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35화 (435/441)

# 435

힐통령 435화

130. 분리수거(7)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있을지언정, 죽음을 반기는 이는 없다.

심지어 아트록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타입조차 아니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워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했고, 저주받은 존재인 리치가 되었다.

그로서는 무한에 가깝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목숨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을 터.

“아홉…… 아홉 번?”

두개골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탁한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이에 카이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제 여덟.”

스아아아악!

네 개의 창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아트록의 몸을 박살 냈다.

마치 티키타카를 하듯, 네 개의 창이 아트록의 뼈들을 주고받으며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어……억.”

“5.75초.”

이제는 부활을 하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모습이다.

카이가 한 발자국 다가가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트록이 황급히 뒤로 기어갔다.

“오, 오지 마라.”

“왜. 무서워?”

카이의 웃음기 어린 그 질문은 아트록의 머리를 몇 바퀴는 돌고 나서야 가까스로 이해되었다.

‘무섭…… 다? 내가?’

죽어버린 패트릭과는 달리 수백 년을 살아온 시대의 천재가?

고작 모험가 따위를?

아트록은 당장 개소리 집어치우고 검을 들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두…… 렵다.’

두려웠으니까.

상대가 검을 들 때마다 자신의 목숨은 하나씩 사라졌다.

벌써 사라진 목숨만 92개.

그 시간 동안 발악이란 발악은 모두 해보았다.

하지만 카이라는 철옹성을 넘을 수는 없었다.

“이것이…… 격의 차이인가.”

자신은 물론, 패트릭조차 닿지 못했던 ‘초월자’라는 벽.

일개 모험가가 어떻게 그 지고한 경지에 닿았는지는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은 단 하나뿐.

‘이길 수 없다…….’

이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뮬딘 교를 대표하던 위인으로서 자존심을 챙기고 죽느냐.

아니면 구차하게 살아남느냐.

‘하지만…… 저자가 살려줄까?’

아트록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카이의 입장이었더라도 자신을 살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지은 죄가 많았으니까.

아드득!

결국 아트록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저항 뿐이었다.

“뮬딘 님의…… 이름으로!”

화아아아아악!

아트록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뮬딘이시여, 저에게 이자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트록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전투 내내 부재중이던 뮬딘의 목소리가 먹구름으로부터 들려왔다.

[좋다.]

“뮤, 뮬딘이시여!”

아트록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뼈밖에 없을 것이 분명한 그의 두개골은 왠지 모르게 희열에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고생했다.]

“아아, 저의 노고를 알아주셔서 감사……?”

아트록의 말이 돌연 끊겼다.

이어서 그의 몸이 이상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뮤, 뮬딘이시여?”

[거부하지 말거라. 내 반드시 저자를 죽여 너의 넋을 달래줄 터이니.]

“하, 하지만…….”

[어둠의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뜨기를 기다려라.]

“믿…… 습니다.”

아트록이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콰르르르릉!

하늘에서 검은색 뇌전이 떨어져 초원을 강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원에 서 있던, 아트록을 직격했다.

“…….”

털썩, 아트록이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인간의 몸이 아닌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아까보다 더욱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백화점의 마네킹을 쳐다보는 듯한 감정이 들 정도.

“후우우…….”

아트록이 돌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몸을 일으킨 녀석은 자신의 팔다리를 가볍게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이렇게 버릴 녀석은 아니었거늘, 아쉽군.”

목소리가 바뀌었다.

더불어 녀석이 은연중에 흘리는 존재감 또한 바뀌었다.

자연스레 긴장한 카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뮬딘이냐.”

예전에도 이런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다.

라시온 북부 탈환전 때, 크롬의 몸에 빙의한 아트록을 향해서.

하지만 그때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만약 뮬딘이 직접 강림했다면, 자신은 먼지처럼 사라졌을 것이라고.

‘그 말은…… 뮬딘 또한 타인의 몸에 빙의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긴, 배운 것이 도둑질일 텐데.

아트록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뮬딘이라고 사용 못 할 리가 없다.

‘오히려 완성도가 더욱 높겠지.’

카이의 날카로운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던 아트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뮬딘인 것은 맞는데…….”

아트록, 아니, 뮬딘의 시선이 카이를 향했다.

“많이 건방지구나.”

우드드득!

카이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졌다.

반응은커녕, 공격이 날아온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아무리 상대가 뮬딘이라고 해도 이곳은 중간계다.

당연히 힘의 제약이 생겼을 것이고, 그는 본신도 아닌 빙의를 한 상태.

“크윽…….”

덜렁거리는 팔을 황급히 치료한 카이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설마 빙의는…… 중간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건가?”

“호오,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뮬딘의 대답에 카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게 가능했다면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지?”

중간계에서 저 정도의 활약이 가능했다면, 진작 대륙을 일통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야, 제약이 있으니까.”

뮬딘은 뼈로 이루어진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파스스슥.

그의 몸이 한 번 재가 되어 사라졌다가, 잠시 후에 다시 생성되었다.

“이제 일곱 번 남은 건가.”

“공격 한 번에 목숨 한 번이라…… 과연.”

저 정도의 힘을 행사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을 리가 없다.

“아트록은 유사시에 내가 강림을 할 목적으로 안배해 둔 녀석이다. 그 짧은 시간에 목숨을 92번이나 빼앗을 줄은 몰랐군.”

“안배라…… 그래도 널 위해 수백 년간 달려온 녀석인데, 미안해하는 감정은 전혀 느껴지지 않네.”

“내가 왜 미안해야 하지?”

뮬딘이 당당하게 말했다.

“아트록은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키운 녀석이었다. 뭐, 생각보다 끝이 아쉽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을 제법 충실히 이행해 주었지.”

“사람은 완전히 체스판의 말처럼 취급하는구나.”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뮬딘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랫것들은 멋대로 우리에게 의지하고, 저들의 바람과 부탁을 서슴없이 던지고 사라지지. 신이란 그 무지몽매한 것들을 이끌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은 세상이라고? 네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가 않는데.”

카이는 혈흔과 시체가 낭자한 초원을 슬쩍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충분히 이해한다.”

뮬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치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처럼, 부드러운 음성을 뱉어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그 어떠한 희생도 치르지 않고 얻은 정의나 체제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무엇을 포기해야만 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뮬딘이 두 팔을 쩍 벌리더니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온 세상이라도 쥔 것 같은 굉장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세상. 자신이 하고 싶은 욕구를 마음껏 풀 수 있는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처벌도 받지 않는 세상.”

“개판 오 분 전 세상이네.”

“아니, 내가 꿈꾸는 세상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자유로운 세상이다.”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어.”

카이가 조용히 반박했다.

“결국 네가 꿈꾸는 세상에서도 약자는 자유를 누릴 수 없어.”

“아니, 누구라도 자신의 욕망을 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를 누리는 순간, 그것을 고깝게 본 강자에게 죽겠지.”

“그것은 본인의 약함을 탓해야 하지. 난 자유만을 선물했을 뿐. 그 뒷감당까지 책임질 생각은 없으니까.”

“결국 허울 좋은 구실일 뿐이야. 네 말대로라면 지금의 세상도 자유롭기 그지 없지.”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다면, 강한 힘이나 권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니까.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자유 따위는 세상에 없어. 강자 몇몇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 세상은 그걸 자유가 아닌 특권이라 부른다.”

“…….”

뮬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겠지.

그는 결국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왜 괜한 미사여구를 붙여? 그냥 추악한 욕심만 드러내라고.”

“뭐…… 나의 뜻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너의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

말을 마친 뮬딘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스스스슥.

수백, 아니, 수천 개는 가볍게 넘는 어둠의 창이 생성되어 초원을 가득 메웠다.

뮬딘은 그 상태에서 카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르칸 성벽 위.

헬릭이 있는 장소였다.

“…….”

현재 그는 아트록의 몸에 빙의한 상태였기에, 눈두덩이에선 귀화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당연히 그의 눈빛을 통해 감정을 읽기란 불가능했다.

“올 거면 빨리 와. 뜸 들이지 말고.”

그가 헬릭을 쳐다보는 것이 불안하던 카이가 입을 열자, 뮬딘이 손을 휘둘렀다.

사아아아아악!

수천 개의 창이 카이를 향해 쇄도했다.

‘이것들…… 단순한 어둠의 창이 아니야.’

어둠의 창은 아트록도 몇 번 사용한 적이 있다.

단순히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스킬.

하지만 뮬딘이 사용하는 어둠의 창은 달랐다.

마치 자신이 사용하는 네 개의 창처럼,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수천 명의 적과 싸우는 기분……!’

까드드득!

카이가 다루던 네 개의 창은 이미 어둠의 창에 의해 부러진 지 오래였다.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는 있다지만, 몸에 생채기가 늘어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너지 실드가 대미지를 모두 받아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영체화!’

순식간에 푸른 입자로 변한 카이가 단번에 창들의 파도를 뚫고 나왔다.

“흠.”

나른한 목소리를 흘리는 뮬딘의 두개골을 그대로 붙잡은 카이가 그의 뒷통수를 초원 바닥에 찍어버렸다.

촤아아아악!

물이 고여있던 초원에서 시원한 소리가 퍼지는 것과 동시에.

우우웅, 영체화를 해제하고 실체를 갖춘 카이의 손에서 황금빛 신성력이 번져나왔다.

“태양광자포!”

리치의 ‘몸’을 부수기에는 충분한 공격력.

순식간에 한 번의 목숨을 잃어버린 뮬딘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부활했다.

물론 카이라고 몸이 성하지는 않았다.

“절대영도, 중력장.”

황급히 뒷쪽을 향해 스킬을 시전했지만, 빠져나온 수백 개의 창이 그의 몸에 고슴도치처럼 박혔다.

파박, 파바바박!

“크으윽!”

에너지 실드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줄어들었다.

“……대체 왜?”

부활한 뮬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보아도 승산이 없는 싸움인데…… 무엇을 위해 그리 열심히 싸우지?”

“장난해? 승산이 모든 결과를 말해준다면 이 세상에 싸움이 왜 있겠어?”

모든 사람이 질 것 같은 싸움을 피한다면, 세상에는 대부분의 싸움이 사라질 터.

“하지만 넌 벌레처럼 나약하지 않은가. 제 주제를 모르는 건가?”

뮬딘이 손가락을 튕기자, 카이의 두 다리가 그대로 박살났다.

힘을 사용해 또 한 번의 목숨을 잃은 뮬딘이 카이의 뒷쪽에서 등장하며 말을 이었다.

“몇 번을 도전해도, 몇 번을 싸우더라도 나에게 이기는 세계는 오지 않아. 계산은 끝났다.”

“계산이라…… 세상이란 걸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나를 알고, 상대를 안다면 미래를 알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변수라는 게 뭔지 모르나 봐?”

“변수? 그런 하찮은 것이 작용할 정도로 나약한 힘이었다면, 애초에 큰 뜻을 품지도 않았다.”

콰득!

“커억!”

뮬딘이 쓰러져 있는 카이의 복부를 발로 차버렸다.

초원을 몇 바퀴나 굴러 온몸이 물에 젖은 카이가 가까스로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햇살의 따스함…….”

띠링!

[뮬딘의 저주에 감염되었습니다.]

[치료/정화 스킬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쯧.’

뮬딘이 디버프 계열의 스킬을 쓸 거라는 예상은 진작에 했다.

하지만 설마 치료/정화 계통 쪽 스킬이 싹 다 막힐 줄이야.

‘생각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워.’

아마 아트록의 몸이 아닌 본신 쪽은 훨씬 더 까다로울 터.

“일어나면 고통이 찾아올 뿐이다.”

퍼엉!

뮬딘이 손가락을 튕기자 어둠의 탄환이 카이의 머리를 그대로 강타했다.

뒤로 수십 미터나 날아간 카이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쿨럭, 쿨럭.”

포기할 법도 하건만, 어기적거리며 자리에 앉는 카이를 빤히 쳐다보던 뮬딘이 말했다.

“흐음……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이건 나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고작 아트록의 몸을 빌린 나조차 감당하지 못하면서, 왜 그리 발버둥을 치느냐? 네놈이 초월의 벽을 뚫었다길래 살짝 기대를 해보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초월자의 수준이구나.”

콰드득!

허공에서 생성된 거대한 어둠의 송곳니들이 카이의 전신을 물어뜯었다.

“크아아악!”

“이제 모든 계산은 끝났다. 너희는 날 멈출 수 없어.”

뮬딘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남아있는 그의 목숨은 단 한 번.

그는 마지막 한 번의 목숨으로 카이를 끝내기 위해 천천히 걸어왔다.

허억, 허억.

신성력도, 마나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것이 뮬딘이 저리 당당하게 자신을 향해 걸어올 수 있는 이유일 터.

두 다리로 서지 못하는 검사는 칼조차 제대로 휘두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카이에게는 손에 쥘 수 있는 검 말고도, 또 하나의 검이 있다.

‘무형검.’

그것은 손이 아닌 마음으로 쥐는 검이다.

“……찾아갈 테니까, 목 닦고 기다리고 있어.”

카이가 죽음을 각오했다고 생각한 뮬딘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카이의 목을 비틀기 직전.

“…….”

뮬딘이 고개를 살짝 내려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파스슥, 파스스슥.

상대의 목을 부러뜨려야 할 손이 먼지처럼 비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 틈에…… 아니, 대체 어떻게…….”

잠시 침묵을 지키던 뮬딘이 고개를 들어 카이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딱 기다리고 있어. 내가 자유가 뭔지 가르쳐 주러 갈 테니까.”

“……재미있군.”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뮬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지.”

그 말을 끝으로 카이를 압박하던 리치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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