지 않던가?”
태연스럽게 중얼거린 아트록이 손가락을 한 번 까딱거릴 때마다.
이단심판관들이 철퇴와 검을 휘둘렀다.
“끄아아악!”
“어윽…… 제, 제바알!”
정신이 또렷하게 박혀 있는 상태에서 팔다리가 박살나고, 안면이 으깨져 나갔다.
그 생생하고도 잔인한 장면을 옆에서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라시온 왕국의 백성들은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올수록, 그들은 성벽 위에서 자신들을 쳐다보고만 있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어흐흑, 죽기 싫어요…….”
하지만 성혈단원은 물론, 기사들조차 그들의 애원에 응답할 수는 없었다.
현재 그들의 가장 큰 임무는 알버트 교황을 무사히 보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슴 속에 있는 정의가 그들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흐음. 이 정도로는 자극이 약한 가보군.”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아트록이 부하에게 물었다.
“인질은 몇 명 남았지?”
“942명 남았습니다, 추기경이시여.”
“많이도 남았군. 앞으로 10초에 한 명씩 죽여라. 최대한 잔인하게.”
“명을 받듭니다.”
아트록은 의도적으로 자신과 이단심판관의 대화 소리를 증폭시켰다.
우웅, 우우웅.
마치 확성기가 울리는 것처럼, 그들의 대화 내용은 빗소리를 뚫고 아르칸 전체에 울렸다.
그가 이렇게 귀찮은 일을 시행한 이유는 간단했다.
‘성벽 위의 조무래기들을 자극해봤자 문이 열리지는 않겠지.’
결국 도시 내부에 있는 헬릭이 직접 나서게 만들어야 한다.
그가 모시는 신인 뮬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방법을 쓰면, 헬릭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뮬딘 님의 판단은 틀리신 적이 없다.’
그러니 헬릭은 나올 것이다.
아트록은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빗소리를 즐겼다.
어지럽게 떨어지는 빗줄기의 소리가, 그의 귀에는 클래식한 음악처럼 들렸다.
“추기경이시여.”
부하의 말에 아트록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냐.”
“목표가 나타났습니다. 성벽 위에…….”
“호오.”
아트록의 눈두덩에 푸른 귀화가 타올랐다.
그는 성벽 위로 자신의 시력을 집중시켰다.
“큭.”
뼈로 이루어진 그의 입가에서 비틀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말 무르구나…… 물러.”
도대체 저런 멍청한 소녀가 어찌 뮬딘 님의 여동생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불쌍하고도 어리석은 태양의 신이여. 더 이상 그대를 지켜줄 사도는 없도다.”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 헬릭.
그녀를 바라보던 아트록이 즐거운 목소리를 뱉어냈다.
“자, 이제 어쩔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