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실은 어제 처음 훈련장에 나가 본 거나 다름없는 아가씨가 아니던가. 해묵은 무복까지 찾아 입고 나서서.
“그 옷은 어제 입으셨던 옷이니 벗으셔요. 안 그래도, 오늘도 편한 복장을 찾으실 것 같아서 편한 옷을 몇 벌 주문해 뒀어요.”
베티가 내온 옷은, 샬롯에게 잘 어울리는 붉은색 무복이었다. 가슴팍에는 세티야 가의 상징인 황곰 무늬가 금빛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고작 하루 만에 이런 옷을 준비했다는 것에 놀라서 샬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랑 오늘은…… 지나치게 좋은 일만 자꾸 생기네.”
베티는 샬롯이 머뭇거리며 무복의 자수를 만져 보는 것에, 어딘가 마음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본디 샬롯 아가씨쯤 되는 신분이라면 이깟 무복이 다 뭔가. 드레스도 한 번 입고 다시는 안 입겠다며 새로 맞추는 게 귀족 나리들의 생태였다.
그런데 방을 꾸며 준 거나, 무복을 몇 벌 준비해 준 거로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 가슴이 찡할 수밖에.
“자자, 그렇게 있지 마시고 얼른 입어 보세요. 치수가 잘 맞는지 봐야 하니까요.”
베티가 재촉하고서야, 샬롯은 어제 입었던 황곰 기사단 수련생 복을 벗고 새로운 무복을 걸쳤다.
샬롯은 무복을 입고선 그 위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솜뭉치 같은 것들을 들어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무복에 함께 걸치는 장신구인 모양인데 용도를 알 수가 없었다.
“이건 뭐야?”
“아, 그건…… 무릎이랑 팔꿈치에 대는 거예요. 이리 주세요, 제가 해 드릴게요.”
샬롯은 말랑말랑한 솜이 든 천 주머니를 손으로 조물락거려 보았다. 끈이 달려 있는 걸 보니, 베티의 말대로 무릎에 댈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이걸 무릎에? 왜?”
“혹시라도 다치실 수 있으니까, 보호대를 해야죠. 어제는 미처 준비를 못 했지만……”
“보, 보호구? 아하하. 보호구. 하하하하.”
샬롯은 웃음을 와르르 터뜨리고 배를 잡으며 웃었다.
유모 베티의 눈에 제가 어떻게 보이는지, 정말이지 잘 알 것 같았다.
화산파에서도 보호구를 차는 수련생들이 없진 않았지만, 다섯 살짜리나 그렇게 할까.
하지만 웃음이 나는 한편으로는, 강해지는 것만이 지상 명제인 세티야 가에서 수련하면서 다치는 게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 챙겨 주는 게 너무 마음이 따뜻했다.
샬롯이 너무 웃어 대자 베티는 저도 모르게 뾰로통해져선 허리에 손을 올렸다.
“안전은 중요하다고요.”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호구를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미안해. 그건 마음만 받을게. 후후.”
“……모처럼 무복이랑 색을 맞춰서 만든 건데요.”
“다음에 다치면 꼭 할게.”
“다치기 전에 하라고 만들어진 건데 다치고 나서 하면 어떻게 해요?”
“베티, 정말 좋은 사람이라니까.”
샬롯이 그녀를 다독이자, 베티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요. 그럼 한 번이라도 다쳐서 오시면 이거 꼭 하시는 거예요.”
“알았어, 알았다니까.”
샬롯은 눈가에 눈물이 맺힐 만큼 웃고선 기분 좋게 거울 앞으로 다가가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무복은 제게 잘 어울렸다. 아직 그리 길지 않은 팔다리에 꼭 맞는 길이였다.
“와…… 금방 고수가 될 것 같아.”
“그러시면 좋겠네요.”
샬롯의 말이 그저 어린아이의 허풍이라고 생각한 베티가 웃으며 받아넘기자, 샬롯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보이곤 그녀에게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응. 좀만 기다려.”
고수가 되는 걸, 마치 정해진 일처럼 말하는 걸 한 귀로 흘려들으며 베티는 샬롯의 머리를 땋아 올려 주고 햇볕에 타지 않도록 크림도 발라 주었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샬롯은 베티가 이제 나가도 좋다고 말하자마자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지?”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뚝 떨어졌다.
막 뛰어나가려던 샬롯은 눈앞에 선 장신의 그림자에 놀라 발을 멈췄다.
“……아버지?”
“방은 좀 어때? 흠, 흠. 마음에 좀 드나?”
제롬이 짧은 금발을 쓸어 넘기며 방 안을 턱짓했다. 제법 날카롭게 생긴 가는 선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무관심할 때는 끝 간 데 없이 무심할 수 있더라도, 제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해 주면 그 반응이 궁금하게 마련이었다.
제롬도 그랬다.
어제 해가 천궁 세 번째 자리에 걸릴 때쯤이었던가.
갑자기 러슬이 득달같이 샬롯의 방을 좀 제대로 꾸며 주라고 원성을 부리는 이상한 일을 겪었을 때,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한 귀로 흘렸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꼴은 맞다 싶었다.
지난번에 샬롯이 쓰러졌을 당시, 3황자에다 벤과 아이작까지 그 방에 모여 있는데 저도 모르게 방의 꼴이 초라하다는 생각을 했던 게 떠올랐던 거다.
그리고 요즘의 샬롯이 워낙 전혀 다른 아이가 된 것처럼 말썽 한 번을 피우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굴기도 했다. 그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근신을 하고, 하지도 않던 명상까지 하고…….
그래서 제롬은 러슬의 말대로 샬롯의 방을 꾸며 주기로 한 거다.
명령을 내리지 않아서 그렇지, 그가 말만 하면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집사와 베티가 샬롯의 방에 어울릴 가구와 소품들을 주문했고, 체이커 국에서 권세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세티야 공작가의 주문에 상인들이 물자를 날듯이 조달했다.
처음부터 샬롯의 반응을 기대하고 방을 꾸민 건 아니었지만, 막상 일을 진행하고 나니 샬롯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거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그녀의 방을 찾을 정도로.
샬롯은 그런 제롬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녀는 답지 않게 볼이 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양손의 손등으로 볼을 식혔다. 그러곤 제롬을 올려다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걸 가져 보는 건 처음이라서…… 너무 좋아요.”
최근 들어 지나치게 당돌하게 굴기만 했던 샬롯이 어딘가 부끄럽다는 듯이 구는 게, 솔직히 좀 귀여웠다. 아니, 많이 귀여웠는지도 모르겠다.
제롬은 샬롯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반응을 궁금해하면서도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주의 앞에서도 당당하게 제 할 말을 다 하던 아이가, 공작가의 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정도의 물품들을 보고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그간 그렇게 샬롯에게 부족하게 해 줬나, 하는 자책이 드는 동시에…….
‘뭐랄까, 뿌듯한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까 좀 더 뭔가 해 주고 싶기도 하고…….’
뭘 해 줘도 덤덤하기만 한 아들들에겐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생각도 드는 거다.
“그래?”
“네, 너무…… 너무 감사해요.”
“뭐, 혹시 또 갖고 싶은 건 없고?”
“……네?”
샬롯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롬이 누굴 살뜰하게 챙겨 주는 인물이 절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이런 질문을 해 올 줄은 몰랐다.
“……갖고 싶은 물건이요?”
“그래.”
그녀는 고개를 갸웃 옆으로 기울였다.
기분 좋은 감동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는 건 맞았지만, 제 아버지 제롬이 정말 제멋대로 사는 기분파라는 것도 이번 기회에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제 딸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던 주제에, 또 제 기분이 조금 내킨다고 이렇게까지 뭔가를 해 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어딘가 우스웠다.
샬롯은 이참에 원하는 걸 다 말해 보려고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아니, 딱 하나, 요청해 둘 게 있긴 했다.
샬롯은 요제프와의 수련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슬쩍 겸손하게 밑밥을 깔았다.
“찬 맨바닥에서 자지 않는 거로도 전 충분히 행복해요, 아버지. 이런 것들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아버지밖에 없어요.”
그 말은 반쯤은 겸손하게 보이려는 가장이었지만, 또 절반쯤은 진심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화산파에서 쓸 만한 침상이 없으면 종종 바닥에서도 잠들곤 했던 거다.
제롬도 한 기사단을 운영하는 자였다. 어지간한 말로는 쉽게 설득당할 리 없는 무심하디무심한 그였지만, 샬롯의 말에 섞인 진심에 조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맨바닥?’
물론 샬롯의 방이 그동안 형편없는 꼴이었던 건 맞다.
하지만 맨바닥에서 안 자는 것만도 행복하다니.
이제 보니 샬롯은 공작가의 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품위를 누리기 위한 욕심조차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게다가 유모인 베티가 그 말을 듣고 있는 것도 어딘가 신경 쓰였다. 제가 얼마나 무능하고 한심한 아비로 보일까 싶었다.
제롬은 저도 모르게 샬롯에게 다시 한번 열성적으로 물었다.
“그러지 말고 뭐든 말해 보아라. 이 아비가 그게 뭐든 다 들어주마.”
“정말로 뭐든지요?”
샬롯이 망설여진다는 듯, 천천히 대꾸했다.
제롬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