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21)화 (21/123)

#21.

샬롯은 벤의 오른손을 쥐고 살랑살랑 흔들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손을 바꿔 벤의 왼손을 집어 들었다.

벤의 왼손은 저번에도 기의 흐름이 썩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더 만성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 기맥이 꽉 막힌 느낌이 났다.

“저번에 내가 말했잖아, 할아범 왼손 봐 주겠다고. 기의 흐름이 영 나쁘다고.”

무슨 말인지, 벤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의원의 입장에서 샬롯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말하기도 참 그랬다.

벤이 고개를 모로 끄덕이며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아, 그때 그러셨죠. 그런데 그 기가…… 어쩌고, 그런 게 아니라 제 왼손은 그냥 나이가 들어서 통증이 있는 겁니다.”

샬롯은 부드럽게 웃었다.

“응. 나도 알아.”

“……네?”

“좀만 기다려 봐. 내가 뭐 하다 과로를 한 건지, 할아범도 알게 해 줄게. 얼마나 기다려야 될진 모르겠지만.”

샬롯이 묘하게 웃는 걸 보며, 벤은 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샬롯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저택 안을 돌면서, 그녀의 조그마한 다락방은 금세 다시 손님으로 가득 찼다.

샬롯의 상태를 살피던 벤에다 가장 먼저 도착한 요제프와 제롬, 거기다 아이작까지 가세했다. 베티가 따뜻한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들어오기까지 하자, 좁은 방 안은 터져 나갈 듯 북적였다.

샬롯으로선 저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이는 것 자체가 낯선 경험이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베티가 떠먹여 주는 따뜻한 수프를 한 입 먹을 때마다, 차례로 그녀에게 뭔가를 물어 대는 이들 때문에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요제프 황자님 때문에 쓰러진 건 아냐?”

아이작은 계속 그런 질문을 던져서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부족한 게 있어서 시위라도 하는 게냐? 필요한 게 뭐지?”

제롬은 눈치도 없이 쓸데없는 질문만 자꾸 던져 댔다.

게다가 수프를 떠먹느라 대답을 제대로 못 하는 사이에, 제롬과 아이작은 도대체가 이해 안 되는 이상한 기 싸움을 해 대기까지 했다.

“애가 대답도 못 하질 않습니까? 삼촌께선 몸을 보신하는 약이라도 좀 지어다 주는 게 좋겠습니다. 곧 칼그림자의 날인데, 이래서야 실력 발휘를 하겠습니까?”

“……샬롯을 언제부터 네가 그리 살뜰히 챙겼다고. 벤이 알아서 챙길 거다.”

“알아서 챙겨서, 방 꼴이 이렇습니까?”

제롬이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샬롯이 사고를 칠 때마다 벌을 주다 보니, 점점 방 꼴이 초라하게 된 건 인정했다. 하지만 그걸 남에게 지적받고 보니, 제가 딸을 소홀하게 키우는 것처럼 보이는 게 영 속이 불편했다.

“아이작. 은붙이를 들이든, 금붙이를 들이든, 곰돌이 인형을 들이든. 내가 알아서 한다고.”

“뭐, 어련히 알아서 몰래 돌보시겠습니까마는.”

“그게 무슨 뜻이지?”

목소리만 높이지 않았다 뿐이지, 날 선 대화를 듣는 것은 고역이었다.

샬롯은 귀가 다 따가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탁.

그녀는 수저를 소리 나게 내려놓고 문 쪽을 가리켰다.

“그만하시고, 두 분 다 나가세요.”

샬롯의 단호한 축객령에, 아이작과 제롬이 서로 당황한 시선을 교환했다.

그 잘난 세티야 가문의 거의 확정된 후계자 후보인 아이작과 실권자이자 작은 주인님이라 불리는 제롬이 도대체 어딜 가서 나가라는 소리를 들어 봤겠는가.

“……나가라고?”

“지금 아버지인 나보고, 나가라는 거냐?”

“절 걱정해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하지만, 정신이 너무 없어서요. 나중에 한 분씩 오시든가, 아니면 제가 식사하고 좀 쉰 다음 따로 뵈러 갈 테니까요.”

얼떨떨해하는 얼굴들을 보고, 샬롯은 다시 한번 문을 가리켰다.

방에 들어온 뒤로 입 한 번 떼지 않고 가만히 샤를로테를 지켜보고만 있던 요제프는 그 이례적인 풍경에 시선을 오래 주었다.

쭉정이 샤를로테, 백금발이 되지 못한 샤를로테, 투명 인간 샤를로테.

그런 별칭들이 샬롯을 지칭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래되었다.

재능이 발현되지 않았던 때부터 지금까지.

하지만 그런 평판은 갑자기 어디로 간 건지, 아이작은 요제프의 앞에서 내도록 샬롯을 향해 묘한 태도를 보여 줬었다.

요제프는 그런 아이작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느릿하게 샬롯에게 고개를 돌렸다.

달각. 달각.

아이작과 제롬이 방에서 나간 뒤로도 요제프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베티와 벤은 그 둘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기 때문에, 샬롯의 다락방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수프를 떠먹는 샬롯의 수저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런 상황이 거북할 만도 하건만, 샬롯은 배가 든든해질 때까지 느긋하고 여유 있는 식사를 끝마치고서야 수저를 내려놓았다.

“베티, 자리를 좀 비켜 줄래?”

“아, 그럼요!”

하지만 샬롯과는 달리 베티는 이 분위기가 어지간히 거북했던 모양이었다. 샬롯이 부드럽게 웃으며 권한 말에, 베티는 그릇과 수건 등을 챙겨서 얼른 자리를 떴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아가씨.”

“응.”

마지막으로 벤까지 물러나자, 샬롯은 기지개를 한 번 쭉 폈다.

‘먹을 게 들어가니까 좀 살겠어.’

처음 눈을 떴을 때보다는 훨씬 더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요제프도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꼴을 하고 있었다.

비록 아주 임시방편으로 잠깐 기혈의 순환을 원활하게 만들어 준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당장은 고통스럽지 않은지 좋아 보였다.

‘가뜩이나 잘난 얼굴이 더 잘나 보이네.’

백옥같다고 생각했던 피부에는 윤기가 돌았고, 붉은 나비 날개 같은 입술에도 제법 혈색이 있었다.

다만, 그 잘나 보이는 얼굴과는 별개로 저를 노려보는 저 새카만 눈에 서려 있는 매서운 기운에 얼굴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지만.

“꽃, 고마워.”

요제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수하가 챙겨 왔을 뿐이야.”

“어쨌든, 네가 챙기라고 한 거 아냐?”

요제프는 새카만 유리알 같은 눈으로 샬롯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그렇다, 아니다 대답을 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이렇게 쓰러진 게, 나 때문인 건가?”

샬롯은 요제프의 얼굴을 살폈다.

열두 살 소년의 얼굴에는, 죄책감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경계심과, 명확하게 읽어 내기 힘든 다른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샬롯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창피하지만 맞아. 그런데 네가 미안해할 건 아니야. 왜냐하면 내가 미숙해서 그런 부분이 더 크니까.”

샬롯은 혹시라도 요제프가 스스로를 탓할까 봐 애써 감싸 주었지만, 요제프는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로 되물었다.

“뭘, 어떻게 한 거지?”

“음…….”

“그 이전에 뭘 알아낸 거지?”

“그게…….”

“누가 네게 알려 준 거지? 공작? 아니면 제롬 세티야? 혹시 2황자가 그러던가, 내가 아프다고?”

“좀 차분해져.”

“그것도 아니면 궁의가? 궁의 중에 정보를 흘린 이가 있나?”

“이것 봐, 요제프 황자님.”

샬롯이 부드럽게 달래 보았지만, 요제프의 사나운 기운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질문을 읊었다.

“너는 치유술사인가? 그것도 아니면 세티야 가문의 재능 대신 신성력을 타고났나? 그것도 아니면 아티팩트?”

샬롯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에게 하는 것처럼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은, 이 아이에게만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요제프는 그 누구도 낫게 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으니까.

혼자 외로이 주화입마에 가까운 증상과 싸워 왔던 그 세월들 속에서, 요제프가 느꼈을 막막함이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아홉 살짜리 꼬맹이가 그걸 어떻게 해 주면 이상할 법도 하지.

샬롯은 말을 골라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황자님은, 전생이라는 것을 믿어?”

“뭐라고?”

“전생 말이야.”

“……하.”

요제프가 헛웃음을 지었다.

“얼렁뚱땅 뜬구름 잡는 이상한 소리로 넘어가려고 하나 본데. 똑바로 털어놔.”

아까부터 살벌하던 요제프의 눈빛은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아무에게도 안 털어놓은 중대한 비밀이었는데.’

전생이라는 진실 같은 건 말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히겠다.

게다가 지금 제대로 설득하지 않으면, 그녀를 2황자의 끄나풀이라고 완전히 믿어 버릴 눈치였다.

샬롯은 요제프를 설득할 만한 다른 적당한 변명거리를 이것저것 머릿속으로 굴려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힘의 논리로 승부하는 무림인으로 자라서 그런지, 굳이 뭐, 누굴 말로 설득하고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닌데.’

뭐, 요제프로부터 신뢰를 사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좋아하는 캐릭터니까. 그리고 귀엽고, 동정심도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요제프가 자신을 못 믿는다고 해서 큰일 날 건 또 뭔가 싶기도 했다.

샬롯은 앉아 있는 상태에서는 제 무릎 위까지 살랑살랑 내려오는 자신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한 줌 움켜쥐고 씩 웃었다.

“나를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아.”

요제프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뭐?”

“이것 봐, 황자님. 황자님은 지금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대뜸, 강하게 나오는 샬롯의 말에 요제프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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