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그날 이후로 일주일이 훌쩍 흘렀다.
묘하게 조용한 일주일이었다.
검이 부러진 사건 이후로 란슬롯과 아이들 무리는 샬롯과 요제프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고, 샬롯과 요제프도 다른 곳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랄 게 없었다.
아이작과 러슬, 제롬이 곧 있을 칼그림자의 날에 치러질 기사단의 제식 훈련 때문에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기에 더욱 조용했다.
사소한 사건이라면 제롬과 러슬이 샬롯의 방을 몇 번 둘러보고 갔다는 점, 샬롯이 매일매일 싸 오게 된 도시락을 요제프가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워 먹게 되었다는 점 정도일까.
그 일주일 동안 샬롯은 요제프의 수련 상대가 되어 주며 내외공의 수련을 함께했다.
요제프는 처음에는 샬롯이 번번이 목검을 제대로 쥐고 있지도 못하고 떨어트리거나,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을 몸이 따라 주지 않아 균형을 잃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자 상대하기를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완전 다른 사람처럼 급속도로 발전해 가는 그녀를 보며 점점 진심으로 부딪쳐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전력은 아니라는 걸 샬롯은 알고 있었다.
요제프가 전력을 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몸 상태를 어떻게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샬롯은 외공 수련 못지않게 내공 수련에도 몰두했다.
그건 절반은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지만, 절반은 요제프를 위한 것이었다.
2황자가 대회에서 우승하면서부터, 지금도 기울어진 권력 구도가 더 확연하게 기울어지게 되니까.
2황자의 손에 체이커 국이 떨어져서 지옥도로 변하는 그 장면을, 정말로 눈앞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나이가 더 많아도 황제 후보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 덜떨어진 1황자는 2황자를 견제하는 세력이 되어 주지 못하니까 남은 건 3황자 요제프뿐이었다.
요제프가 대회에서 우승해 주길 바라는 건 그런 마음에서도 있었고, 그리고…….
요제프 본인의 복수를 위해서도 그래 주길 바랐다.
그가 자라서 황실 인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식의 복수가 과연 최선의 복수일까?
아니, 그렇게까지 괴롭힘을 당했음에도 건재하다는 걸 과시하는 게 최고의 복수일 것 같았다.
란슬롯에게도, 저를 그리 박정하게 대한 황제에게도, 황후와 2황자 리카르도에게도.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대회 날에는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 주고 싶은 거다.
연무장은 요제프가 그 무엇의 제약도 없이 공정한 무인의 대결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주인공인 요제프의 실력은 누구 못지않다는 것을 잘 아니까.
* * *
그리고 딱 일주일째 되던 날. 샬롯은 꼭두새벽부터 시작했던 운기조식을 마치고 조용히 눈을 떴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에 반짝이는 생기가 돌았다.
샬롯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호흡을 통해 받아들여 단전에 모인 기가, 제법 커다란 구 모양으로 뭉친 것이 느껴졌다.
무림에서라면 정말 10년을 꼬박 수련해야 모을 수 있을 만한 꽤 거대한 기의 덩어리였다.
그것도 순수한 화산파의 심법만을 이용해서 쌓은, 정순한 기운이었다.
전생의 제가 가지고 있던 정도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생각을 하니 그녀의 마음이 미친 듯이 설렜다.
샬롯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슬슬 대주천을 시도할 때가 됐어.’
소주천이니, 대주천이니 하는 것은 몸속에 있는 길인 혈을 따라 천천히 기를 돌리며 몸속의 길을 확보하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누구나 기가 흐르는 길이 있지만, 무림인들은 그 길들 외에도 우회로를 여러 개 가지면서 자신이 배운 심법에 따라 기를 이동시키며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상체에 기를 돌리는 소주천을 완성한 것은 닷새 전이었다.
그녀가 이번에 시도하려고 하는 대주천은 몸 전체의 혈도를 따라 기를 움직이는 것이었다.
소주천이 무림인으로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한 발판이라면, 대주천은 그 완성이었다.
살포시 눈을 감고 다시 내면에 집중한 샬롯은 화산파의 심법에 따라 단전에 있는 구체를 움직였다.
처음 대주천을 시도하는 이들이 흔히 하는 실수로, 조급해하며 기를 빨리 이동시켜서 혈이 상하곤 하는데 샬롯은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샬롯의 몸으로 대주천을 시도하는 게 처음일 뿐이고, 충분한 기가 모이길 기다렸을 뿐이지, 그녀는 이미 이 경지에 도달해 본 적이 있었다.
기의 구슬을 천천히 굴려 하단전에서 회음으로, 회음에서 위중으로, 위중에서 용천으로…….
모든 혈자리마다 기의 구슬을 오래도록 머무르게 하며 길을 넓히고, 천천히 다음 혈로 기를 움직였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충분한 기는 그녀의 의도를 따라 충실하게 몸속의 막힌 길들을 열어 갔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의 존재마저 잊은 채로 그녀는 기를 움직여 갔다.
백회를 지나, 다시 하단전으로 기의 구슬을 끌어 오고서야 샬롯은 아주 긴 숨을 토했다.
“……됐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이미 다 저물어 있었고, 방 안엔 은은한 매화 향이 가득 차 있었다.
* * *
“……샤를로테?”
일주일 동안 매일 얼굴을 마주한 사이였으면서도, 요제프는 마치 샬롯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처럼 그녀의 이름을 낯설게 읊조렸다.
이른 아침부터 수련장을 찾아온 샬롯은 그런 요제프의 반응이 재밌어서 눈을 접어 가며 웃었다.
“왜 그렇게 불러?”
“……아니,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착각이었다.”
샬롯은 재밌다는 얼굴로 요제프의 머리를 살살 쓸었다.
“진짜 예민하고 감이 좋네. 이 누님이 대주천에 성공했거든.”
“그놈의 누님 소리는…… 그런데 대주천? 그게 뭐지?”
샬롯은 작게 웃었다.
“좋은 거 있어. 내 몸속의 길을 정비했달까. 아무튼,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이게 뭘 뜻하냐면……”
샬롯이 말을 고르는데, 요제프는 또 한 번 샬롯을 그 새카맣고 요요하게 아름다운 눈동자로 한참 노려보듯 응시했다.
샬롯은 처음에는 그 시선을 받을 때마다 의식했지만, 이젠 요제프가 저를 의심하듯 바라보는 것도 워낙 익숙해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샬롯은 자신감과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요제프에게 뭔가를 말하려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하려는 것은 요제프의 엉망으로 흐르는 기의 흐름을 바로 잡는 거였다.
사실 무림에서도 고수가 하수의 혈맥을 대신 타동해 주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일단 상대의 혈맥을 타동해 준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심력과 내공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일인 데다, 만약 일이 잘못 틀어질 때는 피시술자가 심법의 구결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니므로 완전히 몸이 망가져 폐인이 되어 버릴 가능성까지 있었다.
즉, 몹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다.
준비되었다는 것 자체로 들떠 있었지만, 사실은 들뜬 김에 밀어붙일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요제프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단 들어 봐.”
“그래.”
“네 몸 상태는, 음…… 아주 좁은 산길 위를 사두마차들이 달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오러를 말하는 건가?”
“그래, 맞아.”
“오러는 외부에만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끌어다 쓰는 건데……”
“그건 이론상의 문제지. 솔직히 너도 어느 정도 체감하고 있을 텐데, 오러를 쓸 때마다 몸 상태가 더 극단적으로 안 좋아지지 않아? 혹은, 몸이 안 좋을 때는 오러를 전혀 쓸 수 없게 되거나.”
요제프는 샬롯의 얼굴을 빤히 한참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그거 봐. 네가 본능적으로 몸속으로 이미 나 있는 길을 통해 오러를 지나게 하는 법을 익혀서 그래. 내가 볼 때 이곳의 소드마스터들은 그 정도로 강대한 오러를 쓰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뿐이야. 너처럼.”
요제프는 샬롯의 말을 들으며 눈을 아주 느리게 깜박였다.
꽃잎 같은 그의 긴 속눈썹이 느리게 팔랑였다.
샬롯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되물었다.
“이해한 거야? 이해한 거지?”
“지금 샤를로테, 네가 무슨 사이비 학파의 수장처럼 보이는군.”
“……아니, 이해했냐고.”
“……솔직히 들어 본 적조차 없고, 비슷한 내용을 접한 적도 없는 이야기지만…… 좋다.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래서?”
요제프가 억지로 스스로를 이해시키려는 듯 몇 번 더 눈을 깜박거리는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그렇게까지 낯선 이야기라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꺼지라고 할 법한데, 자신이 그간 요제프에게 그만한 신뢰를 주긴 했던 걸까.
샬롯은 대견하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당겨 웃곤 다시 한번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응. 그래서 내가 해 주려고 하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데……”
“근본적이라면…… 그 산길을 넓히겠다는 건가?”
“아, 맞아. 응. 근데 지금까지 해 온 게 바로 그거거든. 산길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워서, 임시로 좀 흐름이 원활하게 하는 거?”
요제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마저 쏟아 냈다.
“그런데 그걸로는 임시방편밖에 되질 않으니까. 내가 하려는 건 새로운 길을 뚫는 거야. 네가 단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네 몸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길을.”
“새로운 길이라…….”
요제프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조차 없는 이야기를 입에 담듯, ‘새로운 길’이라는 단어를 아주 느리게 발음했다. 하지만 그 뒤의 결단은 빨랐다.
“좋아.”
요제프가 빠르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