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
힐통령 437화
131. End Game(2)
“빚이라…… 그래, 분명 있었지.”
이전에 마르코 사장은 마계 콘텐츠를 더 이상 소비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그리고 눈앞의 청년은 그 약속을 지켰다.
이후로 대공을 죽이지 않았으니까.
“다만 내 권한을 넘기는 문제라면, 사장님에게 보고를 해야 될 걸세.”
“그 정도야 뭐, 괜찮습니다.”
정우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박사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협력 제안, 정보 제공입니다.”
“들어보지.”
“이번에 제가 아트록과 어둠의 군단을 처치한건 아실 겁니다.”
짐 박사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보고는 이미 들었네. 대단한 업적이야. 아, 비꼬는 말은 아니야.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그렇습니까?”
“자네는 게임의 수준을 몇 년은 끌어당겼어. 이건 우리들은 물론, 슈퍼 A.I인 라무스조차 사전에 예견하지 못한 수준이야.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괜찮네.”
“뭐…… 감사합니다. 아무튼 협력 제안에 있어선 뮬딘을 잡는 것에 자그마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흠. 도움이라…… 우리는 게임 밸런스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칠 수 없네만.”
“그래서 말씀 드렸잖습니까. ‘작은’ 도움이라고.”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는 걸까.
짐 박사의 노련한 경험으로도 정우의 생각을 읽어낼 순 없었다.
“시원하게 말해보게.”
“유저들입니다.”
정우의 말에 짐 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저들……?”
“네. 예전에 열렸던 침공 이벤트 기억하십니까.”
“물론일세. 내가 총괄했던 이벤트니까.”
“그와 비슷한 거, 하나 더 가지요. 이번에는…… 뮬딘 교를 대상으로 잡고.”
“흐으음…….”
짐 박사가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고, 그의 눈썹이 주기적으로 씰룩거렸다.
그가 고민을 할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하지만 유저들의 실력이 뮬딘 교의 정예를 상대할 정도는 아닌데…….”
“어디 유저들뿐이겠습니까.”
정우는 이번 전투에 모든 것을 걸었다.
“엘프, 드워프, 인어, 조인, 심지어 드래곤까지 유저의 편에 설 것입니다.”
“흐음. 그럼 몇몇 유저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유저들은…….”
“머릿수를 채우는 용도이지요.”
어둠의 군단과 아트록.
뮬딘 교의 최고 전력이 사라진 지금, 뮬딘 군의 사기가 대폭 깎여있는 지금.
‘엄청난 머릿수로 그들을 압박하면 사기는 더 떨어지게 되어있어.’
게다가 이벤트라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유저 아니겠는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던 짐 박사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좋네. 그렇다면 정보 제공은 무엇인가?”
“아시다시피 제 캐릭터는 초월자의 격에 올라섰습니다.”
“음.”
“하지만 여태까지 성물을 만들지 못했어요. 그게 있어야만 뮬딘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뮬딘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패트릭조차, 성검의 힘을 빌렸었다.
‘그러니 이론적으로 따지면 나도 패트릭처럼 뮬딘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났다.
뮬딘은 머리가 나쁜 녀석도 아니니, 성검에 대한 대비도 끝났을 것이다.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
변수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성물이라.”
자신의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쓸어내리던 짐 박사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왜 아직도 자네가 성물을 못 만드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성물을 만드는 조건은 간단해. 그대가 강렬하게 원한다면, 신념이 그에 맞는 성물을 제공할 것이거든. 허나…… 자네의 신념은 조금 특이하지 않나.”
“알고 계십니까?”
“자네의 플레이는 24시간 모니터링하는 중이네. 자유의 신념을 얻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그렇다면 제가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글쎄, 그건 자네만이 알고 있는 대답이겠지.”
짐 박사의 말이 끝나자 정우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정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후우…… 어렵네요.”
“아직 시간은 여유로우니 천천히 생각해 보게.”
“마음이 조급해져서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기계처럼 딱딱 조절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박사님은 왜 이곳에 방문하신 겁니까?”
“일찍도 물어보는군.”
낮게 웃은 짐 박사가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미스터 한. 자네에게 사업 파트너 제안을 하기 위해 왔네.”
“사업 파트너…… 제안이요?”
“음. 자네도 알겠지만, 이 게임의 밸런스는 이미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야.”
정우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 때문이군요.”
“물론 자네 탓이라는 건 아닐세. 자네가 버그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건 아니까.”
하지만 그건 페가수스 소속 관계자들이나 알 법한 이야기다.
일반 유저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버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카이의 강함이 이해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업 파트너 제안이라고 하면, 무엇입니까.”
“난 솔직히 이번 자네와 뮬딘의 싸움에서…… 자네 쪽에 배팅을 걸었네.”
“그건 의외네요. 데이터 좋아하시는 분 아닙니까? 모든 데이터가 저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을 텐데…….”
“여태까지 자네가 유리했던 싸움이 몇 번이나 있었나. 데이터는 잠시 치워두고 얘기하지.”
짐 박사의 목소리는 유례없이 진중했다.
“게다가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조차 없네. 자네가 패배한다면, 뮬딘이 세계관에서 당당하게 날뛰는 날이 온다면…… 일반 유저들은 어차피 그걸 감당하지 못할 걸세.”
“……서비스 종료인가요?”
“게임을 제대로 즐길 수 없으면 유저들이 떠나네. 그러면 자연스레 수익이 감소되고, 결국 회사 입장에서는 서버를 닫은 뒤 차기작에 집중할 수밖에 없겠지.”
“으음.”
요컨대, 페가수스 입장에서도 무조건 카이가 이겨야 하는 싸움이다.
“자네가 빚을 지우겠다고 한 것. 자네와 나 둘만의 비밀로 하지.”
짐 박사의 호의에 정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빚은 그건 조금 더 나중에. 자네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사장님에게나 쓰게.”
“……그래도 됩니까?”
“뭐, 악감정은 없었지만, 그간 자네에게 이런저런 피해를 준 것은 있으니까. 크흠.”
짐 박사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 잠시 생각을 정리한 정우가 제안했다.
“그럼 아예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예전에 제가 썼던 마법의 소라고둥 같은 아이템이요.”
“그건 불가능하네.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게임을 관리하는 라무스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개발자인데 그 정도 권한도 없다고요?”
“시간의 흐름은 사람을 변하게 만드네. 그 방향이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누구도 모르지.”
정우는 살짝 동의하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사람을 믿을 수 없었네. 남들은 물론이고, 나 자신마저 믿지 못했지. 미래의 내가 어떻게 변할지를 모르니까. 그래서 게임의 초기 단계 때 라무스에게 강력한 룰을 입력해 놨네. 관리자 권한으로도 풀 수 없는 절대적인 프로세스지.”
“그게…… 설마 개발자라고 하더라도 게임의 밸런스를 해치지는 못한다는 겁니까?”
“맞네. 그렇다고 아예 개입을 못하는 건 아니야. 아주 자잘한 것 정도는 당연히 우리가 나설 수 있네. 하지만 라무스는 이미 자네와 뮬딘의 싸움을 이 게임의 앞날을 결정지을 싸움으로 보고 있더군.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지. 때문에 그대에게 오버 밸런스의 아이템을 지급해 주는 건 어려워.”
“그럼 유저들을 상대로 이벤트를 여는 건 가능하겠습니까?”
“그 정도는 가능하네. 라무스는 허락과 불허의 개념을 따질 때 개연성을 많이 보는 편이야. 헌데 뮬딘 교가 나쁘다는 것은 게임의 초기 단계부터 열심히 뿌려온 떡밥이지 않은가. 지금 이벤트를 연다면 시기가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유저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테지.”
“과연…….”
고개를 끄덕인 정우가 자세한 사항을 질문했다.
“헌데 제가 뮬딘을 이긴다면, 사업 파트너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질문에 짐 박사는 목이 타는지, 제 앞에 놓여있던 식혜를 마셨다.
‘달콤한 음료군.’
짐 박사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는 음료의 이름은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그대가 뮬딘의 처치에 성공한다면…….”
그의 입에서 페가수스 사의 앞날을 반전시킬 파격적인 조건이 흘러나왔다.
***
짐 박사에게 식혜의 구매처를 알려주고, 그를 돌려보낸 카이는 곧장 게임에 접속했다.
“…….”
접속하기 전에 보았던 맑은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이 좀 더 앙상해 보인다는 것 정도일까.
“가을도 아닌데 무슨…….”
카이는 괜히 센치해진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칭호 도감.”
그는 곧장 자신이 이번에 획득한 칭호를 확인했다.
[빛의 사자]
등급 : 스페셜
내용 : 아트록 추기경을 처치한 자에게 주는 칭호
효과 : 신성력 +10%, 뮬딘 교의 존재와 전투 시 모든 능력치 10% 상승(이 효과는 칭호를 장착하지 않아도 적용됩니다.)
“오?”
칭호의 효과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자, 카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뮬딘 교의 기둥 하나를 뽑으니 이 정도 수준의 칭호도 주는구나.’
입가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운 카이는 곧장 자신의 스탯을 확인했다.
힘 : 4,387 체력 : 4,212
지능 : 3,724 민첩 : 2,682
신성 : 6,195 위엄 : 2,554
선행 : 1,384
스탯 포인트 : 110
기존에 5,820이던 신성 스탯은.
선행 스탯이 375개나 증가한 덕분에 6,195가 되었다.
‘이제 초월자의 격도 항시 유지가 가능해졌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에 안정이 찾아들었다.
‘체력도 42만을 넘겼고…… 다른 스탯들도 모두 괴물이야.’
카이는 남아 있는 스탯 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역시 ‘신성’이었다.
‘솔직히 신성에 스탯 포인트를 투자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 실드 때문이야.’
입은 피해를 생명력이 아닌 신성력으로 대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에너지 실드의 사기적인 효과였다.
한마디로 지금은 체력을 1스탯 올리는 것보다, 신성을 1스탯 올리는 것이 탱킹 면에서 훨씬 더 좋다는 뜻.
‘게다가 신성 스탯을 올리면 성검의 공격력도 자연스럽게 올라가지.’
성검의 공격력은 신성 스탯의 40% 고정이기 때문이다.
‘현재 성검의 공격력은 2,478.’
하지만 남아 있는 110개의 스탯을 모두 신성에 투자한다면?
띠링!
[정말로 110개의 스탯 포인트를 신성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응.”
[신성 스탯이 440만큼 상승하셨습니다.]
[신성 : 6,195 -> 6,635]
[초월자의 감각이 조금 더 예리해집니다.]
단순 무기의 공격력만 2,654가 된다.
여명의 검법의 효과인 검술 공격 시 공격력 300% 증가를 감안한다면.
웬만한 유저들은 평타 한두 번이면 썰어버릴 수 있다는 뜻.
카이는 조용히 스탯 창을 껐다.
이어서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시선은 맑은 하늘의 위, 어딘가에 존재할 뮬딘의 섬을 향했다.
“뮬딘…….”
녀석이 자신의 마지막 사냥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