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18)화 (18/123)

#18.

두 형제의 등쌀에 시달리는 요제프는 뭔가 제가 잘하는 것 하나를 만들어야 했을 거다.

그리고 그게 검이었을 테고.

마침, 주인공이니만큼 재능이 아주 탁월했으니…… 스스로를 여기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가능했겠지.

이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공을 다루는 법이 알려지지 않은 세계인데, 이런 식으로 몸이 엉망이 될 수 있는 것도…… 어마어마한 재능인 거지. 본능적으로 빠르게 강해지는 법을 알아낸 거잖아.’

이 세계에서는 기를 ‘오러’라고 불렀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말하는 ‘소드마스터’라는 게, 뭔지 정확히 몰랐는데. 요제프의 몸을 보니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기는 혈도를 따라 돌리며 운용하는 것인데, 이곳에서는 워낙 공기 중을 떠돌고 있는 기가 충만하다 보니 몸속 혈을 뚫지 않고도 그냥 자연의 기를 끌어 쓸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그게 자연스럽게 잘 이루어진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만, 무림인인 샬롯이 보기에는 그게 몸에 독을 쌓는 것처럼 보이기만 했다.

‘일단, 길을 넓혀 두자.’

등을 천천히 쓸어 내는 그녀의 손 위로, 불안정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운기조식을 통해 기를 받아들이고, 운기행공을 통해 몸속으로 기를 주행시켜 진기를 쌓아 가는 게 무림인들이 내공을 쌓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요제프는 제대로 된 운기조식도, 운기행공도 모르는 채로 그저 오러를 지나치게 많이 쓸 수 있게 된 거다.

그러다 보니 몸속에 있는 기운이, 마치 사파의 그것처럼 함부로 날뛰다가 이상한 기의 흐름을 형성해 버린 거다.

그래서 샬롯이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추궁과혈이라고 불리는 무림인들의 응급처치 수법이었다.

‘……당장 혈도를 넓혀 두면 어느 정도는 편해질 거야.’

샬롯은 엉망으로 망가져 가면서까지 하나에만 몰두해 온 그의 모습이, 어딘가 전생의 그녀를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믿을 이 하나 없어서, 그냥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제대로 됐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검에만 매달려 왔던 도화의 모습 같았다.

샬롯은 안타까움에 절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며, 손끝에 내력을 모았다.

하지만 요제프를 편안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단전 안에는 원하는 만큼의 내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 별것도 아닌 일들로 얼마 안 되는 내공을 이리저리 운용했던 탓이다.

‘……아차.’

도화가 가지고 있던 내력이었다면, 다른 사람의 진기를 안정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혈을 대신 타동해 주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샬롯이 된 지금은 달랐다.

샬롯은 손끝에 모여드는 실낱같은 내력이나마 부드럽게 운용하며 황자를 불렀다.

“요제프 황자님.”

“……왜?”

“지금 임시방편으로 몸을 잠깐 봐 줄 텐데, 아파도 좀만 참아 봐.”

“……무슨 소리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저리 가.”

“고집쟁이.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도 무리잖아. 그 주제에 대회에 나갈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 꿈도 크네. 아니, 이 몸으로 누굴 어떻게 이겨? 그냥 봐준다고 하고 얻어맞지나 말지.”

요제프의 짙고 검은 눈이 샬롯을 쏘아봤다.

“그딴 소리를 지껄일 생각이면…….”

그 목소리는 꽤 음험했지만, 도화의 나이보다도 두어 살은 어린 요제프는 샬롯의 눈에 그저 어린 소년처럼 보일 뿐이었다.

“안 할게. 안 한다고. 자존심 하나는 정말.”

샬롯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자존심이나마 강한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샬롯은 요제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력을 운용했다.

등을 천천히 쓸어 내는 그녀의 손 위로, 불안정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혈도라는 건, 여러 종류가 있다.

얼핏 생각하면 무공을 수련하는 자들만 있을 것 같지만, 일반인들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태어난 이후로, 익혀 먹는 음식인 화식을 먹거나 아프거나 등등의 이유로 혈도가 좁아지게 되는 거다.

지금의 경우는, 혈도가 좁아진 것과 더불어 너무 방대한 기의 흐름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혈도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기가 운용되고 있었다.

샬롯은 양손을 들어, 그의 몸을 부드럽게 풀듯 마사지하고 두드려 주었다.

추궁과혈의 하나인 권종지사의 수법이었다.

권종지사.

권.

전신을 주먹에 남은 조금의 기를 모아 일정한 힘으로 수백 번, 가볍게 두드리기.

종.

몸에 엉망으로 흐르고 있는 기의 흐름을 똑바로 되돌리기 위해 톡톡 두드리며 울림을 주는 것.

지.

손가락으로 다시 한번 수백 번, 기를 모아 두드리기.

사.

점혈을 이용해 기맥을 틔워 주기.

샬롯이 지금 가진 내력이 미진하여, 솔직히 그녀가 원하는 것의 반의 반절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샬롯은 내공이 바닥을 보이고 있음을 알면서도 시작한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 나갔다.

톡톡톡톡.

‘참, 무식하게도 수련했네. 기존의 혈도만으로 이만큼의 기를 쌓다니.’

내공을 통해 비인간적인 힘을 발휘하는 무림인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쓰는 혈도 이외에 다른 혈도를 뚫어 사용한다.

무림인들은 훨씬 더 많은 기를 끌어다 쓰는데,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기운인 선천진기만 왔다갔다 하는 혈도만으로는 길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많은 우회로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지금의 요제프는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길만 가지고 그렇게 많은 오러를 감당하고 있는 거다.

‘이 세계에서 오러를 혈도를 따라 돌리는 법을 아는 사람은 없던데. 아마,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력을 쌓는 법을 터득하다 보니 잘못된 방식을 익힌 걸 거야.’

어떻게 생각하면, 가르쳐준 사람도 없는데 몸속 길을 이용하다니.

‘괴물이지.’

샬롯은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다시 요제프의 등을 쓸며 혈도의 막힌 부분이 훨씬 넓어져 있음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아주 좁아져 있던 혈도가 뚫리니 기의 흐름이 훨씬 원활해져 있었다. 이 정도면 요제프도 편안하다고 느낄 게 틀림없었다.

반짝.

샬롯이 눈을 뜨자, 눈에 띄게 안색이 좋아진 요제프가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의심과 의문이 가득한 새카만 눈동자를 바라본 샬롯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긋 웃어 보였다.

“고마우면 밥 사.”

황자가 아주 오래 망설인 끝에 천천히 입을 열어, 혀끝에 의문을 올렸다.

“……넌 뭐지?”

“나? 나 샬롯이잖아. 에이, 저번에도 봤으면서.”

웃으며 가볍게 농담으로 넘어가려는데, 진지한 얼굴의 요제프가 샬롯을 빤히 쏘아보았다.

그러곤 요제프가 위로 손을 뻗어 샬롯의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손이 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살피더니 절대 우호적이지 않은 목소리로 협박하듯 읊조렸다.

“도대체 뭐냐고.”

“뭐가?”

“어떻게 한 거냐고. 아니, 그 이전에 뭘 알고 있지?”

“아…… 그건…… 글쎄. 소녀에겐 여러 가지 비밀이 있다는 것으로 해 두면 안 될까?”

대충 아무 말을 웅얼거리는데, 샬롯은 문득 시야가 기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앞이 검게 점멸했다.

‘……아, 이런.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기운을 다 써 버린 모양인데. 아직 내 몸 상태도 완벽하지 않은데…… 멍청이.’

샬롯의 눈이 가물가물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요제프가 그녀를 추궁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샬롯은 남은 기력을 모두 쥐어짜 생각나는 말을 모두 쏟아 냈다.

“나중에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내가 좀 더 제대로 손봐 줄게. 침도 없고, 뜸도 없고, 내공도 없어서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그보다, 내가 지금 기절할 것 같은데, 왕궁에 함께 온 가족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아. 부탁 좀…… 할게…….”

“……샤를로테?”

기우뚱.

속사포처럼 할 말을 다 쏟아 내기가 무섭게, 그녀의 몸이 휘청이며 바닥을 향해 고꾸라졌다.

‘풀숲인 데다, 앉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그런 허무한 생각을 하며 눈을 감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몸이 재빨리 샬롯의 상체를 받쳐 안았다.

그 몸에서는, 부드럽고 싸한 여름 들풀 향기가 풍겼다.

* * *

리카르도는 황좌 아래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또래에 비해서도 제법 몸집이 커서 할버드조차 쉽게 휘두르는 그가, 사나운 눈으로 상석에서 온 연회장을 쏘아보고 있는 모습은 꽤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측근들이 아무리 기분을 풀라고 달래 보아도, 리카르도의 기분은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2황자 리카르도였다.

그의 14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이번 황실 연회의 메인 주제였고, 리카르도에게 인맥을 쌓고 싶어 안달 난 사절들과 귀족들이 환담을 나누는 게 이번 연회의 메인 이벤트라 할 수 있었다.

샬롯의 등장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처음, 아이작과 샬롯의 등장으로 한번 파문이 일 때만 해도, 함께 환담을 나누던 귀족들의 관심을 모조리 뺏겨 버렸지만 그거야 뭐 워낙 의외의 사건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뭐냐고. 쭉정이 조합에 뭐 그렇게 관심 줄 일이야?’

리카르도의 시선은 저 멀리, 귀족들이 우르르 모여 서로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목을 빼고 있는 광경에 가 닿아 있었다.

그곳의 중심에는, 아까 지독히 눈에 거슬리게 굴었던 샬롯 세티야와 3황자 요제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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