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54)화 (54/123)

#54.

샬롯은 이제 볼일은 다 봤다는 듯 몸을 돌려 다시 감독관을 향해 떠났고, 대회장을 지켜보던 케이트는 떠나가는 샬롯의 등을 다시 바라봤다.

샬롯이 궁금했다.

고마웠고, 미안했고, 동시에 저를 구해 주는 그 마음의 여유와 실력이 너무 존경스럽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샬롯과 이야기를 한 번 더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초조할 만큼.

매일 지루하고 적성에 안 맞다고만 여겼던 창 수련을, 좀 더 제대로 해 둘 걸 하는 후회가 들 만큼.

어쨌든, 샬롯의 앞에 당당히 나서기 위해서라도 여기만은 지나가야 했다.

케이트는 이제는 전혀 떨리지도, 굳어 있지도 않은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창을 주워 들었다.

“기권은?”

그때 감독 한 명이 케이트 쪽으로 다가왔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기권하지 않겠냐는 권유를 하러 온 눈치였다.

케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답지 않은 선택인 줄은 알았지만, 갑자기 어디서인지 모를 용기가 났다.

“아뇨. 다시 해 볼게요.”

이례적인 사건이 있었음에도, 예선전은 별 탈 없이 끝까지 진행되었다.

차례로 슬라임들이 쓰러졌고, 참가자들이 기권을 선택하거나 혹은 어렵게 따낸 코인을 제출했다.

비야키 세티야도 빠르게 코인을 제출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오러를 두른 속검으로 슬라임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그리 애를 먹진 않았지만 제 실력에 비해선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럴 때는 차라리 무겁고 리치가 긴 창 같은 거로 쪼개 버리는 게 이득인데.’

그래도 비야키가 시간을 지체했다 한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비야키는 감독관의 앞으로 가면서 란슬롯이 바보처럼 슬라임 두 마리를 한 번에 상대하고 있는 모습을 흘끗 바라보곤 제가 첫 번째라고 확신했다.

그가 감독관에게 코인을 제출했을 때, 상자 안으로 톡 밀어 넣은 코인은 바닥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 대신 짤랑- 하는 금속음을 냈다.

“어라, 뭐야. 내가 처음이 아닌가?”

비야키는 의아한 눈으로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한 명, 한 명이 코인을 제출할 때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을 보내곤 하던 관중석은 잠잠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야말로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세티야 가의 후계자 후보인 저가 아닌가.

그렇게 그가 묘한 눈으로 관중들을 돌아보던 그때, 그렇게 고요하기만 하던 관중석에서 뒤늦게 쩌렁쩌렁한 함성이 쏟아져 내려왔다.

와아아-.

와아아아아-.

만세-!

샤를로테 만세-!

그 함성 소리는 비야키 세티야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 * *

관중석에서부터 쩌렁쩌렁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감독관에게 코인을 제출한 샬롯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는 순간이었다.

와아아-.

만세-!

만세-!

체이커 국은 무를 숭상한다.

지도자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가치는 좋게도 흘러가고 나쁘게도 흘러가긴 했지만, 국민 모두의 마음속에는 기사도에 대해 동경이 있었다.

단순히 강자만을 동경하는 게 아니라, 그 강자에게 다른 사람들이 지원해 주고 아껴 주고 응원해 주는 만큼 그가 약자들을 지켜 주길 바라는 마음.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연히 사람들은 열광하는 거다.

경쟁을 위해 이날까지 피땀 흘려 조금이라도 더 남들보다 위에 서기 위해 노력해 왔을 어떤 이가, 다른 경쟁자를 돕는다는 것에.

* * *

라모레이 탄티누스 후작은 의자를 꽉 움켜쥐었다.

딸과 꼭 닮은 짙은 푸른색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후작은, 손에서 단 한 번도 힘을 풀지 않고 경기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저 아래의 대회장에서 케이트가 꽤 고전을 함에도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슬라임 한 마리를 해치우고 코인을 높이 들어 보일 때에야 겨우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후작의 남편이 그런 그녀에게 망토를 벗어 건네주었다.

“이거라도 좀 걸쳐요.”

탄티누스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요. 그보다 저 샤를로테라는 아이. 저 아이에 대해서는 풍문으로만 들었는데…… 정말 대단한 아이네요. 대회가 끝나면 직접 찾아보고 감사 인사라도 전해야겠어요.”

후작의 남편은 의아한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지금 굳이라고 했어요? 샤를로테, 저 아이가 우리 케이트를 구해 줬잖아요.”

“그냥 쇼맨십 같은 거 아니었을까요? 지금도 저길 봐요, 케이트가 알아서 한 마리쯤 해치울 수 있잖아요.”

“……여보.”

“항상 부인은 꼭 그렇게 케이트를 약하게만 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 아이를 제가 그렇게 가르쳤는데도, 계속 심약하게 크는 거예요. 그래도 대회 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저만큼 한 것만 해도 제 그릇보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탄티누스 후작이 이를 꽉 깨물고서 제 남편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하나뿐인 제 외동딸을 지극히 사랑했다.

후작가에서 대대로 황후를 배출해 왔다 하더라도, 제 딸만은 황제의 부인이 되지 않고 좀 더 제 발로 걷고 자유롭게 삶을 누리길 바라서 창술을 가르쳐 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냥 딸이 행복하게 자라길 바랐다. 제 자리를 이어도 좋겠다고도 생각했고, 다른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냥 그게 다 딸의 행복을 위한 거였다.

그녀의 남편은 본인이 검에 재능이 없어서 그런지, 케이트가 예상치도 못하게 무술에 대한 재능을 발현하는 순간부터 퍽 엄하게 딸을 벼랑에 내몰듯 가르쳐 왔다.

자신의 남편이 워낙 내조를 잘하는 편이었고, 제 딸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하니 그걸 마냥 말릴 수도 없어서 그녀도 어느 정도는 내버려 두었는데…….

케이트가 이번 칼그림자의 날에는 참전하지 않고 5년 뒤에 참가하면 안 되겠냐고 울먹이면서 말할 때도 억지로 내몰더니만.

‘……방금, 케이트의 표정은 거짓이 아니었어. 그 떨리는 목소리도.’

분명, 큰일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샤를로테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을 거다.

“……그 이상 말할 거면, 오늘 밤에는 후작가 복도에서 자게 될 줄 알아요. 아니, 이 대회장 바닥에서 잘 줄 알아요.”

탄티누스 후작이 이를 갈며 으르자, 그제야 남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참 보기에는 사랑스러운 이지만, 가끔 도를 넘는다니까.’

탄티누스 후작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코인을 제출하고 대기실로 들어가는 딸 케이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샤를로테. 샤를로테 세티야.’

이전까지는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이름이, 그녀의 뇌리에 단단하게 각인되었다.

* * *

샬롯은 안내를 받아 예선전을 통과한 이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새하얀 방에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예선전에 참가하는 아이들이 우르르 함께 몰려갈 때만 해도, 정말 참가자가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 방의 구성은 꽤 단출했다.

기껏해야, 한 조에서 열서너 명 정도가 살아남았을까?

슬라임과의 대전에서 부상자도 속출했기 때문에, 슬라임에게서는 이겼더라도 본선에는 진출하지 않는 아이들도 많은 모양이었다.

방 안의 인원수를 눈으로 헤아려 보던 샬롯의 눈에,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고요하게 서 있는 아름다운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어서 와.’

입 모양으로 저를 반기는 요제프에게, 샬롯은 환하게 활짝 웃어 주었다.

‘그것 봐. 난 걱정 하나도 안 했다니까. 그깟 예선쯤 당연히 통과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심 샬롯은 요제프의 얼굴을 보고서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가끔 제가 읽은 이야기가 제 존재 때문에 비틀리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불안함이 있긴 했다.

뭐가, 어디서 뒤틀릴지 모르니까.

요제프의 곁으로 다가가려는데, 뒤늦게 샬롯의 존재를 알아챈 아이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뭐야, 3조에서 벌써 온 거야?”

“샤를로테잖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3조 대기실은 뭐 따로 있어?”

“샤를로테가 제일 먼저 잡고 왔나 본데?”

샬롯이 슬라임을 가장 먼저 잡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슬라임까지 처리하고 왔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래도 놀라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샬롯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은 없었다.

워낙에 평소 샬롯을 무시하던 이들뿐이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녀가 첫 번째로 슬라임을 처리하고 왔다고 해서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거다.

“샬롯……?”

그때 검을 닦고 있던 러슬이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눈에서 이채를 발하며 일어났다.

그는 샬롯의 뒤를 흘끗 바라보았지만, 비야키도, 란슬롯도 보이지 않았다.

‘그간 정말 수련을 열심히 했구나, 대견하기도 하지. 그런데 오러를 쓸 줄 모르면 여길 통과할 수 없을 텐데……?’

러슬은 의아함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검을 갈무리하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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