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아이작은 요제프 황자를 슬쩍 바라봤다.
요제프 황자의 신병은 공식적으로 세티야 가문에 인도되어 있긴 했다.
대외적으로야 검술을 익히고 예를 배울 수 있도록 세티야 가문에 교육을 의탁했다는 명목이었지만 괜히 세를 불리지 못하게 감시하겠다는 게 주요 목적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을 요제프 황자는, 단 한 번도 세티야 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뭔가를 요청하거나 말을 섞으려고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샬롯에게 관심을 가진다라.
아이작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요제프를 관찰하는데, 문득 요제프 황자가 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쉬면 낫는 게 확실해?”
진료 도구를 정리하며 베티에게 뭔가를 당부하던 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확실하냐고.”
“아, 네, 그럼요. 그럼요, 황자님. 열도 없으시고, 기침도 안 하시고…… 곧 나으실 겁니다.”
“얼마나?”
“그게……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대략적으로는?”
“갑작스러운 나들이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너무 기운이 없으셔서…… 일주일 정도는 안정을 푹 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요제프가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샬롯의 방에 있는 보잘것없는 나무 의자에 값비싼 망토를 척 올려놓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조금 더 버티고 있다가 갈 모양이었다.
아이작은 묘한 눈으로 요제프를 바라봤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더니, 샬롯에 대해서는 어지간히 관심이 많은 모양이네…… 둘이 지금까지 친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툭.
‘이거 재밌군.’
아이작은 픽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벤이 당황한 얼굴로 ‘안정을 취하셔야 하니, 해가 저물기 전에는 일어나 주십시오…….’ 하고 당부했지만, 정작 방을 나선 사람은 제롬 하나뿐이었다.
제롬이 한 생각이라곤 워낙 화려한 구성이 한 방에 다 모여 있어서 그런지, 문득 샬롯의 방이 너무 초라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 * *
그날 이후로 샬롯은 사흘을 끙끙 앓았다.
3황자 요제프는 그 뒤로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사흘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아무리 같은 가에 머무르고 있다지만 그건 꽤 이례적인 행차였다.
세티야 가문이 완전히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적이야 없었다. 하지만 1, 2황자의 어머니 황후 셀렌이 세티야 가문의 오랜 연맹인 탄티누스 후작가 출신이었다.
당연히 2황자 리카르도와 세티야 공작가의 유착 관계는 천명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3황자 요제프 베로스 체이커가 어려서 잘 모른다고는 하나, 지금까지 그 어떤 가문과도 인맥을 만들지 않고 혼자 고고하게 지내 오던 그가 갑작스레 세티야 가문의 직계 막내딸의 집을 사흘이나 연속해서 방문하는 것은 이목을 살 만했다.
소문은 두 방향으로 났다.
연회에서 있었던 아이작의 사과와 관련하여, 샬롯에게 뭔가 주목할 만한 점이 있을 거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별 볼 일 없는 3황자 요제프와 별 볼 일 없는 샬롯이 둘 다 정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웃음.
하지만 귀족가에서 이것이 몰고 올 큰 반향에 대해 짐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샬롯이 눈을 떴을 때는,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깜박.
깜박, 깜박.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그녀는 의식이 아주 깊은 수면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팠던 건 내기가 부족한 데다, 아직 몸이 기의 운용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했는데 억지로 타인의 몸을 돌봤던 탓이다.
‘……요제프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너무 무리했어.’
샬롯은 너무 때가 늦은 반성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먹을 것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몸이 날로 좋아져도 모자랄 판에, 제대로 먹지도 않고 쓰러져 있었다니.’
이래서 수련은 언제 하겠냐며 혀를 찬 샬롯이 거울을 슬쩍 바라보았다.
베티가 꼼꼼하게 제때제때 옷을 갈아입혀 준 덕분에, 내도록 앓고만 있었는데도 의복은 말끔했다.
아플 때,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는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샬롯은 가슴 한 편이 따뜻해져 옴을 느끼며 벨을 당겼다.
그 소리를 듣고, 진료 가방을 든 벤과 베티가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깨어나셨어요?”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샬롯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는 베티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열이 올라 있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전생을 그리워했었다.
누구나, 아플 때는 그러니까.
딱히 정을 붙이고 산 사람이 없는 무림인이었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시간이 있었으니까. 향수병과도 같은 감정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다시 얻은 한 번의 생이 너무나 달갑고 기쁘면서도, 의식이 없이 앓는 동안에 건강할 때는 몰랐던 그리움들이 뒤늦게 몰려왔었다.
그런데 이렇게 몸이 가뿐해지고 난 뒤, 깨달았다.
‘난 여기가 더 좋아.’
샬롯은 지난 며칠 동안, 가물가물 정신이 들 때마다 열이 들끓어서 괴로운 중에도 계속해서 저를 지켜보고 돌봐 주었던 얼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베티, 제롬, 아이작, 벤 그리고…… 요제프.
한두 시진마다 계속해서 정신이 들었다가 아득해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침상 옆이 비어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사람을 이 다락방에 처박아 놓고 천대하던 것치곤, 다들 너무 갑자기 잘해 주는 거 아냐?’
샬롯은 벤이 저를 다시 눕혀 진찰하는 것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자.’
샬롯은 이제 도화가 아니었다.
사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그런 멍청한 일은 다시는 없을 거다.
사람을 쉽게 믿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한 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플 때 찾아 준 정성이 고맙지 않은 건 아니잖아.’
속으로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따뜻하게 달구어졌다.
베티가 따뜻한 수건으로 샬롯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주며 벤에게 물었다.
“샬롯 님은 좀 어때요?”
“이제 완전히 회복하신 것 같습니다.”
“정말 과로셨던 것 맞아요? 이렇게 오래 안 깨어나실 줄이야…….”
“그 이유는 저도 모르겠지만, 몸이 굉장히 축나있으셨던 것치곤 빠르게 회복하신 겁니다. 솔직히 저는 사흘은 더 의식을 못 차릴 줄 알았습니다.”
샬롯은 벤의 진단을 들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무리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괜히 놀라게 했네. 이제 괜찮아.”
“……정말 다행이에요. 좀 드실 걸 가져올까요?”
“응.”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세요?”
“어향육슬, 당귀가 들어간 오리 구이, 경장육사.”
“……네?”
샬롯은 베티가 전혀 알아듣지 못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게 귀여워서 작게 웃었다.
“농담한 거야.”
샬롯은 이젠 정말로, 여기 음식이 더 좋았다. 입에도 잘 맞았고, 혼자 먹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았으니까.
“오리고기가 드시고 싶더라도, 묽은 수프부터 드셔야 할 겁니다.”
벤이 엄하게 충고하는 바람에, 베티는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아, 그리고 이거. 3황자님께서 가져다 두신 거예요.”
베티가 방에서 나가기 직전에 가리킨 것은 침상 옆에 놓인 두 개의 꽃다발과 하나의 화병이었다.
‘자주 오긴 왔나 보네.’
꽃 같은 것을 절대 들고 올 것 같지 않던, 사람을 죽일 듯 노려보던 까만 눈동자가 떠올랐다.
샬롯은 웃음을 흘리며 꽃다발을 안아 들었다.
요제프가 가져온 꽃은 예뻤다. 그리고 손에 생화 특유의 부드러운 깃털 같은 촉감이 보들보들하게 닿아 오는 것이 썩 기분 좋았다.
매화와 닮았지만, 매화와 전혀 다른 꽃냄새가 났다.
정말이지 이제 전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더 들지 않았다.
요제프의 그 서늘한 눈을 떠올리고 이 꽃다발들을 보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고맙다고 할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는데.
‘역시, 전생이 그립지 않아. 여기에서 내가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만들면 되잖아. 거기선 못했지만, 이번에야말로 후회하지 않고 살기로 했으니까. 아직 많은 시간이 있는걸.’
샬롯이 희희낙락 꽃을 만지고 있자, 벤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를 향해 입을 뗐다.
“그래서 이제 말씀해 보시죠.”
샬롯은 옆으로 고개를 슬쩍 갸우뚱 기울였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중년이 9살짜리 아이를 앞에 두고 있는 것치고, 벤은 지나치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응? 뭘?”
“뭘 하다 이렇게 되신 겁니까?”
“응?”
“그냥 과로하신 걸로는, 이런 식으로 몸이 축날 수가 없습니다.”
샬롯은 눈을 깜박이고 샐쭉 웃었다.
‘하긴, 벤은 의사니까. 내 몸 상태가 이상할 정도로 허하다는 걸 알았겠지. 연회 가기 전날도 진찰을 받았으니까, 이상하게 여길 만해.’
“왜? 벤은 어떻게 생각했는데?”
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만 말씀하지 마시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이제 샤를로테 아가씨의 전담 주치의입니다.”
“아…… 그렇지?”
“샤를로테 님의 운명과 제 운명이 함께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못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다 알고 계신 것도 압니다.”
샬롯은 작게 미소 지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꽤 이득을 좇는 장사치처럼만 보였는데, 지금의 벤은 믿을 만한 충견처럼 보였다.
주인이 제가 모르는 곳에서 뭘 하고 있는지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눈치가, 썩 재밌었다.
샬롯은 조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샬롯은 그의 손을 쥐었다.
“이렇게 하는 거지? 같은 팀이 됐다는 뜻이잖아.”
“……아. 그건…….”
벤은 제 손을 움켜쥔 작고 따뜻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악수는, 동등한 관계에서 하는 거다.
고작 일꾼에 불과한 제게 악수를 해 주는 주인이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샬롯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맞고, 그녀가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맞았지만…….
‘……포용력까지 있으신 줄은 몰랐군.’
벤은 졌다고 생각하며 샬롯의 손을 마주 움켜쥐곤 작게 웃어 버렸다. 뭘 하다 이렇게까지 몸이 축났는지를 알아내는 건 포기해야 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