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화는 최대한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혔다.
아무래도 몸이 뻣뻣해지는 것이, 팔에 쥐라도 난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차분해지려 애를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에는 크고 작은 장식들이 줄을 지어 있었고, 발아래에도 동전들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우물 같은 곳인가 본데?’
발이 닿는 것은 어림도 없을 정도의 깊이였지만, 물살 없이 고요한 것을 보니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임에는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도화는 더 이상 발버둥을 치지 않고 몸을 차분히 아래로 가라앉혔다.
자꾸만 숨이 답답해져 오는 것에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산파는 높은 산에 있었지만, 물장난을 칠 곳이라면 많았다. 무림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자란 도화는 온갖 위험한 물장난을 다 해 본 경력이 있었다.
‘됐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그녀는 양발로 최대한 힘차게 바닥을 걷어찼다.
한번 제대로 방향을 잡자, 그 뒤는 쉬웠다. 양발을 부드럽게 번갈아 움직이자 수면이 가까워져 왔다.
빛이 바로 코앞에서 일렁였다.
푸하!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갈급하게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와르르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도화는 물미역처럼 자꾸 늘어지는 제 머리카락을 걷어 내며 분수 장식을 움켜쥐고 물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착각이라 생각했지만, 제법 귀티 나는 옷을 입은 아이들은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방금 막 죽을 뻔했던 자신을.
“으하하하, 쟤 좀 봐. 멍청이 샬롯 세티야!”
“죽는다더니, 기어 나올 줄 알았다.”
“크크크, 죽지도 못할 거면서 들어가긴 왜 들어가? 분수대 물만 짜졌겠네.”
“쫄보 계집애가 괜히 관심받으려고, 크크크, 너무 웃기네.”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온통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낑낑거리는 꼴은 누군가에겐 퍽 재밌는 장난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는 그저 귀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보다, 차갑게 젖은 옷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더 낯설었고 더 생경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랗게 칠해진 하늘이 거기 있었다.
다시 한번 흠뻑 공기를 폐로 받아들였다.
‘아…… 바깥 공기. 일 년 동안, 내도록 그리워했던, 그 공기야.’
새파란 하늘, 인공분수, 모양을 내어 다듬은 정원수들.
그리고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팔과 다리.
“……하하.”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아서, 도화는 억지로 웃었다.
그녀는 분수에 손을 갖다 대었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물줄기는 이 모든 것이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이것은 꿈도, 무엇도 아니다.
문득 시선이 분수에 비친 얼굴에 닿았다.
무림에는 없었던 분홍색 머리카락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부드러운 연두색의 눈동자도.
귀엽고 포동포동한 얼굴은 고작 여덟에서 열 살 사이로 보였다.
열네 살에 병상에 드러누워, 열다섯 살 생일에 절명한 도화의 얼굴이 아니라.
‘……이게 내 얼굴이라고?’
순간 방금 들었던 이름 ‘샬롯 세티야’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제가 병상에 누워 있던 시절 병상을 지키던 아이가 내도록 읽어 주었던 어떤 책의 내용도.
그리고, 사신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의 표지도.
<서방환상연애소설전집11-순애보 공주님은 사랑받고 싶어!>
‘……뭐야, 정말 그 책 속의 샬롯이 된 거야?’
무림에서는 온갖 기연이 있다.
하지만 죽으면서 얻은 기연이, 책 속의 조연이 되는 거라니.
그것도, 사고뭉치에다 인정받지 못하는 조연이.
도화는 책 속에 들어왔다는 놀라움보다 제 신세가 그리 나아지지는 않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 책의 주요 내용은, 체이커 국의 3황자를 사로잡고 싶어서 체이커 국을 정벌하기까지 하는 이웃 나라 세레스 국 공주님의 못 말리는 사랑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샬롯이라는 인물은 여자 주인공인 공주님이 속한 나라의 인물이 아니라, 정벌당하는 체이커 국의 사람이다.
그것도, 체이커 국 2대 기사단을 이끈다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라를 이끌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서 능력 없는 2황자에게 줄 서는 세티야 공작가 소속의.
심지어는 그 보는 눈 없는 공작가에서도 재능을 발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눈 밖에 나서 무시당하기만 하는…….
‘……하필 이런 조연 중의 조연 꼬맹이가 되다니.’
멍하니 책의 내용을 떠올리는데,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어이, 샬롯. 지금 내 말 무시하냐?”
“샤를로테, 란슬롯 님이 부르시잖아!”
“야!”
도화는 저를 향해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아이들의 정체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주변엔 공작가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샬롯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다. 샬롯이 어리기도 했지만 가문에서는 내놓은 아이 취급당하는 샬롯만큼 쉬운 놀잇감도 없으리라.
‘굳이 저런 아이들의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어. 한심하긴.’
그녀가 요란한 고함 소리들을 무시하며 새파랗게 질린 제 얼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는데 물속에 뭔가가 비쳐 보였다.
제 바로 뒤에 선 어떤 남자아이의 얼굴이었다.
우유보다 흰 피부, 흑단보다 까만 머리카락, 매화보다 붉은 입술.
사내아이의 얼굴이 뭐가 저렇게 고울까.
너무 고와서, 마음이 술렁일 정도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그 사내아이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왜, 요제프 황자가 널 구해 줄 것 같냐? 똑같은 것들이면서.”
비웃는 소리가 날아들고서야, 샬롯은 놀라서 몸을 뒤로 돌렸다.
‘요제프 황자라고?’
물을 통해 바라볼 때는 몰랐는데, 직접 눈으로 그 모습을 담자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요제프 황자는, 정원 가운데 놓인 커다란 나무에 묶여 있었다. 무릎부터 목 아래까지가 칭칭 감겨 있는 모습으로.
게다가 워낙 의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쉽사리 눈치채기 어려웠지만, 드러난 종아리나 손등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것으로 봐서 몸 상태가 엉망진창일 게 눈에 선히 보였다.
그녀는, 전생에 워낙 괴롭힘을 당하며 살았기에 그런 부분들을 남들보다 훨씬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요제프 황자를 도대체 누가?’
마음이 콱 하고 시려 왔다.
요제프 황자는,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다.
소설 속의 그는 이렇게 어린 모습이 아니라, 완전히 장성한 사내였다.
적국의 장수 중 누구와 붙어도 지지 않을 정도로 검을 잘 쓰고, 그 누구와도 논쟁에서 지는 법이 없을 정도로 똑똑한.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내내 궁금해했었다.
황제가 죽고 2황자가 황위를 물려받은 뒤, 체이커 국의 모습은 지옥도로 변한다. 백성의 골수까지 빨아먹는 지독한 통치 속에서, 나라가 무너질 무렵이 되어서야 신하들은 3황자를 찾아 황위에 추대한다.
하지만 그는 피에 미친 미치광이처럼 황족을 몰살시키고서야 민생을 돌본다. 그러곤 나라가 안정을 되찾자, 이상하리만큼 미련 없이 방계의 혈족을 찾아 황위를 물려줘 버리곤 홀연히 떠난다.
마치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한 사람처럼.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전장에 서지만, 전쟁터에서 쓰러진 뒤로 그대로 공주님에게 납치당해, 이웃 나라 세레스의 공주님이 집착하는 메인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정말로 궁금했었다.
대제국의 공주는 저를 돌아보지도 않는 요제프 황자에게 그토록 집착하는데,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한 남자가 도대체 왜 황위를 그리 쉽게 포기했는지.
황실의 다른 이들을 왜 그렇게 독하게 학살하듯 죽여 버렸는지.
그런데 이제 그 답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 속에선 서술되지 않았던, 황자의 어린 시절이 이랬구나.’
툭.
그때, 요제프 황자의 발치에 돌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샬롯은 고개를 홱 돌려 돌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제가 물에 빠진 것을 비웃었던 아이 무리들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척 보기에도 제일 힘이 세 보이는 남자아이가 돌멩이를 받아 드는 모습도.
란슬롯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사람을 향해 던지는 것이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손에 쥔 돌을 주저 없이 던졌다.
돌은 아이의 손바닥 반만 한 크기였다.
가만히 두면, 요제프 황자가 정통으로 맞을 게 틀림없었다.
샬롯은 저도 모르게 반 발짝 발을 옮겨 요제프 황자와 란슬롯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러곤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탁.
궤도가 정확히 읽힌 돌이 그녀의 손 안으로 빠져들 듯 들어갔다.
내공은커녕 외공조차 수련하지 않은 몸이라, 손아귀가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눈만은 정확했기에 돌을 정확히 잡아낼 수 있었다.
란슬롯이 던진 돌이 샬롯에게 잡히는 순간, 왁자지껄 떠들며 웃어 대던 아이들 사이에 순간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곧이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놀란 시선이 샬롯에게 와르르 들러붙었다.
“……와.”
“이게 어떻게…….”
“란슬롯, 너 지금 고작 샬롯한테 잡힌 거야?”
하지만 한 차례 놀랐던 아이들은 다음 순간 사나워진 분위기를 읽고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뭘 한 거지, 샬롯? 황자님께서 손수 우리에게 3황자 전하를 교육해 달라 명하신 건데, 네가 뭔데 끼어들지? 같은 꼴이 되고 싶어서?”
지금 협박하는 건가?
하지만 어떤 이유든 상관없었다.
그냥 이젠 그런 것들이 지긋지긋했다.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거.
힘센 사람 여럿이 약한 사람 하나를 집단적으로 괴롭히면서, 주위의 도움조차 받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
제가 그 약자의 지위에 놓여 있었던 적이 있었기에 안다.
그게 얼마나 지독하고, 사람을 피 말리는 일인지.
샬롯은 입술을 비죽이 당겨 웃었다.
“해 봐.”
“뭐……?”
“같은 꼴이 되게 한다고?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해 보라고.”
샬롯의 또랑또랑하고 당당한 목소리에, 지금까지 한 번도 표정이 나타난 적 없었던 3황자의 새카맣던 눈동자가 일렁였다.
아주 깊디깊은 호수에, 한 방울의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