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 3조의 세 번째 경기가 곧이어 진행되겠습니다. 출전자는 란슬롯 세티야와 샬롯 세티야입니다.
사회자가 대진표에 남아 있는 이름들을 읊었다. 그 소리는 마법에 의해 온 대회장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로 바뀌어 대회장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역시 마법은 신기하다.
샬롯은 멍하니 넋을 빼고 그것을 듣고 있다가,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내 차례네.”
샬롯은 제 허리에 걸려 있는 검집을 톡톡 두드려 보았다.
급하게 구한 것이었지만, 제 검을 가지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정말로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여기서는 볼 수 없는 매화 장식이 되어 있는 것도 꽤 좋았고.
이것과 함께라면 든든했다.
와아아아-.
그때 뜻밖의 함성이 쏟아져 내리는 게 들렸다.
“샤를로테 님! 보여 주세요!”
“응원합니다!”
이상할 정도로, 샤를로테의 이름을 연호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샬롯은 그 응원 소리가 오롯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흔히 있는 일이다.
강자와 약자가 맞붙게 되면, 저도 모르게 약자를 응원하게 되는 심리는.
그간 그녀를 한심하다고만 여겼던 이들도, 재능 하나 없던 샬롯이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하자 저도 모르게 그녀를 응원하게 되는 거다.
하지만 그뿐.
‘지금까지 나를 응원하고 믿어 왔던 사람들만 생각하자. 저런 군중심리에 휩쓸린 응원은, 내게 득도, 해도 될 게 없어.’
“이제 가?”
요제프 황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자의 까만 눈동자에는, 그녀를 향한 신뢰가 서려 있었다.
샬롯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녀와.”
“응.”
샬롯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요제프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조금이나마 들었던 긴장감마저도 모두 다 녹아 버릴 만큼의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그녀는 기분 좋게 몸을 돌려 대회장을 향해 걸어갔다.
* * *
제롬은 칼그림자의 날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 편하게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대회장처럼 한곳에 사람이 밀집된 순간은 생각보다 꽤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제 휘하의 기사단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단들에 용병까지 굴려서 경비를 단단히 서야 했다.
게다가 워낙 많은 관중이 한 장소에 몰려 있다 보니 당연히 이런저런 크고 작은 사고도 있었다.
그것의 대부분이 세티야 가의 권위로 무마할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제롬은 아이들을 배웅해 준 뒤부터는 여기저기 바삐 불러 다녀야 했다.
그래서 대회장에 다시 입장한 건, 예선이 끝난 뒤였다.
카밀라는 제롬이 땀을 닦으며 제 옆자리로 들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대회장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머님의 이목을 저렇게까지 끄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카밀라에게 재능과 인품을 유일하게 인정받아 후계자 후보로 인정받았던 형, 로룸의 첫째 아들. 아이작 세티야.
제롬은 조금 입맛이 쓴 얼굴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정해져 있는 답을 입에 올렸다.
“벌써 아이작 차례가 왔습니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카밀라의 주홍색 눈동자가 한 점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제롬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예상했던 그 누구도 아닌, 세티야 가에서 유일하게 분홍색 머리를 하고 있는 여자아이였다.
“……샬롯?”
제롬이 얼빠진 소리를 내는 것을 듣고서야, 카밀라가 입을 뗐다.
“제롬.”
“네? 네. 가주님.”
“저 아이는, 당최 긴장이라는 걸 하지 않는구나. 다 큰 아이들도, 이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는 당연히 저도 모르게 위축되거나 흥분하는 법인데.”
“……지금 제 여식을 말하는 게 맞습니까?”
“그래, 샤를로테 말이다.”
샤를로테.
카밀라의 입에서 그 이름이 언급된 것 자체가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 제롬은 그걸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너무 의외라고만 생각하던 제롬은, 너른 대회장을 의연하게 둘러보고 있는 제 딸을 바라보았다.
분홍빛 머리를 하나로 높게 묶어 올리고, 소매가 짤막한 붉은 무복을 입은 제 아이는 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걸맞게 제법 귀여웠다. 허리에 차고 있는 꽃문양의 검집과 검이 마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였다.
최근에는 썩 얌전하게 돌변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딸이었지만, 어쨌든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딸이, 어떻게든 예선을 통과했다는 소식은 일하면서 이미 들었다.
방계의 아이들보다도 먼저 떨어질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예선을 통과하다니.
당장 며칠 후면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샬롯이 그 관문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너무 장했다.
너무너무 대견하고, 역시 요제프와의 수련을 허락해 준 제 너그러운 마음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그게 전부인데…….
‘어머니께서 왜 저러시는 거지……? 예선에서 떨어지는 게 당연할 아이인데 살아남아서 그러나?’
제롬은 이마를 긁으며 종알거렸다.
“원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 그렇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다니, 예선 운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이게 좋은 경험이 되었을 겁니다. 란슬롯과의 대진인 모양인데, 여기서 당연히 지겠지만 얻어 가는 게 있겠지요.”
대회장만 빤히 바라보던 카밀라가 제롬의 말을 듣고선 숨을 크게 뱉어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롬은 그 몸짓을 아주 잘 알았다.
그녀가 자신이 하는 말이 얼토당토않다고 여길 때 하는 행동이었다.
“……제가 뭔가 잘못 말씀드렸습니까?”
카밀라는 혀를 작게 찼다.
“네가, 참 검술은 뛰어난데.”
“……부족한 점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여식이 저리 잘 컸는데도, 네가 그간 아무것도 몰랐던 이유를 알겠구나.”
“네?”
“눈이 없어, 눈이.”
“……그게 어떤 말씀이신지.”
제롬이 의아한 눈을 했지만, 카밀라는 더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카밀라는 양손을 가볍게 깍지 끼고, 부드럽게 그 위에 턱을 올리고선 대회장을 주시했다.
그녀는 제롬과는 정확히 반대로 예측했다.
이다음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여기서는 저 여유를 가지고 질 수가 없었다.
‘……샤를로테가 저런 아이였다니.’
카밀라의 눈이 샤를로테의 걸음 하나, 손짓 하나를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제롬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샤를로테를 바꿔 놓았는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든 것을 지켜보아야 할 일이었다.
지금의 샤를로테는 가주인 제 눈을 오래 끌 만한 가치가 있었다.
* * *
쿵.
방패가 바닥을 찍었다.
은발에 가까운 백금발 아래로, 녹빛 눈동자가 샬롯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 햇빛에 반짝거리는 눈빛에는, 언제나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곤 했던 은근하게 깔려 있었던 경멸과 무시 같은 것은 하나도 녹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적대감과 지독한 승부욕이 숨어 있었다.
샬롯은 조금 놀라서 제 앞에 선 란슬롯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달랐다.
기백도 달랐다.
날카로움도 달랐다.
‘……아마, 실력도 달라졌을 것 같은데.’
샬롯은 천천히 입술 끝을 끌어올려 긴 호를 그리며 미소 지었다.
‘재밌어.’
그녀는 이게 무술의 재밌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무림에서는 그 수많은 무림인이 다 미친 듯이 강함만을 찾아서 몰두한다. 그런데도 정말로 ‘간절함’을 가진 사람이 과연 그중에서 몇이나 될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도화였던 제가 그나마 남들보다 성취가 빨랐던 이유도 그것일지도 몰랐다.
약하디약한 사람부터 천외천에 닿은 고수에 이르기까지 수십, 수백의 벽이 서 있다고 한다면 그 벽을 뚫거나 넘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시간이라도, 정말 얼마나 간절함을 가지고 몰두하는가. 하나의 동작을 완성해서 수행하려고 어디까지 해 보았나. 또 뛰어넘고 싶은 상대방을 얼마큼이나 가졌는가.
그 간절함을 가지는 순간, 그 이전까지와는 다른 사람처럼 순식간에 사람이 바뀌는 점이 무술이 가진 재미였다.
바로 지금의 란슬롯처럼.
‘……아무래도, 기폭제가 된 건 바로 나인가 본데.’
마차에서, 제게 거꾸러진 게 자존심이 상했을까?
아니면 뭘까?
뭐든 좋았다.
그녀는 란슬롯이 재능을 가진 것에 비해서는, 제가 노력하기보다는 남을 깎아내리는 데 열중하는 게 아쉽다고 느꼈었다.
작중에서도, 아이작이 수장이 되었을 때 가치 없는 전장의 말로 이용당하다 생을 마감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란슬롯이 어떤 계기로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게 좋았다.
펄럭-!
감독관이 샤를로테 세티야와 란슬롯 세티야의 1:1 대전이 시작됨을 알렸다.
그때까지 줄곧 침묵을 지킨 채, 집중한 눈으로 샬롯만 바라보고 있던 란슬롯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랬지. 이미 네가 나보다 뛰어난 걸 내가 아는데, 굳이 덤비는 게…… 네가 여자라서냐고.”
“어? 어, 그랬지.”
“아니, 아니다. 생각해 봤는데, 그런 건 아니었어.”
“……응?”
“그냥, 내 아래에 있는 한심한 인생들을 보면서, 그래도 내 아래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보는 게 마음이 편했어. 심지어는, 그게 더 잘난 직계 출신이면 더 좋고.”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란슬롯을 보며, 샬롯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그녀의 고개가 위아래로 주억거리는 것을 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그냥 그런 게 아니었다고 이야기를 해 두고 싶었다. 그뿐이야.”
그게 대화의 전부였다.
샬롯의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던지 그는 곧장 지독히 집중한 눈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