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산파.
소나무로 둘러싸인 절벽 위에 놓인 비무장.
해도 뜨지 않은 시간의 비무장에는 척 보기에도 대접받지 못하고 자란 듯 낡디낡은 의복을 입은 소녀 한 명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제 1식, 매화노방. 제 2식, 매화접무.”
그 검마저 이가 다 빠지고 낡은 데다, 소녀의 손아귀와 키에 맞지 않는 거대한 검이었다.
“매화낙락, 매화혈우.”
휙!
소녀의 손이 움직였고, 제 키보다도 큰 검이 부드럽게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그어져 내렸다.
검식 그대로, 떨리는 검 끝이 마치 매화를 그려 내듯 했고, 아이가 딛는 발과 손의 궤적이 마치 나비가 춤을 추듯 사뿐했다.
“제 24식, 매화만리향.”
고작 열네 살의 소녀가 검 끝으로 힘겹게 펼쳐 보인 마지막 초식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어설프게 그냥 그려 낸 것이 아니라, 극성에 가깝게 수련한 것인지 아이가 그린 검의 궤적에서는 짙은 매화 향이 피어났다.
허공을 수놓는 매화꽃, 짙어지는 향 속에서 여자아이가 번뜩 눈을 떴다.
검 끝이 그린 수십 개의 꽃의 흔적 속에서 그녀는 살금살금 웃었다.
얼굴에 엉망으로 묻어 있는 검댕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말라깽이 여자아이는 기묘할 정도로 온화해 보였다.
“됐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몰래 연습해야 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빠른 성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거라면…… 이 정도라면 이번에야말로 칭찬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모처럼 소녀의, 도화의 심장이 뛰었다.
도둑 수련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나이가 많은 장문인들도 매화만리향의 초식에서 꽃향기가 풍기기는 쉽지 않다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제대로 된 무인 취급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뿌듯함에 벅차오른 가슴을 안고 흐뭇하게 검을 검집에 밀어 넣는 순간, 그녀는 몸을 휙 돌렸다.
누군가 보고 있었다.
새벽의 어스름 속, 큰 소나무 아래 서 있던 것은 화산파의 수제자 후였다.
후는 여자아이를 쏘아보며 짓씹듯 중얼거렸다.
“……네가 기어코 오의를 깨달았구나.”
새벽부터 살금살금 나와 도둑 수련을 하고 있던 여자아이, 도화는 눈을 아래로 내려 떴다.
“……사, 사형. 잘못했습니다.”
“사형? 누가 네 사형이지? 하…… 끈 떨어진 계집애 주제에 무림인이 되겠답시고.”
“사형…… 하지만…….”
“말대답을 해?”
커다란 짝 소리와 함께 도화의 뺨이 홱 돌아갔다.
아직 너무 어려서, 제 손으로 겨우 뺨을 다 덮을 수 있는 어린아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였다.
솔직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더 큰 벌이 있을 테니까.
“앞으로 다시 한번 검을 든 게 눈에 띄면, 네 팔은 내가 분질러 놓을 테니 그리 알아. 애미 애비도 없는 년이, 어디서 감히 주제넘게 화산파의 검법을 넘봐?”
후가 다시 한번 도화의 뺨을 후려치고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도화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를 욕하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돌아가신 제 부모님을 욕하는 건, 그것을 견디는 것만은 할 수가 없었다. 제 부모를 욕해도 좋은 사람은 저뿐이었다.
비록 제가 사생아라지만 어머니는 정사대전에서 화산파를 위해 사력을 다하다 돌아가셨다 들었다.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
이를 악다문 도화가 평소답지 않게 참지 못하고 후를 바라보았다.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매일매일 앞마당에 쌓이는 솔잎도 다 쓸고, 사형들 밥도 제가 다 짓고, 마루도 다 닦는걸요? 저 혼자 그걸 다 하면, 새벽에 비무장 정도는 써도 좋다고 하, 하셨잖아요! 비급고에 있는 비급들도 마음껏 보라고 하셨잖아요!”
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화를 쏘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드리웠다.
비급들을 정말 이해할 줄 알았으면, 그걸 보라고 했겠는가?
제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는 계집아이의 성취를 보고 있자면, 속이 드글드글 끓었다.
저보다 열 살이나 어린데 벌써 제가 닿은 적도 없는 경지에 닿은 걸 장문인이 아신다면, 계집인데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정식 제자로 거둬들일지도 모른다. 아니, 후계자로 지명하실지도 모른다.
반편이. 사생아. 그렇게 쓸모없는 저 더러운 핏줄을.
그 꼴만은 못 본다.
후는 도화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는 후의 기세에 눌려 도화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뒤로 물러났다.
“내가 그래도 그간 네가 이리 천방지축으로 굴어도 내버려 두었는데, 이렇게 네가 나를 우습게 봐?”
“……그런 게 아닙니다.”
“네가, 감히. 내 성취가 모자라다 이건가? 그래서 우습나?”
“제, 제가 언제 그런 말을 드렸습니까?”
투둑.
발아래에서 자갈 떨어지는 소리에 옆을 돌아본 도화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는 벼랑.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였다.
마교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입이 어려운 높은 산에 거취를 정한 화산파에는 이런 낭떠러지가 많았다.
언제 끝에 내몰렸을까?
“위, 위험하지 않습니까?”
도화가 인상을 찌푸리고 후의 옆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후가 사정없이 도화를 떠밀었다.
하나 도화의 성취가 훨씬 더 높았다.
도화는 제 생명이 달린 순간에도 얻어맞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느리게만 보이는 후의 손을 잡아채고, 그 팔 위를 사뿐히 딛고 위로 뛰어올랐다.
“어딜 감히.”
그때 후가 손에 내공을 감아 그녀의 발목을 잡아 집어던지듯 아래로 내려찍었다.
정말로 누군가 저를 죽이려 드는 순간 자체를 예측해 보지 못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을 거다. 그것도 매일같이 같은 문파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매일매일 노력으로 삶을 점철해 가며 살았던 탓에, 노력보다는 질투로 눈이 먼 사람이 있을 거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게 실수였을 거다.
그리고, 아침부터 가진 내력을 모두 다 수련에 쏟아부어 남은 내공이 없는 것도 실수였을 거다.
도화는 절벽 아래로 제가 떨어지는 것을 멍하니 관조했다.
저 멀리 저를 내려다보는 후의 얼굴에 징그러운 환희가 번지는 것도.
절벽 아래에 떨어진 도화는 숨만 붙은 채로 발견되었다.
다리도 단전도 완전히 망가지고, 심지어는 말조차 할 수 없는 반 시체가 된 그녀를 본 이들은 경악했지만 그녀의 사연을 알아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을 더 살았다.
혼자 속으로 비급을 줄줄 외우는 것과 몇 개의 병상을 함께 돌보는 여자아이가 읽어 주는 책의 이야기를 듣는 게 그녀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녀는 그러다가, 4월 초, 지독히 느리게 지는 매화 꽃잎처럼 져 버렸다.
“아이야, 가자.”
죽음이 찾아왔다 생각한 순간에 들려온 목소리에, 도화는 질끈 감은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검은 갓에 검은 도포를 두른, 사이한 형상의 사내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뻔한 모습이었으므로, 그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신?”
“그래.”
도화는 제 시신이 침상에 누운 광경을 멍하니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기가 막혀.’
도화는 죽어서도 그런 생각밖에 안 들었다.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안 따라오고 뭐 하느냐?”
눈앞에서 앞장서서 걷다가 그녀를 돌아보는 큰 갓을 쓴 사신을 향해 빽 고함을 질렀다.
“아, 나 이런 식으로는 못 죽어요!”
“……뭐라고?”
“아니, 그렇잖아. 일평생을 이렇게 천대받다가 죽었어요. 숨어서 그렇게 열심히 수련한 무공이 이제 빛을 보나 했더니 죽었다고요. 어디 한번 써 보지도, 자랑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감정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사신이 한숨을 쉬었다.
“본디 삶이 그런 것이다. 남은 여한이 없는 사람이 어딨겠느냐?”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뭐가 그렇게?”
도화는 악다구니를 썼다.
“삶에 좋은 구석 한 번은 있어야죠? 나는 태어나서 바로 엄마를 잃고, 사생아라는 이유로 평생을 대접 못 받고 살았어요. 이딴 식으로 살다가 멍청이 놈한테 살해당해 죽는 운명이 어딨어요?”
사신이 뭐라 더 말을 하려다가, 어리디어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렇잖아요. 남들은 부모 사랑도 받으며 자라잖아요. 나는요? 나는 왜 그런 거 한번 못 겪어 보고 살아야 해요? 당신이 말하는 운명이 그런 거예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 그런 거냐고요.”
“아이야.”
“왜?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내가 얼마나 노력하면서 살았는지 알아요?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했어요? 당신네들이 정해 준 삶의 굴레 안에서 내가 더 어떻게 해야 했어요? 당신들이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신이 없었다면 차라리 이해나 해요.”
“아이야.”
“왜 자꾸 불러요!”
온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온몸으로 눈물을 토하는 아이의 모습은 사신이 보기에도 측은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많은 죽음을 보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죽음은 마음을 시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삶을 조금이라도 더 살았다면 모를까.
아직 이 아이는 제가 안은 부당함을 모두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고, 그게 너무 가엾었다.
사신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아이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머릿속으로 다른 이세계의 수레바퀴들을 그려 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넓은 갓 아래로,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진 얼굴이 찬찬히 도화의 얼굴을 살폈다.
“그렇다면, 다른 기회가 있다면 살아 보겠느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도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에 반짝 빛이 돌았다.
“다른 삶? 어떤 삶인데요?”
사신은 한숨처럼 하늘을 향해 긴 숨을 토하고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너처럼 삶을 아쉬워하는 이도 있지만, 주어진 삶도 다 채우지 못하고 놓아 버리고 싶어하는 이도 있다. 그 삶을 이어 살아 보겠느냐?”
“……그게 대체.”
“조부모와 부모가 있긴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긴 힘들고. 주어진 그릇에 비해 너무 무거운 삶의 무게에 버거워하다 스러지고 있는 어린 꽃이 있다.”
도화는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남의 삶을 빼앗는 건, 남의 기회를 박탈하는 건 아닐까 눈을 끔벅이고만 있는 그녀를 보고 사신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너는 그리 지치는 삶을 살았는데도, 이리 영혼이 맑구나.”
“……네?”
“누구의 것도 빼앗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아이는 삶을 놓아 버렸다. 네가 가지 않으면 영혼을 잃은 몸은 그저 죽음을 향할 뿐.”
“……그래요? 그러면, 제가 갈래요! 갈래요, 가 볼래요.”
“그러겠느냐?”
“사랑받지 않으면 어때요? 부모가 있는 게 어딘가요? 난 그게 내도록 부러웠는걸.”
“삶의 무게가 쉽지는 않을 텐데.”
“삶이 있는 게 어디에요.”
당돌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
도화는 제게 가까이 다가온 사신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러면 네 마음대로 살아 보거라. 또 길지 않은 삶으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그때 또 보자꾸나.”
“근데 정말이에요?”
“속고만 살았구나.”
사신이 손에 쥐고 있던 두꺼운 명부를 들어 그중 한 장을 찢더니, 소매에서 꺼낸 다른 명부에 끼워 넣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시야가 흐려졌다.
“고…… 마…… 워요.”
도화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면서, 평생 처음 저를 연민해 준 이가 고마워 저도 모르게 감사의 인사를 입에 올렸다. 설령 사신이라 할지라도.
‘……흡!’
도화는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뿐.
하지만 물속에 빠져 있다는 것은 지독하게 숨통이 조여 오는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