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하늘하늘하게 안이 비치는 무복을 입은 사내들이 대회장 한가운데를 장식했다.
칼춤을 추는 사내들 사이로, 북소리에 맞춰 긴 길이 놓여지고 피로 물든 것처럼 새빨간 옷을 입은 황제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장관이었다. 황제의 뒤를 따라 각 공신들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은.
그 공신들 중에서도 가장 앞에 선 것은 명실공히 체이커 국의 가장 넓은 부분의 국경에 군사를 파견하고 있는 세티야 공작가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탄티누스 후작에 이어 서열에 따라 귀족들이 입장했다.
열을 맞춰 걸어 들어온 이들은, 무희들 사이에 도열하여 섰다.
무희들이 길고 흰 천을 들어 황제와 가신들의 머리 위를 우르르 덮었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따가울 정도로 대회장 위를 비치던 햇빛이 지독하게 연해지더니, 마치 그릇처럼 넓게 생긴 원형 경기장의 한쪽 끝부터 순식간에 그림자가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오오오.”
“칼그림자의 날이 시작되었다!”
다른 관중들이 모두 그러는 것처럼, 샬롯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동그란 모양이 서서히 잡아먹히더니, 이내 완벽하게 그림자 속에 갇혀 테두리 부분만 가늘게 빛을 발했다.
‘……이게 칼그림자의 날인가.’
샬롯은 칼그림자라는 말의 정체를 다시금 깨달았다.
이 현상 자체는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무림에서도 이미 본 일이 있었다.
기이한 자연현상이었지만, 그런 일이 규칙적으로 일어난다고 들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천천히 그림자가 지나고 태양이 다시 원 모습을 완벽히 드러냈다.
거의 동시에, 무희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듯 흩어지며 흰 천을 잡아당겼다.
붉은 옷차림으로 도열한 황제와 가신들의 모습이 다시 드러나는 그 순간에, 다시 내리쬔 빛이 그들을 눈부시게 비췄다.
“와아아아!”
“와아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만세!”
큰 함성이 대회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넓디넓은 경기장을 가득 채운 무희들이 일제히 정교하게 만들어 낸 예술은, 사람을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다.
마치, 황제와 가신들이 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춰서 해마저 빛을 잃은 듯 보였다.
샬롯도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냥 작중에서 빨리 퇴장했기 때문에, 황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황제도 어지간히 정치 수완이 있는 사람임은 분명하네. 그냥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을 이렇게까지 이용하다니.’
대회장으로 쏟아지는, 정말로 귀가 찢어질 듯한 우레와 같은 함성 또한 황제의 인기를 입증했다.
‘이렇게까지 현 황제에 대한 충성도가 대단하다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요제프가 황제의 눈에 들기만 한다면…….’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1, 2황자 중 하나에게 당연히 황위를 물려줘야 한다는 분위기에 파문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샬롯이 원하는 건 그거였다.
돌 하나.
지금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틀을 깨부술, 그 돌 하나.
샬롯이 희박한 활로를 점치며 대회장의 분위기를 살펴보는데, 황제가 조용히 손을 위로 펼쳐 보였다.
그러자 요란스레 무릎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던 관중들이 일제히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시끄럽던 대회장이었는데.
“우리 대제국 체이커의 보물, 칼그림자의 날이 돌아왔소. 하늘도, 푸른 대지의 신도, 전쟁의 신 세인트도 우리를 굽어살피시오.”
황제가 고요하기 짝이 없는 대회장에서 고고히 연설하는 목소리는, 대회장 구석구석까지 잘 전달되었다.
“지금부터, 짐과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성한 칼그림자의 날을 맞이하여 체이커 국의 전사들의 기백을 가리는 대회를 시작함을 천명하는 바이다.”
샬롯은 다시 한번 몸으로 느꼈다.
‘체이커 국은 정말…… 정말로 무를 숭상하는 나라구나.’
그녀는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마치 일국의 국민들이 모두들 군인이라도 되는 느낌이야.’
전생에 보았던 황제의 군대 같았다.
무림은 워낙 자아가 강한 이들뿐이라 이렇게 일괄적인 통제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지만, 나라를 통제하고 지켜야 하는 황제의 군대에는 엄한 규율이 있었다.
지금까지 내도록 세티야 가 안에만 몸담고 있어서, 나라 전체의 분위기를 이렇게 체감할 기회가 없었다.
아주 느리게, 짜릿하게 기분 좋은 긴장감이 몸을 감쌌다.
정말로, 이 대회가 가지는 중요성이 느껴져서.
그냥 신진 인사의 무도 대회 한 번으로 그치는 게 아닐 거라는 게 느껴져서.
여기에서 우승한다면, 정말로 이 나라 그 어딜 가도 무시당하지 않는 존재가 되리라는 게 자명했다.
아마, 영웅이 될 거다.
‘그 자리를, 리카르도, 2황자에게 내어 주지는 않을 거야.’
아이작과 2황자가 결선에서 붙는다면, 아이작은 리카르도를 위해 승리를 양보할 게 틀림없었다.
우선, 요제프가 2황자를 결선에 내보내어서는 안 된다.
리카르도가 아니라, 요제프가 승리를 거머쥐어야만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샬롯 그녀 자신이 우승해야 한다.
“긴장돼?”
복잡한 머리를 팽팽 돌리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는데, 문득 왼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샬롯이 고개를 꺾어 옆을 돌아보았다.
짧은 백금발에 황곰의 자수가 들어간 띠를 이마에 두른 러슬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긴장할 필요도 없어.”
러슬은 지난번 황곰 기사단 수련장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지금까지 샬롯에게 퍽 살갑게 대해 주었다.
워낙 그 태도에 일관성이 있으니까, 처음에는 러슬의 진의를 의심하고 불편해하기만 하던 샬롯도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쯤 그의 호의를 받아 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전생처럼 굳이 누구의 앞에서나 강해 보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 안 해.”
러슬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 이리도 깊게 웃는 걸 보니, 샬롯이 반말을 해 준 게 기쁜 눈치였다.
샬롯으로선 처음에 툴툴거렸던 이후로 제법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게 웃기기도 했고, 언제까지 저럴까 싶기도 했다.
“첫 출전인데 긴장되는 게 당연하지, 뭘 그걸 대답하는 데 오래 고민해?”
“응.”
“나도 대회장에 올 때면, 긴장해. 어쩔 수 없지.”
“오라버니도?”
“그럼. 아이작 형님이 아니고서야, 누구든 긴장할걸.”
그러자 샬롯의 오른쪽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아이작이 입술을 비틀어 조금쯤 섬뜩해 보이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목덜미까지 오는 백금발 아래로, 황색 망토를 걸치고 몸을 덥히고 있는 걸 보니 당장 출전하지 않아도 되는 자의 여유가 돋보였다.
“긴장을 하게 만들어 줄 생각을 해 보든가.”
“……아니, 거 대회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사람 기를 죽이기 있습니까?”
“내가? 모르겠는데? 기가 죽었으면 집에 가서 사냥개나 돌봐.”
“형님!”
샬롯은 위로 고개를 쳐들고 러슬과 아이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음 둘을 함께 식당에서 만났을 때는, 묘하게 둘 사이에 거리감이 있다고 느꼈었다. 아이작이 일방적으로 러슬을 무시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세티야 가 특유의 백금발이며 남자다운 턱, 너무 도드라지지 않은 광대, 날렵한 콧날 등등 퍽 닮은 인상을 하고도, 둘은 이상하리만큼 거리감이 있었다.
그랬던 둘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소설 속에서, 러슬은 아이작이 공작이 된 뒤 파견이라는 명목으로 먼 외국으로 쫓겨났던 것 같은데…….’
훗날 장성하여 어른이 되는 미래에도 꽤 살벌하던 둘의 사이가, 묘하게 가까워진 건 왜일까?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시선만은 그녀에게 고정한 두 오라비를 올려다보며 샬롯이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에, 황제가 큰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예선에 참여할 용기 있는 체이커 국의 젊은이들은 모두 일어나라.”
1열에 나란히 앉아 있던 예선 참가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사이 비어 있는 네 자리에 황족의 아이들이 자리 잡았다.
샬롯은 리카르도 황자의 뒤로 들어서는 요제프 황자를 찾아냈다.
역시 공식적인 자리라 그런지, 요제프도 평소와는 달리 제법 격식 있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다른 두 황자처럼 자수 천으로 된 타블리온을 두르고 있었고 머리에는 나뭇잎을 엮어 만든 띠를 두르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요제프의 흰 피부는 더욱 돋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가 더 도드라졌다.
그러고 있는 모습이 꼭 요정 같아 보여서, 샬롯은 혼자 작게 웃었다.
‘책 속에서 딱 나오는 장면이 아니라, 이렇게 어린 시절의 요제프를 볼 수 있게 된 게 좋은 일인 것 같아. 너무 귀엽잖아.’
요제프 황자도 조용한 시선으로 샬롯을 바라보았다.
결코 가깝지 않은, 멀디먼 경기장의 양 끝에 선 둘은 고요한 시선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