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주목이 그리 달갑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 짐작이 안 되니까.
『서방환상연애소설전집11-순애보 공주님은 사랑받고 싶어!』와는 이미 꽤 많은 전개가 바뀌었다.
일단 샬롯 그녀 자신이 가장 큰 변화의 구심점인 것은 어쩔 수 없을 거다.
원래는 중간에 퇴장해야 하는 인물이 계속 존재하는 거니까.
샬롯의 행동이 자꾸 돌멩이가 되어 정체되길 원하는 호수에 파문을 그리게 되는 거다.
하지만 그런 변화들은 지금까지는 그렇게까지 거대하지 않았다.
정말로 사소하고 많은 변화를 낳았지만,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칠만한 대사건이다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제 주변 사람들이, 샬롯을 대하는 태도가 좀 예상 못 하게 바뀌는 정도? 란슬롯의 검 실력이 예상 밖으로 일취월장한 정도?
그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부턴, 다를 거야.’
대회의 우승자 자체가 바뀔 거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이 바뀐다고 생각해야 해.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줄거리가.’
샬롯은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리카르도가 이미 패배한 시점에서 이 대회의 우승자는 바뀔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우승자는 2황자였으니까.
샬롯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결선을 앞두고 대회장을 정리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관중석으로부터는 계속해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작은 거인, 샤를로테!”
“아이작 세티야, 만세!”
“요제프 황자님, 응원합니다!”
“비야키 세티야, 만세!”
요란하게 쏟아지는 함성과 응원 속에는, 결선까지 올라온 이들의 이름이 고루 섞여 있었다.
작은 거인이라니.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호는 누가 지어 붙이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도화였던 시절에도 제대로 된 호를 한 번 가져 본 적 없는 샬롯은 그게 썩 싫지 않아 작게 웃음을 흘렸다.
‘투명 인간이니, 쭉정이니 하는 별명보다는 그나마 좀 낫네.’
하지만 역시,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요제프 황자를 향한 응원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요제프와 러슬의 대전 이후부터였을까?
이 대회 시작 전까지만 해도 요제프 황자는 정말이지, 역적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너무 당연하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만약 예선전에서 누가 요제프 황자의 응원을 소리 내서 했다면, 그 사람은 정말 2황자의 손에 어떻게 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런데, 반나절 만에 여기까지 왔어.’
요제프 황자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보다, 그에 대한 응원을 대회장에서 소리 내어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대단한 거였다.
샬롯은 작게 심호흡을 하며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회가 시작될 때만 해도 머리 위에 우뚝 솟아 있던 태양은 어느새 꽤 기울어 있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청명하고 맑디맑았다.
- 지금부터, 대망의 결승전이 시작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서조차, 대단한 흥분이 느껴졌다.
샬롯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종이 열어 주는 문으로 향했다.
* * *
칼그림자의 날의 볼거리는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대회장은 천장이 둥글게 뚫려 있지만, 워낙 각 벽의 높이가 높았기 때문에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아주 짧은 시간만 햇빛으로 밝게 비쳤다.
해가 조금만 기울어도, 금세 온 대회장은 어둠으로 물들게 마련이었다.
막, 해가 대회장의 서쪽 담을 완전히 넘으려던 순간이었다.
딴! 딴! 딴!
허공에 아름다운 빛의 구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수십, 수백 개가 넘는 빛의 구들이 밝혀질 때마다 관중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마법사들이 나오려나 봐!”
“드디어……!”
그리고 곧이어 예선전 때 그랬던 것처럼, 대회장으로 곧장 연결되는 방의 벽이 열리면서 마법사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망토에 연결된 뾰족한 후드 모자를 쓰고 얼굴도 두건으로 철저하게 가린 마법사들은 순식간에 대열을 형성했다. 그들은 넓은 원 모양의 대회장 바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섰다.
대열이 모두 완성되자 그들은 서로 말조차 주고받지 않고서 동시에 스태프를 움직였다.
쿵쿵, 쿵, 쿵쿵.
마법사들은 일정한 박자로 바닥을 두드리며, 묵주와도 같은 긴 꾸러미를 손으로 하나씩 만져 댔다. 그 묵주에는 뒤집힌 깃발과 뒤집힌 칼과 같은 이상한 문양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고,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그들은 다 함께 일정한 박자로 묵주의 다음 구슬로 손을 이동했다.
그 이상한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관중석의 이들은 뜨거운 기대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이 일렁이면서, 마주 보고 선 마법사의 스태프끼리 연결되는 반투명한 묘한 흰색의 선이 바닥의 흙바닥 위에 그려졌다.
쿵쿵, 쿵, 쿵쿵.
스태프가 바닥을 찍는 일정한 간격의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지다가, 흙바닥 위의 선이 모조리 완성되는 순간 모든 마법사가 행동을 멈췄다.
그 고요함 속에,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듯한 높다란 흰 모자를 쓴 마법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라, 깊숙한 곳에 있던 숨어 있는 대지여.”
그 선언과도 같은 명령에, 마법진 전체가 빛이 나며 그곳에 있어선 안 될 것들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거기에서 솟아오른 것은 용암이 끓어오르는 대지와 그 위에 복잡하게 얼기설기 얽혀 있는 돌다리들, 그리고 관중석에서조차 까마득히 높게 고개를 꺾어야 간신히 보일 듯하게 높게 솟은, 단 하나의 첨탑.
주변을 밝히는 빛의 구들이 그 모든 것을 더 아름답게 비추었다.
히히히힝-!
그리고 그 첨탑의 가장 높은 곳에는, 비상식적으로 거대한 새카만 말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는 그 말의 등허리에는 그 어떤 새보다 더 아름답고 거대한 날개 한 쌍이 돋아나 있었다.
“오, 오길 잘했어! 나이트메어다!”
“이번 대회도 규모 대박이다! 저걸 실물로 보다니!”
“미쳤다!”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우레와도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칼그림자의 날 대회장 무대는 항상 마탑에서 관례적으로 준비해 왔던 것이고,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그 때문에 이 대회장을 보는 것은 세티야 가 가주나 황제조차도 처음이었다.
황제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박자 맞추어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를 즐기며 대회장을 바라보았다.
‘나이트메어라. 재밌는 안배를 했군.’
나이트메어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마물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강한 몬스터는 다시 되살려 내는 게 위험했기에, 차라리 저런 정신 계열 공격을 하는 마수들이 칼그림자의 날에 출현하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출전하는 사람 입장에선 그다지 반갑지는 않지. 나도 붙어 봤지만…….’
나이트메어는 사람의 속내를 정말 지독하게 후벼 파서, 가장 상기하기 싫은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게 좋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황제는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산체스 황제의 시선이 천천히 입장하고 있는 네 명의 결선 진출자에게 가 닿았다.
아이작, 비야키, 샤를로테, 그리고 요제프 황자.
각 조에서 두 명씩 결선에 올라오기 때문에 총 여섯 명이어야 맞았지만, 1, 2조에서 올라왔던 다른 참가자 중 둘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결선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불참 선언을 했다고 발표되었다.
황제의 눈길은 넷 중에서 가장 왼쪽에 선 흑발의 황자에게 가서 멎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말이 안 된다.
열두 살에,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방금까지 보였던 요제프의 무위들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기특했다.
요제프의 검술 자체는, 대단한 기교도 없는 황궁 검술의 기본 중의 기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황제의 마음을 울렸다.
재능도 재능이었지만, 지금까지 배운 가르침들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을지 눈에 선히 보여서. 리카르도처럼 대단한 시설에서 잘난 스승들을 두고 수련한 것도 아니면서.
‘지금까지만 해도 이례적이지만 나이트메어를 이겨 내는 정신력까지 있다면, 정말로 지켜볼 만하지.’
황제가 요제프의 이름을 연호하는 다른 관중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사회자가 황제 폐하께 연설을 부탁드린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어느새, 대회장의 세팅이 끝난 모양이었다.
산체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입을 뗐다.
“결선까지 진출한 이들에게 모두 영광과 평온함이 있으라. 한 명, 한 명이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무위를 보여 주길 기대한다.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 준다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는 황제의 연설에 다시 한번 관중석이 크게 술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