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샬롯은 운기조식으로 새로운 기를 받아들였다.
숨을 통해, 미약한 기운들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파도와도 같은 기운들이 넘실거리며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단전에 상상도 못 할 속도로 기가 쌓여 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명상을 마치고 눈을 떴다.
‘이렇게까지 순조롭게 기가 쌓여 간다면, 임독양맥을 뚫는 것도 꿈은 아니야.’
임독양맥.
임맥과 독맥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임맥이라는 것은 입 아래에서 시작해 회음혈을 지나는 흐름이고, 독맥은 꼬리뼈에서 시작해 척추를 타고 흐르는 흐름이다.
태어날 때는 개통되어 있지만 자라면서 탁기 때문에 막히는 것인데, 이것을 뚫는 것은 쉽지 않다.
쉽게 생각하자면 사람의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기를 직통으로 보내어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즉, 임독양맥만 타동하게 되면 몸속에 몇 갑자의 진기를 쌓느냐가 더 이상 중요한 목표가 아니게 되는 거다.
그때그때,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여 운용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자연의 기운이 진한 곳이라면, 더더구나.
‘바닷물을 퍼다가 그때그때 사용할 수 있게 된달까?’
샬롯은 아직 닿지도 않은 경지를 상상하고 혼자 즐거이 웃었다.
임독양맥을 타동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림인에게는 꿈과도 같은 일이었다.
샬롯이 화산파에 있던 당대에도, 그 대단한 성취를 이뤄 낸 사람은 화산파 전체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그것을 위해서는 다량의 진기가 필요했다.
둑을 뚫기 위해서는, 그것을 파괴할 충분한 물이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어쩐지, 금방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단순히 내공만 많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샬롯에겐 자신감이 있었다.
도화로서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던 1년간, 그녀의 성취는 더할 나위 없이 깊어졌다.
몸을 움직이지도, 회복하지도 못하는데 성취가 깊어진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실제로 그랬다.
무공을 향한 간절함이, 귀결을 반복해서 읊게 했다.
다른 곳에 집중할 것이라곤 없는 그 단조롭기 짝이 없는 삶이, 깨달음을 깊게 했다.
샬롯은 쓰게 웃었다.
‘그래도 내게 지옥 같기만 했던 그 세월이, 그저 허송세월로 버려지지 않았다는 게…… 그게 참 좋아.’
달칵.
그녀가 명상을 마치고 침대에서 막 내려오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베티가 방 안쪽의 상황을 살폈다.
요즘 매일 아침마다 명상을 하는 샬롯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샬롯은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샬롯 아가씨.”
베티는 이제 더 이상 샬롯의 본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아침 인사도 이제는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따뜻한 물을 가져온 베티가 샬롯의 세수와 피부 정돈을 도와주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오늘도 3황자님께서 오세요?”
샬롯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샬롯의 모습이 거울에 비쳐, 거울 속의 자그마한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도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그렇게까지 한가한 것도 아닌데, 또 올까?”
그녀의 그런 태도를 보고, 베티가 입을 가리고 흐뭇하게 웃었다.
“황자 전하께서 엄청 걱정하시더라고요.”
“뭐, 그거야 당연하지.”
베티는 그저 흐뭇하다는 듯 제 양 볼을 감싸 쥐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물론 이뤄지기 힘든 사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두 분께서 너무 잘 어울리시는 건 사실이에요.”
“……그래 보였어?”
“그럼요. 매일 꽃도 안고 병문안 오시고.”
“그건 별일 아니래도.”
“매일매일 침대 곁을 오래 지키다 가셨다고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이에요? 황자님도 공사다망하실 텐데.”
샬롯은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의 자신은 아홉 살. 이전 생의 자신은 열다섯 살.
지금의 3황자 요제프는 열두 살.
따지고 보면 지금의 저보다는 나이가 많았고, 전생의 저보다는 고작 세 살 어릴 뿐인데 어쩐지 요제프를 생각하면 자꾸 까마득한 동생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요제프가 성인이 된 뒤의 서술을 많이 봐서, 유독 지금의 요제프가 어려 보이는 것뿐이겠지만.
그렇게 어린아이를 상대로 커플이니 뭐니, 그런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느낌이랄까.
샬롯은 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고, 베티는 더 신이 나서 요제프 황자님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처음 본다고 떠들어 대며 그녀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이제 옷은…….”
“아, 옷은 간편한 걸로. 오늘은 수련을 시작할 생각이거든.”
“수련이요? 진심이세요?”
베티는 샬롯이 쓰러지기 전까지 매일같이 반복하던 말을 이미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며칠 동안 의식도 차리지 못하던 아가씨의 상태를 생각해서 슬쩍 만류했다.
하지만 샬롯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팔까지 휘저어 보였다.
“벤에게도 허락받고 나갈게. 걱정하지 마.”
베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모인 제게 샬롯이 뭔가를 통보한다면, 그녀가 어떻게 뜯어말릴 수 있는 권한이야 없었다.
하지만 요즘의 샬롯은 이런 식으로 항상 그녀의 마음까지 헤아려 줬다.
“……샬롯 님.”
샬롯은 베티가 별것도 아닌 것에 자꾸 감동을 받는 게 재밌어서 작게 웃었다.
베티는 샬롯이 그녀에게 잘해 주면 잘해 줄수록, 그 보답이라 생각하는지 샬롯을 정말 열성적으로 보필해 주곤 했다.
샬롯이 아침 식사를 마치는 사이, 벤이 진료를 다녀갔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회복이라며, 벤이 외출을 허락했고 베티는 더 이상 말릴 명분을 찾지 못하고 샬롯을 도와 외출을 준비했다.
“옷은 어떤 것으로 골라 드릴까요?”
“응. 바지랑 셔츠면 될 것 같은데.”
베티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드레스룸 문을 활짝 열었다.
“간편한 옷이라…….”
하지만 베티가 찾는 간편한 무복 같은 건 없었다.
당연하지만, 샬롯이 지금까지 수련 같은 것에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역사가 없었으니까.
베티가 곤란한 표정으로 드레스룸을 노려보는 걸 보며, 샬롯은 그 뒤에 서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차피 멀리 갈 것도 아니고, 공작저에 있는 연무장을 좀 쓸 생각인데. 대충 골라 줘.”
“……네? 공작저에 있는 연무장이요?”
샬롯은 난색을 띠고 자신을 돌아보는 베티의 얼굴에서, 당혹감을 읽었다.
‘아니, 검술 위에 세워진 세티야 공작가 아니냐고. 설마……’
“모두들 편하게 쓸 수 있는 연무장 같은 것도 없는 거야?”
“그게…… 기사단 소속으로 된 곳만 있고, 나머지는 다 후계자분들 관할 영역으로 지정되어 있으세요……. 워낙 분쟁이 잦아서…….”
“아, 없어?”
베티의 목소리가 더욱더 기어들어 갔다.
“그것이. 샤, 샬롯 님의 개인 수련장은 없으세요…….”
샬롯은 속으로 혀를 수십 번 찼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방도 이렇게 비루한 꼴을 하고 있는데. 재능도 없고 수련을 하는 일도 없는 막내딸에게 대단한 연무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후계자 구도를 이렇게 빡빡하게 만드니까, 후계자마다 연무장도 따로 내줘야 하는 거 아냐? 서로 엿볼까 봐 걱정되어 수련도 못 하나 보네.’
기가 막혀서 혀를 차던 샬롯의 머릿속에 아이작이 제 연무장을 써도 좋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생각을 해내자마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작이 칼그림자의 날 때문에 어제오늘 워낙 정신없이 바쁘게 어딘가에 끌려다니는 모양이라 그나마 다행이었지, 마주치면 또 집요하게 제 뒤를 쫓아다닐 거다.
빙글빙글 웃으며 제게 관심을 표명해 오는 모습은, 솔직히 좀 무서울 정도였다.
‘뭐, 언젠가는 빌려 쓰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른 선택지를 찾아볼까?’
샬롯은 드레스룸 안쪽을 한참 기웃거리다가, 구석에 놓여 있는 지극히 단순한 재색 무복을 찾아냈다.
“어? 뭐야, 있잖아.”
“네? 이건…… 이건, 황곰 기사단의 수련생 무복이에요…….”
“왜? 이건 입으면 안 돼? 근데 이게 왜 여기 있지?”
“세티야 가의 일원이시니 황곰 기사단의 수련생으로 일단 등록이 되어 있긴 하시니까요……?”
샬롯의 눈이 반짝였다.
“뭐야, 그럼 수련할 곳이 있네. 게다가 다른 사람들 수련하는 것도 볼 수 있을 테고. 대련도 할 수 있을 테고! 대회 준비하기 딱이네.”
베티는 신이 나서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는 샬롯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등록하게 된 건, 본인의 의사는 아니었다.
제롬이 강제로 샬롯을 등록시킨 거고, 집안 그 누구도 샬롯이 직접 기사단 수련생의 훈련을 받으러 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기분 좋아 보이셨는데…… 괜히 갔다가, 또 비교당하고 오시는 건 아닐까 모르겠네……’
베티가 걱정에 주저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샬롯은 그 헐렁하고 편해 보이는 수련생의 정규 복식을 펼쳐 들었다.
‘누군가 수련복을 입은 모습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칭찬이라도 한 걸까?’
베티가 갖은 망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샬롯이 그것을 앞뒤 거꾸로 입기 시작했고, 베티는 허겁지겁 그녀가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 이렇게 입는 거네. 좋아. 앞으론 혼자 입을 수 있도록 할게.”
‘앞으론’이라는 말은 이 옷을 또 입겠다는 말이다.
베티는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지 몰라서 넋을 놓고 있었다.
‘그냥 가게 내버려 둬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하지만 샬롯이 가겠다는데, 그것도 저렇게 즐거워하는 데야 별수가 없었다. 베티가 해 줄 수 있는 건 햇볕에 잘 타지 않게 해 주는 크림을 발라 주는 게 전부였다.
쩔쩔매는 베티를 내버려 두고, 샬롯은 간편한 차림이 기분 좋은지 기세 좋게 바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