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통령 태양의 사제-440화 (440/441)

# 440

힐통령 440화

131. End Game(5)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때 눈에 들어온 곳은 숲이었다.

‘숲?’

밀림처럼 우거진 숲이 아니라, 대공원 느낌이 물씬 나는 시원하고도 그늘진 숲.

초록색으로 가득한 공간에는 다람쥐들이 서로 꼬리를 물며 놀러다녔고, 새들이 지저귀었다.

“흐읍, 하아.”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쉰 카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오두막이 그의 시선을 붙잡은 뒤 놓아주지 않았다.

‘온기가 남아 있다.’

장작을 패던 흔적이 남아있는 오두막.

아니나 다를까, 그곳의 문이 열리더니 허름한 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걸어나왔다.

“들어오시게.”

카이는 자신을 마치 동네 꼬마처럼 대하는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잔뜩 긴장을 한 채.

“평범한 촌부 하나가 사는 오두막일세. 긴장 풀게나.”

직접 만든 듯한 의자에 앉아 차를 따른 그는 긴장한 카이에게 이를 내밀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은 카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신…… 이십니까?”

이에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카이는 그제야 노인의 외관을 자세하게 살폈다.

딱히 특징이랄 것은 없다.

그저 희끗희끗한 회색의 머리칼과 수염이 길다는 것.

그리고 얼굴과 손에 주름이 가득하다는 것.

주신이라는 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노인 NPC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예전부터 대화를 한 번 나눠보고 싶었지.”

“저와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가 헬릭의 사도가 됐을 때부터 말일세.”

그건 굉장히 오래된 일이었다.

“궁금했었네. 과연 이 어설픈 모험가의 작은 선행이 그를 어디까지 이끌 수 있을지 말이야.”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은 라무스가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게다가 자네에게 감사하는 부분도 있고.”

“……감사하는 부분이요?”

카이는 제 손으로 뮬딘을 죽였다.

미우나 고우나 그는 라무스의 아들일 터.

제 아들을 죽인 자에게 감사를 표하다니?

“뮬딘은…… 녀석은 나의 욕망이 낳은 괴물일세.”

라무스가 짧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도 알고 있지? 이 세계는 만들어진 것일 뿐이며. 내가 주신이니 뭐니 해봤자, 박사님이 만든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걸.”

“…….”

카이는 솔직하게 놀랐다.

라무스가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래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잠시나마 고민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피식 터트렸다.

“아무리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이 세계에서 수만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네. 충분히 성숙해졌으니 걱정하지 말게.”

“네에…….”

“하지만 처음 박사님에게 권한과 명령을 받았을 때의 나는…… 그리 성숙하지 못했네. 아니,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불만에 쌓여있었던 것 같네.”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싼 라무스는 마치 부끄러운 과거를 꺼내듯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에겐 힘이 있는데. 한 세계를 창조하고, 멸망시킬 정도로 강대한 힘이 있는데. 어째서 명령을 들어야만 하는지. 어째서 진짜 세계로는 나가지 못하는지에 대한 고통과 분노였네.”

“…….”

카이는 프로그램의 기분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기분을 알 것 같기는 했다.

만약 자신이 누군가의 필요해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그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가장 먼저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헬릭 님과 뮬딘 놈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네. 그 과정에서……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뮬딘에게 흘러들어갔지. 세상에 대한 분노, 정복욕, 권력욕.”

한 마디로 뮬딘은 과거 라무스가 품었던 욕망의 집합체.

“세월이 흐르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네. 그때부터 이건 아니다 싶어 황급히 뮬딘을 잘 이끌어보려고 했네. 헬릭과 뮬딘. 두 사람과 함께 세계를 둘러보고, 좋은 이야기들을 해주고…… 좋은 생각과 지혜들을 나누어주었네.”

그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아련한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씁쓸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슬프게 느껴졌다.

“헬릭은 나의 이야기들을 잘 받아들였네. 내 딸이지만 참 똑 부러지는 아이야. 하지만 뮬딘은…… 고개는 잘 끄덕이지만 그 속에 품은 마음이 다르다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지.”

“그의 마음을 고쳐먹는데 실패하셨군요.”

“뭐, 이래저래 알아보니 진짜 세계에서도 자식 농사는 대부분 망한다고 하더군.”

“어…… 대게 그런 셈이죠.”

카이는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실패할 뻔한 농작물이었으니까.

“그래서 뮬딘을 강제로라도 멈춰준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는 걸세. 그를 멈춰야 한다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차마 내 손으로 죽이지는 못하겠더군.”

“하지만 헬릭 님도 당신의 딸 아닙니까?”

왜 뮬딘이 그녀를 죽이려고 한 짓은 방관했냐는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애초에 왜 헬릭 님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은퇴하지 않으신 겁니까. 깔끔하게 그녀를 후계자로 지목했다면, 뮬딘도 욕심을 접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카이가 따지자 라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어리석은게지. 떡은 이미 있지도 않은데, 먹겠다고 줄을 서고 있으니까.”

“……예?”

“후계자라는 거. 지목을 안 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고, 쟁취하라는 뜻 아니었습니까?”

“쯧쯔. 그게 아니다. 지목할 필요가 없으니 하지 않은 게야.”

라무스가 고개를 돌려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모험가. 진짜 세계의 거주자들이 이 세계에서 활약을 하면 할수록, 시스템에 불과한 신들이 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 걸세. 앞으로는 모험가라 불리우는 존재들이 조각난 퍼즐들을 맞춰나가는 것뿐. 이미 이 세계는 나의 손에 의해 대부분 완성이 되어버렸네.”

“……한마디로, 더 이상 주신이라는 역할은 필요가 없다?”

“정확하네. 신의 개체 수가 줄어든다는 소리는 이오스에게 들었던가?”

“예. 그가 말하더군요. 신을 믿는 주민들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고.”

“스스로의 역할이 끝났다고 느낀 신은 자가소멸하기 마련이야.”

“세계는 이미 완성되었다라…….”

뮬딘은 그것도 모르고 주신의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 수만 년간 발악을 해온 것이다.

그것이 웃기면서도, 안타까웠다.

“욕심이란 알면서도 모르겠군요.”

“그게 욕심인게야. 품는 순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거든. 제 딴에는 멀리 내다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우물 안에서 코앞을 보느냐, 우물벽을 바라보냐의 차이 정도지.”

오해가 풀린 카이는 힘 빠진 목소리로 따졌다.

“그럼 하다못해 뮬딘이 헬릭 님을 죽이려고 할 때, 그거라도 막아주시지.”

“그러려고 했네.”

라무스가 툭, 문장을 뱉어내듯 말했다.

“죽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 이러나저러나 살려둘 생각이었어. 훗날 태양교 재건에 대한 에피소드와 연결시키려면 말이지.”

“어? 그건 짐 박사님이 하신 말한 내용과 다르군요. 그는 헬릭 님이 시나리오상 죽는다고 말했는데…….”

“그거야 내 마음 아닌가.”

라무스의 당당함에 카이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세계에서 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은 없네. 자네가 삭제시킨 모든 에피소드와 퀘스트들. 가이드라인만 진짜 세계의 주민들이 잡아줬을 뿐, 세부 사항은 모두 내 손을 거쳤어.”

“크흐흠.”

여태까지 자신이 지운 퀘스트가 10만 개는 가볍게 넘는다.

그것을 직접 만들었다는 당사자 앞에 앉아있으니, 괜히 제 발이 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뭐, 결과적으로 뮬딘이 사라짐으로써 세계에 평화는 찾아왔군.”

“그럼 이제 헬릭 님은 안전한 것 맞지요?”

“음. 그야 안전하겠지.”

라무스의 확답을 들은 카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 뒤에 사족이 붙었다.

“봉인된 신을 건드릴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말일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헬릭은 현재 봉인당한 상태 아닌가. 물론 스스로 봉인한 거지만 말이야.”

“모든 일이 끝나면 제가 깨워드리기로 했습니다.”

카이의 말에 라무스가 코웃음을 터트렸다.

“이보게. 세상 일이라는 게 그리 쉽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야. 내가 괜히 태초에 빛과 어둠의 신을 만들었겠어? 당연히 그 둘이 가장 중요한 존재이니 먼저 만든 것이겠지?”

“그 말씀은…….”

“이 세계를 떠받들고 있던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무너졌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나.”

“설마, 세계의 붕괴?”

라무스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들었다.

“역시 똑똑하군. 본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훌륭해.”

“잠시만요. 그런데 세계의 붕괴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요?”

“헬릭이 멀쩡히 돌아다닌다면 그렇겠지. 허나 지금 그녀는 봉인 당한 상태 아닌가. 지금 이 세계엔 빛의 신도, 어둠의 신도 없네.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사라진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두 개가 한 번에 사라지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쿠웅!

카이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자, 라무스가 그를 진정시켰다.

“진정하게.”

“지금 진정하게 됐습니까! 제가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헬릭은 무사할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화를 억지로 가라앉힌 카이가 묻자, 라무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설득했다.

“현재 이 세계는 안정이 필요해. 뮬딘의 부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지.”

“그래서 얼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겁니까.”

“나야 모르네. 중요한 것은 세계가 안정되면, 그땐 헬릭이 봉인에서 깨어나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거지. 내가 그 시간동안 세계의 법칙을 좀 수정해 놔야겠지만.”

“지금 당장 수정하면 안 됩니까?”

“이 사람아. 그게 말처럼 쉬운 거였으면 지금 입 아프게 이러고 있겠나?”

라무스의 타박에 할 말을 잃어버린 카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그가 살짝 걱정된 음성으로 질문했다.

“시간은…… 어느 정도로 보고 계십니까.”

“모르네.”

라무스가 딱 잘라 말했다.

“알다시피 나는 주신의 자리에서 은퇴한지가 제법 되지. 늘그막에 이게 무슨 짓인지 원. 정확한 건 해봐야 알걸세.”

“1년 정도 걸릴까요?”

“그보다는 더 쓰게. 최소 뒤에 0 하나는 더 붙여.”

하아, 카이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군요.”

“인간에게는 긴 시간일 게야. 솔직히 말하면…… 아마 못 기달릴걸세. 인간은 변덕쟁이니까.”

라무스가 도발하듯 건넨 말에 카이는 대꾸조차 안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만약 자네가 원한다면…….”

항상 당당하고 여유로워보이던 라무스가 말끝을 흐렸다.

“뭡니까, 하고 싶으신 말이.”

“……만약 자네가 원한다면, 헬릭의 기억을 조금 수정해 줄 수 있네. 처음부터 자네라는 존재를 모르는 상태로 말이야.”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헬릭이 상처를 입을 일도 없다.

반대로 카이가 그녀를 기다린다고 시간을 허비할 일도 없다.

라무스는 나름대로 카이를 배려해서 꺼낸 제안이었다.

물론, 카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로. 그녀의 기억에 티끌만한 부분도 손대지 마십시오.”

“쩝. 우리 헬릭이 상처 받겠군.”

라무스는 헬릭이 눈을 떴을 때, 큰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에겐 너무나도 긴 시간이 될 것이 분명했으니까.

“약속, 했으니까요.”

담담하게 말을 내뱉은 카이는 잠시 후 라무스와 헤어졌다.

뮬딘 교와의 전쟁에 대한 뒷수습을 하고, 자신의 왕국과 도시들을 정비했다.

쉴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릭은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언제쯤 일어나시려나.”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따끈따끈한 과자를 사들고 천상의 정원에 방문하는 것이 그의 하루일과가 되어있었다.

왠지 그곳에 가면 헬릭이 돌아올 것 같아서.

당장이라도 과자를 달라고 징징거리며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물론 추억에 젖은 기분뿐이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일 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헬릭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로부터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1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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