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샬롯은 그런 요제프가 귀여워서 작게 웃었다.
“진짜 엄마라는 게 아니라, 그냥 잘됐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 삐뚤어지지 말고, 잘 자랐으면 좋겠다…… 뭐, 그런 거지.”
‘폭군이 돼서 사람을 죽일 때, 나는 좀 봐줬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 말이야.’
샬롯은 뒷말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요제프는 샬롯의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린아이답지 않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은 내가 잘못이지.”
“……아, 왜! 솔직하게 말해 줘도.”
“어떻게 내가 아픈 걸 알아냈는지, 어떻게 그걸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 거기에 더해서 이젠 계기까지 모르게 됐군.”
“진짜 솔직하게 말한 건데.”
요제프는 샬롯이 불평을 하며 입을 비죽거리자, 고삐를 쥐지 않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마음을 정리한 듯, 그는 더 이상 불평하지도, 한숨을 쉬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천히, 길게 보지.”
“뭘?”
“너를.”
그렇게 말하는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 속에는 아직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그리 답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쯤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조금. 샬롯이 간신히 알아챌 수 있는, 아주 조금의 신뢰가 그 시선에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착각인지, 아닌지는 그녀도 몰랐다.
샬롯도 신뢰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니까.
* * *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몬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공터에 도착했다.
샬롯은 제 손을 잡아 주는 요제프의 손을 거절하지 않고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렸다.
“오, 여기 마음에 든다.”
사냥터 앞이라 그런지, 요제프가 훈련장으로 쓰고 있다는 공터는 전혀 꾸며지지도 않고 돌이 골라지지도 않았지만, 제법 공간이 넓었다.
샬롯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저 막내딸이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한두 시간 정도 돌을 고르는 과정만 거치면 꽤 훌륭한 훈련장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오늘은 나도 란슬롯 때문에 기운을 다 빼서 제대로 된 수련은 못 할 것 같지만, 앞으로 매일 여기로 올게.”
“그래.”
“너도, 괜히 란슬롯이나 세티야 가 사람들 눈에 띄지 말고 잘 숨어 있다가 내가 올 때 맞춰서 나와.”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그럼. 내가 다 지켜 준다니까?”
요제프가 아무런 대답 없이 바닥에 놓인 나뭇가지를 집어 드는 걸 보며, 샬롯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곤 주변을 살피고 있는 요제프에게 다가가 대뜸 손을 뻗었다.
요제프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피하려고 했지만 등을 만지려 하는 것을 알고는 떨떠름하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몸을 내주었다.
샬롯은 눈을 감고 집중하며 기의 흐름을 느껴 보았다.
겉으로 만져서는 잘 알 수 없어서, 그녀는 거침없이 요제프의 겉옷을 들치고 옷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어 맨등 위로 손을 올렸다.
요제프가 간지러운지 몸을 움츠리는 게 느껴졌지만, 샬롯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등 위 여기저기를 만져 보며 눈을 눌러 감고 집중했다.
기의 흐름이, 여전히 탁했다.
제가 쓰러진 뒤로도 요제프가 수련을 계속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러를 쓴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임은 틀림없었다.
‘다른 사람도 오러를 쓸 때마다 주화입마가 온다면, 소드마스터라는 게 있을 수가 없을 것 아냐. 내 생각엔 아무래도 요제프의 재능이 이 모든 일을 만든 것 같아.’
샬롯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뗐다.
그러곤 눈을 반짝 뜨고 요제프를 돌려세웠다.
“내가 올 때마다 천천히 몸도 봐 줄게. 근데, 이게 매일 어떻게 해서 될 일이 아니라, 내가 어느 정도 수련을 한 다음에 네 혈을 좀 뚫어 주는 게 빠를 것 같은데……”
“……혈?”
“아무튼, 그게 위험할 수도 있는 거라서, 내가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하거든.”
“좋아. 그런 게 있고, 뭔지 모를 이유로 그런 것에 능통한 데다, 황실의 의원들도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네가 모종의 이유로 그 혈인지 뭔지를 어떻게 해 주기로 했다고 치자. 그래서?”
샬롯은 요제프가 정말 억지로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는 게 느껴져서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뭐가 웃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조용한 얼굴의 요제프가 한참 동안 그녀를 노려보고서야, 샬롯의 웃음은 간신히 멎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칼그림자의 날까진 준비가 다 되도록 해 볼게. 완벽하게는 못 하더라도, 8~9할이라도.”
“그래.”
“그래야 네가 거기서 그 망할 2황자를 꺾는 걸 볼 거 아냐.”
물론, 그렇게 되면 3황자에 대한 견제가 더 심해질 테니 그게 좋은 일이 될진 모르겠지만.
샬롯이 혼자 중얼거리는 걸 바라보는 요제프의 눈이 다시 한번 가늘어졌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검은 눈동자가, 오래도록 샬롯을 살폈다.
* * *
“아가씨, 근신이 풀리셨다고는 해도 너무 늦은 시간까지 밖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요제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매일 만나 훈련할 일정을 짜느라 신이 나 있던 샬롯은 갑자기 나타난 시종의 말에 한숨을 푹 쉬었다.
‘위험해서 위험하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요제프 황자랑 노는 게 꼴 보기 싫은 거겠지.’
시종을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
사실 짐작 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솔직히 내일부터 요제프 황자와 함께 수련을 하겠다는 건 저 혼자만의 다짐이었지, 제롬도 아이작도 러슬도, 요제프를 마뜩잖게 여기고 있었으니 이게 잘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뿐이면 다행이지. 란슬롯에다 비야키에다…… 게다가 여기에 3황자를 ‘교육’하라고 보낸 2황자에다 가주인 카밀라도 이 꼴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거였다.
뭐,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자면 란슬롯이나 비야키, 카밀라는 아직 제게 관심이라곤 없어서 3황자와 엮이든 말든, 신경을 안 쓸 것 같다는 점이랄까.
샬롯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옷을 털었다. 나무 그루터기 아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터라 흙먼지가 잔뜩 묻었을 게 틀림없었으니까.
‘일단은 순순하게 굴자. 그래야 내일부터 요제프를 만나러 올 때도 귀찮게 뭐라고 안 하겠지.’
“응. 이제 돌아갈게.”
샬롯은 마차로 끌려가듯 걸어가면서도 요제프를 계속 돌아보며 내일 아침에 오겠다는 뜻으로 공터와 해가 떠오르는 쪽 하늘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리켜 보였다.
마차가 출발하고, 고요한 공터에 홀로 남은 요제프 황자는 샬롯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그대로 생각에 잠겨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면서, 샬롯은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요제프와의 수련을 방해받지 않을 수 있을지.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방해할 인물이 너무 많았다.
슬쩍 시종에게 물어본 결과, 지금 그녀를 불러들인 건 제롬이라고 했다.
‘아…… 그 허수아비 같은 제롬 아버지는 왜 이제 와서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야. 줄곧 그래 왔듯 모르는 체하면 좋을 텐데.’
그리고 란슬롯이 방해할 확률도 아주 다분했고.
‘아버지는 내가 설득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의외로 갑자기 변수로 등장한 러슬 오빠가 무척 귀찮을 것 같단 말이야.’
오늘 있었던 일만 봐도, 요제프와 쓸데없이 신경전을 벌이지 않았던가.
“……하아.”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그녀는, 무의식중에 제 방을 찾아 들어갔다가 눈을 깜박이곤 다시 나왔다.
“어라?”
하지만 별관의 가장 높은 층에, 방이라곤 분명 제 방 하나뿐이었다.
방문 앞에 보이지 않던 ‘샬롯’이라는 명패와 화관 장식이 붙은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한번 방문을 열었다.
“……여기가 어디야? 내 방이야?”
순간적으로 방을 잘못 찾아 들어온 걸까, 생각한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고작 한나절 외출했다 돌아온 짧은 사이에 제 방은 못 알아보게 달라져 있었다.
나무가 그대로 드러나 있던 벽 위에는 고급스러운 살구색 벽지를 발랐고, 장식이랄 게 없던 커다란 창문마다 아름다운 자수가 놓인 레이스 커튼이 달려 있었다.
텅 비어 있던 입구 옆 공간에는 아담하고 예쁜 붉은색 테이블과 의자가, 그 옆에는 등불과 책을 보관하기 좋은 긴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작은 침대가 놓여 있던 공간에는, 새하얀 커튼으로 치장한 캐노피 침대가 들어서 있었다. 그 위에는 소녀들이 좋아할 법한 앙증맞은 솜 인형 여러 개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폭신해 보이는 고급스러운 이불과 베개가 여러 겹으로 놓여 있었다.
휑하기 짝이 없던, 액자 하나 없던 그 황량한 풍경은 어디로 간 걸까.
전체적으로 붉은색과 따뜻한 주황색, 상아색이 섞여들어 있는 방의 풍경은 따뜻하고 아기자기했다.
“……와, 이게 다 뭐야.”
샬롯은 이 높은 다락방에 이렇게 많은 가구가 한순간에 교체된 것에 감탄사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