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남매간의 우애가 썩 좋군.”
그 얼어붙은 정적 속에 툭 던져진 말은,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샬롯의 귀에 정확히 들어왔다.
워낙 모두가 입을 벌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정적 속이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놓칠 수가 없었다.
‘……뭐지?’
지금까지 들었던 귀족들의 반응들은 모두 의외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건 평소에 서늘하고 다가가기 힘들었던 아이작이 보이는 새로운 면모에 대해 좋은 쪽으로 놀라는 것이었지, 결코 부정적이진 않았다.
그건 체이커 국에서 2개 명문 기사단을 운영하는 세티야 가문에 대해 모두 호의적으로 생각하며 기대를 걸고 있다는 반증일 거다.
후계자로 낙점된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작이 보이는 기행에 대해서, 다들 저렇게까지 관심을 보인다는 건.
그런데 지금 들린 청아한 목소리는, 어딘가 비꼬는 듯한 구석이 있었다.
샬롯은 아이작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키가 6척…… 아니, 190이 넘는다고 표현하던가? 아무튼, 안긴 건 별로지만 높은 곳에서 보는 건 좋군.’
샬롯은 속으로 아이작의 근육뿐만 아니라 키에도 부러움을 표하며, 넓디넓은 연회 홀을 샅샅이 눈으로 훑었다.
오래지 않아, 그 말을 한 장본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최대한 자신이 돋보이려 하는 이 연회장에서 단 한 명, 이질적으로 모두에게 무관심한 눈을 하고 앉아 있는 흑발의 소년.
저번에 만났을 때부터, 어린 소년이라기엔 너무 지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소년.
단 한 순간에도 시선을 사로잡는, 인형같이 아름다운 아이.
흑단 같은 머리카락, 백옥같이 고운 피부, 매화처럼 붉은 입술. 세티야 가문의 사내들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느껴진다면, 이 아이는 너무 치명적으로 아름다워서 그게 더 위태로워 보이는.
요제프 황자였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샬롯과 요제프의 시선이 맞닥뜨렸다.
샬롯을 알아본 듯, 요제프 황자는 뜻 모를 시선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하지만 그 시선의 교환도 짧디짧게 끝났다.
요제프에게 누군가 다가가 말을 걸자, 요제프는 마치 제 시선을 숨기기라도 하는 듯 재빨리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요제프, 황궁 연회에 왔었구나! 그런데 이 기는…… 대체 뭐야.’
그녀는 아이작의 품에 안긴 채로 멍하니 굳어 있었다.
지금 그렇게 잠깐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 몸속의 기가 끓었다.
그 감각은 너무 강한 고수를 만났을 때 느끼는 호승심과도 닮아 있었다.
이런 느낌을 저번에 만났을 때는 받지 못했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남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내공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저 아이, 토할 것처럼 기가 짙어. 저걸, 저 나이에 감당할 수 있어?’
마치 사파의 내공을 익힌 사람과도 같았다.
단기간에 내공을 쌓기 위해 고안된 사파의 심법은, 정파가 사용하는 심법과 반대로 기를 주행시키는 등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내공을 축적한다.
장점은, 빠르게 고수가 될 수 있다는 거고…….
단점은…….
‘……요제프, 저대로라면 주화입마에 걸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는 여기, 이 세계에서는 내공을 쌓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몸을 막 굴렸길래 몸이 저런 지경이 되었을까?
아직 지독하게 어린데, 대체…….
샬롯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
‘책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자주 앓는 황자님으로 나왔지. 가끔 이성을 잃을 정도로 아파서, 대회에서도 쓰러졌다고 했지. 그리고 체이커 국이 습격당했을 때도 전장에 나섰다가 쓰러졌다고 나왔는데…… 그게 저거였어?’
나는 무슨 다른 지병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저렇게 기의 흐름이 엉망이 된 상태일 줄이야.
저래서는, 검이고 뭐고 쓸 수 없을 거다.
아니, 오히려…… 검을 쓰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울 뿐일 거다.
사파에서도 처음에는 기이한 방법인 마공으로 기를 쌓고, 나중에는 오히려 다시 정상적인 정파의 내공법을 따르려 한다.
그런 만큼 몸에 쌓인 기운이 정순하지 않으면 수련을 거듭할수록 몸이 망가진다.
아마 그런 것과 비슷한 상태일 것 같았다.
이렇게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이 이렇게까지 엉망이라면.
‘여기까지 따라오길 잘했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역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샬롯은 3황자에게 다시 시선을 보내다가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아차.’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뻔히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던 3황자가 어디론가 가 버렸는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샬롯의 놀이 친구. 란슬롯이 속해 있는 무리의 아이들도 그 기행의 현장에 서 있었다.
그래도 제법 지체 있는 가문 출신의 아이들이라, 왕궁 무도회에 참석해서 눈도장을 찍어 둬야 하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샬롯에 대해 정말 잘 아는, 샬롯의 놀이 친구인 그 아이들은 다른 어른 귀족들보다 몇 배는 더 놀라서 종알거려 댔다.
“……세상에. 지금 우리가 뭘 들은 거야?”
“야, 란슬롯. 샬롯이랑 아이작 형님이 같이 계시는데……?”
“같이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작 형님이 사과한 게 중요하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라 샬롯한테.”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야, 잘은 모르겠지만, 란슬롯 너도 샬롯한테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니냐?”
란슬롯은 입을 꾹 다물고 제게 속삭이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제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애들에게 화를 내기 이전에, 먼저 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게 급선무였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이지?’
아무리 세티야 가 방계 중 가장 똑똑한 제 머리를 맹렬하게 굴려 보아도, 그럴듯한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샬롯이 대체 누군가.
란슬롯 무리의 놀잇감이자, 그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쭉정이가 아니던가.
오러를 쓸 수 없는 세티야 가문이라니. 세티야 가문에서도 그녀를 반쯤 내쳐 둔 거나 다름없었으니, 저희들이 그녀를 데리고 그렇게라도 놀아 준 건 샬롯에겐 고마운 일이었다.
……지금까진.
지금까진 그랬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농담이라곤 할 줄 모르는 아이작이 저런 말을 한다고?
‘……왜?’
왜 그러는 거지?
란슬롯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념에 잠겨 있는데, 눈치도 없는 친구들이 그를 둘러싸고 다시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저번에 샬롯이 물에 빠진 뒤로 못 만났잖아. 그 시간 동안 뭔가가 바뀌었나 본데……?”
“사실 그때 무슨 일 있었는지, 세티야 작은 가주님이 알아보고 다니셨다고 들었어.”
“……뭐야? 우린 잘못한 거 없잖아.”
“그래. 샬롯이 알아서 분수에 빠진 거지, 우리는 뭐…….”
샬롯이 거의 죽다 살아난 것을 알면서도 서로 재밌다고 낄낄거렸던 게 기억난 아이들의 목소리가 한껏 풀이 죽었다.
“그런데 우리도 우리지만, 진짜 잘못한 건 란슬롯이긴 해.”
“맞아. 란슬롯은 돌도 던지고…….”
“그런데, 돌 맞진 않았으니까 괜찮지, 뭐.”
“……그런데 다시 생각해 봐도 이상한 사건이었단 말이야. 란슬롯의 힘이 약한가?”
란슬롯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정신 나갔어?”
그제야 다른 아이들이 란슬롯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내가 누군지 몰라? 샬롯 녀석이 아이작 형님이랑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일시적인 거겠지. 너희도 알잖아? 샬롯이 어떤 다락방에서 지내는지.”
아이들은 란슬롯의 말을 듣고서는 서로의 눈을 흘끗흘끗 바라봤다.
“네 말도 틀린 건 아닌데…….”
“근데 샬롯이 너한테 반말할 때부터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지 않냐?”
“갑자기 능력이 발현했다든가, 그런 거 아닐까?”
“헛, 정말 그럴듯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 돌 으스러뜨리는 그게 가능해?”
란슬롯은 기가 막혀서 마지막 말을 꺼낸 두 아이를 향해 다시금 고함쳤다.
“그럴듯하다고? 그럴듯?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냐?”
하지만 평소처럼 제 말이면 껌벅 죽는시늉도 하는 아이들이, 지금은 샬롯과 아이작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서 제게 집중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눈치였다.
란슬롯은 속으로 혀를 찼다.
‘기가 막혀서…… 능력이 갑자기 발현을 해? 공작가의 재능이 어떻게 전승되는지 하나도 모르는 저런 비천한 놈들과 어울려 다닌 내 잘못이지.’
그건 아주 어릴 때 입증되는 거다.
없던 게 생기지도, 있던 게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무리 중에는 세티야 가 방계인 저에다 시안 공작가의 아들, 세티야 공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까지 불리는 탄티누스 후작가의 딸까지 있는데도 저런 소리가 나오는 게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한 번은 샬롯을 혼쭐내서 제 위치를 알려 줄 생각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분위기가 된 건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 나서지 않으면 제 실력을 의심받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었다.
란슬롯은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내가 한번 직접 알아봐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