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공녀님 (68)화 (68/123)

68.

그녀는 어딘가 추억에 젖어서 중얼거렸다.

“요제프.”

요제프가 지체 없이 바로 대답했다.

“응.”

“요제프.”

“응.”

“요제프.”

“응.”

몇 번이고 불러도 왜냐고 묻지 않고 단조롭게 대답을 해 오는 것도 재밌었고, 그가 말하는 것 때문에 그녀의 정수리가 울리는 것도 재밌었다.

아름다웠다. 재밌었다. 요제프가 함께 있는 게 행복했고, 비록 계획하고 장담하긴 했지만 실제로 우승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대회에 참가했다는 것부터가 신이 날 정도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는데…….

샬롯은 자꾸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이겼다, 우리.”

“……응. 이겼네.”

“네 덕분이야. 네가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그 말은 정말, 샬롯의 진심이었다.

전혀 모르는 세계에 뚝 하고 떨어져서, 도대체 뭘 하면 좋을지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던 샬롯을 이끌어 준 건, 어쩌면 갑자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작은 남자아이였을지도 몰랐다.

마치 버려진 고양이를 주운 것 같은 심경이 되어서, 그 고양이를 살뜰하게 보살피고 먹이를 주고 또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 줘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던 거다.

물론, 저 자신을 위해서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역시 그가 아니었다면, 한참 동안 이 세계라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요제프는 샬롯이 뭐라고 해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잘도 끄덕이는 주제에, 이번만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덕분이라…… 너는 아무것도 몰라. 정말로.”

샬롯은 요제프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몸을 아예 뒤로 젖혀서 완전히 요제프에게 기대 눕듯이 했다.

요제프는 제 바로 앞으로 다가온 얼굴의 낯빛이 궁금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가까워.’

샬롯은 제 얼굴 바로 앞에 요제프의 얼굴이 있는 것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요제프의 얼굴은 퍽 아름다웠고, 그 얼굴 위에서 빛무리가 쏟아지는 것을 보는 건…… 정말 완벽하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샬롯.”

웬일로 요제프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대답하려다가, 요제프의 입술이 너무 가까워서 그의 숨결이 간지러워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이었다.

- 지금부터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뭔가 진지한 기색이던 요제프가 아무렇지도 않게 샬롯을 다시 일으켜 앉혀 주었다.

* * *

박수갈채 속에 단상에 오른 두 아이는, 거대한 단상에 비해 너무 조그마해 보였다.

쏟아지는 거대한 박수 소리에 비해서도, 둘에게 함께 주어진 몇 단이나 되는 큰 트로피에 비해서도.

“세상에, 샬롯이. 샬롯이 지금…… 우승한 거야? 샬롯이 우승했어요, 어머니. 저것 좀 보세요.”

제롬은 당장이라도 단상 위로 뛰어오를 사람처럼 흥분해서 계속 말을 주워섬겼다.

카밀라는 그런 제롬에게 좀 진정하라는 뜻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공식 석상에서 그녀를 어머니라 칭하다니, 제롬은 정말 제정신이 나갈 만큼 놀란 게 틀림없었다.

단상 쪽을 쓱 넘겨다 보던 카밀라의 시선이, 일순간 단상 앞으로 다가와 서던 황제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너구리 같은 늙은이. 요제프 황자를 갑자기 뭘, 어떻게 한 거야?’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카밀라 혼자만은 아닌지 황제의 눈도 그녀를 추궁하듯 바라보았다.

‘……웃기지도 않는군. 정말 너구리라니까.’

“저, 저는 일단 단상 아래로 가서 샬롯을 마중해야겠습니다.”

“그래, 다녀오거라.”

“혹시 어머니께서도……?”

“다녀오거라. 나도 곧 합류하지.”

“네.”

안절부절못하며 멀어지는 제롬의 뒤로, 역시 놀란 얼굴로 눈이 동그래진 러슬이 얼른 뒤따라갔다.

카밀라는 혀를 찼다.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저 표정을 숨기는 법도 모르는 부자를 보기만 한다면 세티야 가 내부에서도 이번 대회의 결과에 대해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알 텐데.

그녀도 놀랐다.

지금 체이커 제국에서 상대를 쉬이 찾기 힘들다 일컬어지는 카밀라 세티야임에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단상 위에서 볼을 붉히고 있는 샤를로테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저 귀여운 얼굴로 말도 안 되는 무위를 선보인 거다, 지금.

속에 그런 대단한 힘과 실력,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 체구로.

톡톡톡.

톡톡톡.

카밀라는 오른손으로 검집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오늘 아침만 해도, 오늘의 대회가 끝나면 세티야 가에서 몇 명의 후계자 후보들을 추려 낼 수 있을지에 관한 생각과 아이작이 우승하게 되면 무엇으로 치하해야 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은 두서없이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오히려 아무 생각에도 집중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긴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시기예요.’

문득, 아이작과 러슬, 샬롯과 비야키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샬롯에게 그런 약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허물고 웃었다.

“아하하. 정말, 유쾌한 꼬맹이군.”

그저 당돌하기만 한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 말도 안 되는 다짐이 전략적인 거였다니, 얼마나 웃긴지 모른다. 정말로, 우승할 자신이 있어서 한 말이었다니.

제법 길었던 웃음이 그치자, 카밀라는 어딘가 흐뭇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황후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황제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것은 모두 뒷일이었다.

그녀는 당돌하게 제 의견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좋아했다.

게다가 거기에 실력까지 뒷받침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

그 소원이 도대체 뭐길래 이런 대단한 내기를 걸었는지, 어디 한번 들어 볼 용의가 무척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시선은 샬롯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는 생각.

카밀라는 나라의 국경을 돌보느라 집안 꼴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일일이 신경 쓸 틈이 자신에겐 절대로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직접 샬롯을 지도해 준 적도 없는 게 미안하진 않았지만, 그런데도 저렇게 재능을 발화해 준 게 고마웠다.

제롬 그 자식이 처를 일찍 잃고 자식을 엉망으로 돌봤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샬롯이 저렇게 반듯하게 자라 준 게 고마울 수밖에.

그리고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그건가?’

샬롯을 보고 있는데, 검사로서 단 하나의 흠도 잡을 것이 없는 완벽한 자태며, 친구를 구해 주는 마음 씀씀이 하며…… 무엇 하나 제 아비와 닮지 않은 그런 점들이…….

‘예뻐 죽겠군. 손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더니, 이게 그건가.’

* * *

“칼 그림자의 날, 젊은이들의 무위를 가리기 위한 대회에서 이렇듯 많은 젊은이들의 뛰어난 기량을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하오. 특히, 그중 두 명의 우승자인…….”

황제는 단상 위에 나란히 올라 서 있는, 마치 동화 속의 주인공 같은 두 명의 소년, 소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과 분홍색 머리카락의 소녀.

그 둘의 표정이 워낙 결연했기 때문에 순간 그들의 나이를 잊게 되지만, 대회 우승자의 징표인 화관을 나란히 받쳐 쥐고 있는 자그마한 손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는 거다.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두 인재가 이렇게도 어리다는 것을.

‘이렇게 어린데…… 자라면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 짐작도 안 돼.’

황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 실력을 직접 입증하는 자리를 갖는 일은 많이 없어졌다. 게다가 황제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직접 대회에 참가하는 것에는 참 많은 애로 사항이 있기도 했고.

새카맣게 잊고 있던, 호승심과도 닮은 감정이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이, 제 앞에 가만히 서서 덤덤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요제프에게 오래 머물렀다.

‘……잘 자랐구나. 그동안…… 살았는지, 죽었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도.’

요제프의 얼굴에서, 어린 날의 제 얼굴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닐 거다.

산체스 황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라는 게 그랬다.

계속 권위적인 아버지로 행세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훌쩍 커 버린 아들에게 뛰어넘음을 당하게 된다.

솔직히 그런 순간을 그렇게 많이 상상해 보지는 않았다.

제 아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이 나라를 짊어지는, 그 어깨가 무겁고 책임이 막중한 일을 이어 나갈 만큼 잘 자라 주었으면 좋겠다고 매 순간 바라면서도 도저히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런데 정말로, 이제 머리가 큰 자식에게 제 권위가 위협당하는 기분을 처음 느꼈다.

그것도 겨우 열두 살의 막내에게.

산체스는 그게, 기꺼웠다.

요제프에겐 미안한 일들뿐이었는데도.

산체스가 그를 위하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요제프도, 다른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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