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24)화 (24/123)

#24.

아침부터 부지런히 서두른 덕분에, 벤의 진료까지 받고 별관을 나섰음에도 샬롯은 수련생의 일과가 시작될 때에 꼭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샬롯은 그녀를 흘끗흘끗 돌아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좀 이상한 것을 보았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무술을 다시 익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심장이 뛰는 지 몰랐다.

게다가 듣도 보도 못한 세상의 무술을 처음 눈으로 보는 것이다. 화산의 검법 이외에 새로운 것에 기초를 둘 생각은 없었으나, 그래도 견식이 한결 넓어질 것이다.

신이 난 그녀가 수련장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베티가 그녀를 수련장 바로 앞에서 내려 주었을뿐더러, 넓은 공터 중 한 곳에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정규 복식과 꼭 같은 차림을 한 남녀 무리가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수련 교관으로 보이는 덩치가 큰 남자가 단상 위에 서서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박수를 세 번 쳤다.

각자 빈둥거리고 있던 수련생들이 일제히 한군데로 모여 섰다. 샬롯도 냉큼 그들의 속에 섞여 섰다. 바로 옆에 선 남녀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와서 꽂히는 게 느껴졌다.

‘저 사람, 샤를로테 님 아냐?’

‘무슨 소리야, 샬롯 님이 수련장에 나오는 거 봤어? 내가 볼 때 세티야 가문이 망하기 전에는…… 세상에!’

‘맞지? 봤지? 오늘 대체 무슨 일로 저러고 온 거야? 죽을 뻔했다고 하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란슬롯 님이 던진 돌을 막 부쉈다고 하던데. 그 소문이 진짜였어?’

‘얘, 말조심해! 샤를로테 아가씨가 가문에서야 내놓았다지만 우리한텐 어떻게 하실지 몰라. 저번에도 광장에서 말이 다니는 도로에 드러누워서 원하는 걸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셨다니까? 소리까지 지르시면서, 어휴. 아무튼 보통 성질은 아니셔.’

운기조식을 하며 외부의 기를 받아들이는 법을 수련하다 보면 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읽을 수 있으니, 당연히 청력도 좋아진다.

샬롯은 수런거리는 목소리가 모두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었지만, 역시 저를 살피는 시선은 거슬렸다.

그녀가 고개를 슥슥 돌려 주위를 바라보자, 앉았던 새가 도망가듯이 몰렸던 시선이 일제히 떠났다.

샬롯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 몸의 원래 주인은 꼬맹이 단역일 뿐인데, 다들 뭘 그렇게까지 무시하나 싶었다. 뭐, 과거의 샬롯이 남들에게 험하게 대한 것도 문제인 것 같지만.

그때, 교관의 큰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자자, 잡담은 그만하지. 조금만 있으면 예비 기사단 멤버로 발탁하는 시험이 있다. 모두 기대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부터는 그에 대비하여 2인 1조로 로테이션의 대련을 하고, 오후에는……”

교관의 말이 뚝 끊어진 것은, 그의 시선이 수련생들의 면면을 쭉 훑다가 어째 처음 보는 것 같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머리통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그 분홍빛 머리통이 세티야 공작가의 내놓은 딸 샤를로테 세티야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옷차림이 평소와 너무 달라서 공작가의 막내 아가씨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귀족들조차도 기꺼이 수련생이 되길 자처하는 황곰 기사단인 것은 맞았고, 샬롯도 분명 수련생으로 형식적인 등록은 되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평소 샬롯은 수련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게다가 장난치러 온 것도 아니고, 진지하게 온 건가? 저 상식적인 복장은 또 뭐고.’

교관은 계급으로만 따지면 샬롯 세티야에게 눌렸지만, 아무튼 이 장소에서 교관의 지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애초에 기사단에 들어온 이상, 기사단 내의 계급에 적응해야 한다.

결국, 교관은 샤를로테를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뭐, 제롬이나 손위 오빠들 때문에 억지로 떠밀려 나오기라도 한 게 틀림없었다.

저 아가씨에게 대련 같은 걸 시켰다간 불평불만을 할 게 틀림없으니 그냥 서로 못 본 체하면 그만일 거라는 판단이 섰다.

‘그냥 꾀병을 부리길 좋아하는 다른 귀족 아이들처럼 아프다며 그늘에 누워 있다가 돌아가겠지.’

그는 샬롯에게서 눈을 떼어 내며 얼른 말을 이었다.

“오후에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자율적으로 보충하도록 한다. 이 일과는 예비 기사 시험이 있는 2주 후까지 반복적으로 실시된다. 모두 알아들었나?”

“네!”

50명 남짓의 목소리가 하나처럼 났다.

교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을 했다.

“로테이션의 첫 조는 교번대로 한다. 1번은 2번과, 3번은 4번과. 상대가 결석이라 짝이 없는 자들은 서로 짝을 찾아라.”

50명이 서로 대련할 장소를 찾아가기에 충분한 넓이의 큰 대련장이었다. 모두는 익숙하게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사이로 키가 작은 하인이 돌아다니며 목검을 나누어 주었다.

샬롯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제 교번 같은 상세한 정보는 알아낼 수 없었다. 아무튼 그녀는 그 책에서 그저 조연1에 불과했던 것이다.

게다가 황곰 기사단에 수련생으로 적을 두고 있다는 것조차 오늘 아침에 처음 알았다. 그러니 원작에 그런 것까지 서술되었을 리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는데, 마침 누군가 싱긋 웃으며 다가와 앞에 섰다.

“여, 샤를로테. 이렇게 입고 있으니까 못 알아보겠는데?”

샬롯은 쓰게 웃었다.

‘건달 같은 말투를 쓰네. 쟤랑은 어쩐지 자주 마주치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요제프를 괴롭히는 데 열과 성을 올리던 남자아이를 올려다봤다.

“이름이 뭐였더라?”

샬롯의 태연한 물음에, 란슬롯이 기가 막혀서 그녀를 쏘아봤다.

이름조차 모르겠다는 듯한 그 태도에, 란슬롯 뒤에 서 있던 아이 중 몇이 웃음을 터뜨릴 뻔한 게 그의 신경을 긁었다.

“지금…… 나를 무시했겠다?”

“아니, 내가 무시한 게 아니라……. 이름이 뭐냐고 물은 것뿐이잖아.”

샬롯의 난처한 얼굴에 미안한 기색까지 스쳤다. 그건 사정을 모르는 남이 보기에는 퍽 능청스러운 놀림으로만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아이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란슬롯의 얼굴에 붉은 기가 스쳐 지났다.

황궁 연회 때부터였을까? 샬롯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기회를 엿봤는데, 미꾸라지 같은 샬롯이 매번 어디론가 도망가 버려서 버릇을 고쳐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멍청한 샬롯이 제 발로 기사단까지 기어 들어온 거다.

“47번이다.”

란슬롯이 목검을 움켜쥐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샬롯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름이 번호야?”

“네 짝이라는 뜻이잖아. 48번, 샤를로테.”

샬롯은 뒤늦게 제 앞에 서 있는 남자아이의 이름을 겨우 떠올렸다.

란슬롯.

세티야 가의 방계 중에서는 제법 재능의 꽃을 피운 남자아이.

하지만 그는 재능에 비해 노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아마 아이작이 가문의 수장이 되어 가문의 쭉정이들을 숙청할 때 전장에 내몰리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던가.

샬롯은 거드름을 피우며 서 있는 란슬롯의 반짝거리는 은발과 제법 커다란 덩치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란슬롯의 뒤로 쭈뼛쭈뼛거리며 서 있는 다른 남자애가 있는 걸 보니, 그의 정규 대련 상대는 그녀가 아니라 그 남자 쪽인 것 같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녀야말로 란슬롯과 한 번쯤 대련을 할 기회를 가지고 싶었으니까.

샬롯은 턱을 치켜들고 피식 웃으며 시종에게서 목검을 받아 들었다.

이런 몸으로 누군가를 이기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걸어온 싸움을 피하진 않는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서 좀 비열하지 않은가? 아홉 살 아이한테 대뜸 이런 식으로 싸움을 거는 게.

‘이기면 퍽이나 기분 좋으시겠군. 옹졸한 놈.’

샬롯은 픽 웃었다. 무림의 법도를 모르는 놈에겐, 가르쳐 주어야 한다 배웠다.

‘그리고 집단으로 요제프를 괴롭히는 그 멍청한 머리는, 두들겨 맞아야 고쳐질 테지.’

“굳이 나를 골라서? 그렇군. 좋아, 어디 한번 해 봐.”

이렇게 대련을 하자고 하면, 꼬리를 말고 사과를 할 줄 알았던 란슬롯이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그가 알고 있던 그 샬롯인 게 틀림없는데도, 풀색으로 반짝이는 눈이 마치 다른 사람 같은 기백을 풍기고 있었다.

란슬롯은 뭐 이건 이거대로 재밌게 됐다고 생각하며 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드디어, 본때를 보여 줄 순간이었다.

란슬롯 무리의 아이들은 제 대련도 잊고 둘을 우르르 둘러쌌다.

아이들이 각자 짝을 지어 대련을 시작하는 것을 지도하던 교관이 이변을 눈치채고 란슬롯에게 얼른 다가섰다.

저 둘은 안 된다. 란슬롯은 지위고 신분이고 여자고 남자고, 그런 거로 상대를 봐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직 수련생이지만 실력은 이 중에선 그나마 상위권이다.

샬롯이 아무리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라지만, 제가 담당하고 있는 수련장에서 크게 다치는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막 교관이 호루라기를 불어 제지하려는 순간이었다.

“왜 그래, 재밌어 보이는데 내버려 두지?”

비야키 세티야가 교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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