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새 쿠션들에 새하얀 커버를 씌우고 속을 부풀려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던 베티가 샬롯을 보곤 얼른 다가왔다.
이 방의 모습을 싹 바꿔 놓는 데에 꽤 공헌한 듯한 베티는 조금 지쳐 보였지만 아주 신이 나서 눈빛이 반짝반짝했고, 볼이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녀는 신이 나서 샬롯의 손을 끌어당겼다.
“샬롯 아가씨, 이것들 좀 보세요. 새로운 찻잔까지 다 구비되었어요. 서재에 책도 있고요.”
“여긴 마법이라는 게 있다더니…… 정말 마법 같네.”
“그러니까 말이에요. 러슬 도련님과 작은 주인님께서 이렇게 하나하나 다 신경 써서 준비해 주셨답니다.”
“와……”
‘러슬 오빠와 아빠가……?’
뒤늦은 이야기지만, 정말로 공작가의 막내딸이 된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제롬을 속으로 꽤 나무랐던 게 갑자기 미안해진 샬롯은 혀를 쏙 내밀며 침대로 다가갔다.
손으로 살짝 쓸어 보기만 해도, 손에 착 감기는 침구의 부드러운 느낌이 아주 좋았다.
신이 나서 그 위에 폴짝 뛰어 앉자, 지난번 침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폭신한 감각이 그녀를 받아 주었다.
샬롯은 아예 드러누워서 침대 위를 뒹굴뒹굴하며 포근한 햇빛 냄새가 나는 침구의 향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이렇게까지 해 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네…… 갑작스럽게.”
샬롯은 자신이 재물에는 관심이 없다고 자신했지만, 그래도 저를 신경 써서 이렇게까지 방을 꾸며 줬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제대로 이 집안의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너무 좋으니까, 동시에 불안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도 어딘가에 제대로 소속되어 본 적도, 배신당하지 않을 가족을 가져 본 적도 없었으니까. 인제 와서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준다는 게 자꾸 이상하게 느껴졌다.
괜히 기대했다가, 괜히 믿었다가 나중에 또 크게 상처를 받는 건 아닐까.
화산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다 잘 될 거라고만 생각하고 순진하게 굴었다가, 믿었던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느니 처음부터 마음을 다 내어 주지 않는 게 나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
그녀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가슴속이 울렁거리는 묘한 감각이 행복하면서도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폭신한 베갯잇에 고개를 묻었다.
* * *
란슬롯은 세티야 본가의 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이를 득득 갈았다.
그의 기분은 지금까지 중 최악이었다.
샬롯 그 계집애가 어떤 사술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교관에다 러슬, 비야키까지 보는 앞에서 그녀와의 대련에서 패한 건 정말…… 고개를 들고 다닐 수도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다시 상기해 봐도 그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샬롯이 대단한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닌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작 몇 합 만에 승부가 끝나 있었다.
‘……환영술이라도 쓴 게 분명해. 꼴에 직계 자식이라고 가진 돈이나 아티팩트라도 좀 있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자꾸 머리에서 열이 올랐다.
본가로 돌아오는 길에도, 멍청한 귀족 아이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 댔던지.
그리고 둘째로, 본가로 돌아오자마자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이제 와서 제롬이 샬롯의 방을 화려하게 꾸며 줬다는 거다.
처음부터 샬롯이 이렇게 천대받은 건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란슬롯이 기억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그녀는 늘 엉망이고 초라한 방에서 지냈다.
게다가 본관이 아니라 별관에 방을 받아서.
그건 그럴 만도 했다.
샬롯이 사고를 치고, 훈련장에서 도망가고, 남들이 훈련하는 걸 방해하거나 시종들을 괴롭히고 다닐 때마다 점점 더 초라한 꼴이 되어서 지금이 된 거였다.
그런데 후계자를 추려 내는 칼그림자의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저렇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잘해 준다고?
란슬롯은 정말 스스로의 실력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세티야 가 방계 출신인 그가 본가에 방을 배정받은 게 얼마나 오랜 노력 끝에 이뤄 낸 일인지를 생각해 보면 이렇듯 분통이 터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력 제일주의인 것처럼 다들 말하지만, 알고 보면 결국 직계를 아끼는 거 아니냐고. 샬롯보다 내가 훨씬 위인 걸 모르는 사람 있어?’
그가 샬롯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 점이었다.
그 자신이 만약 직계였다면 샬롯처럼 인생을 펑펑 허비하고 살지는 않을 거였다. 그 멍청한 계집은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꼴 같지도 않게 불쌍한 척 굴었다.
자신은 그렇게 아등바등 노력해도, 직계와는 또 다른 시선을 받는데.
러슬 형님쯤 되는 이는 저를 실력으로 인정해 줬지만, 아이작 형님이나 비야키 형님은 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게 다, 방계라서.
방계라서 그런 거다.
분한 마음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란슬롯의 뇌리에, 다시 한번 오늘 오전의 대련이 떠올랐다.
“……하.”
쾅!
분노한 란슬롯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단단한 나무 벽이 울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열받는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을 과시하는 건 형님들을 보고 배운 잘못된 습관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상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다들 나를 무시한다, 이거지?”
그간 저를 무서워하고 따르던 아이들이 샬롯과 대련 이후로 저를 슬슬 만만하게 보는 것도 짜증 났지만, 그것보다 더 화나는 건 요제프 황자의 태도였다.
버려진 3황자 주제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반항해 본 적 없는 주제에.
이제 와서.
“러슬 형님께서 갑자기 왜 그 계집애한테 유하게 구시는 건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요제프 그 황자 놈에게는 그 자리에서 본때를 보여 주는 건데. 아니, 샤를로테에게도.”
쾅, 쾅.
다시 한번 벽을 주먹으로 내리쳐 봤지만, 속이 풀리지 않았다.
“내일은, 정말 제대로 교육해 주겠어.”
아주 철저하게 교육해서,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라고 당부하던 2황자 전하의 말씀을 떠올리며 란슬롯은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른 분노를 토했다.
* * *
샬롯은 여느 때처럼 새벽을 알리는 별이 떠오를 때쯤, 자연스레 눈을 뜨고 일어나 가부좌를 틀었다.
매일 운기조식을 통해 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일상적인 의식이었다.
여느 때와 같이 명상을 하며 심법의 귀결을 떠올리던 샬롯은 오래지 않아 운기조식을 그만두고 눈을 반짝 떴다.
그녀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
“……세상에.”
지금까지 이래 본 적이 없는데.
침대가 너무 폭신한 것 때문에, 속이 부들부들하고 달달한 묘한 그 감각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안 됐다.
‘갑자기 이렇게 잘해 주니까 그렇잖아. 속이 너무 울렁거려……’
누가 잘해 주면 잘해 주는 대로 고맙게 받으면 되는데, 그게 또 부담스러워서 좌불안석이라니. 누가 봐도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제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쩌겠는가.
샬롯은 그 조그마한 몸으로 거대한 침대 위를 몇 번이나 굴러다니며 다시 자리를 잡아 보다가 결국 포기하곤 맨바닥으로 내려와 가부좌를 틀었다.
평소보다 짧은 운기조식을 끝낸 그녀는, 베티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쯤엔 이미 무복을 다 차려입고 있었다.
“……어머, 샬롯 아가씨?”
“베티, 좋은 아침이야.”
“어디 가시게요?”
“응. 오늘부터 요제프 황자님이랑 같이 수련하기로 했거든. 혹시 잔소리할 거야?”
베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베티는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그만 작게 웃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보다 요제프 황자에 대해 큰 편견이 없었다.
외모만 봐서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천사 같은 아이였기도 했거니와 샬롯이 쓰러져 누워 있는 동안 커다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병문안을 오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가씨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뚝뚝한 얼굴로도 매일같이 지금 제 상황에서 준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을 준비해 오는 황자의 정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연회 기간인데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아가씨를 걱정해 준 거니까.
다만 아무래도 둘이 어울린다니까 염려가 되긴 했다.
그렇지 않아도 샬롯 님이 여러 가지로 주변의 안 좋은 시선을 받고 계시는데, 거기에 굳이 세티야 가문과 대단히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닌 3황자가 엮이면 좋은 일이 없을 테니까.
“제가 만류한다고 들으실 것도 아니니까…… 전 뭐, 열심히 준비나 해 드릴게요. 제가 아니라도 다른 분들이 만류하실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수련하시는 건 좋은데 다치시면 안 돼요, 알았죠?”
샬롯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하면서 안 다치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베티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최대한 안 다칠게.”
베티는 샬롯의 말에 작게 웃었다.
말하는 것만 들어서는 이미 수십, 수백 번은 수련해 온 사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