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뭐?”
카밀라가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지 말고, 몸 관리를 잘 해야 해요. 실건실제(失健失諸)라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잖아요. 아셨죠?”
샬롯은 제가 말하고도, 뭔가 지나친 참견을 했다 싶었다.
어쩐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어쩔 줄 모르고 후다닥 발을 옮겼다.
항상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카밀라라서 그런지, ‘마음에 든다.’라는 제 고백이 새삼스럽고 웃겼다.
카밀라는 샬롯이 사라진 곳을 오래 바라보다가 흐물흐물한 미소를 입매에 매단 채로 소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녀의 눈이 테이블 위에 아직 남아 있는 디저트들에 가 닿았다.
“……정말, 당돌하긴.”
머리가 꽉 들어차게 복잡하면서도,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제 키의 반이나 될까 싶은 조그마한 여자아이인 손녀가 제게 소원을 빈다길래 저는 뭐, 뻔한 소원들을 예상했다.
그렇게 대단한 무위를 선보였음에도 그리도 고요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아이다. 아이라도 단순히 아이의 사고방식으로 볼 일이 아니었다.
목적이 있을 것 아닌가.
그 아이가 이렇게까지 노력을 해 온 목적이.
아이작은 척 보기만 해도, 가주가 되어 이 가문을 휘두르겠다는 욕망이 절절 끓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손녀인 샬롯도 그런 걸 바랄 줄 알았다.
뭐, 가주가 되게 해 달라는 소원까진 아니더라도, 가주가 되는 시험에 특혜를 달라거나. 혹은 지금까지 제가 받았던 부당한 대우에 대해 소명해 달라거나.
‘……그런데. 뭐라고? 세티야 가문의 2황자에 대한 지지가 얼마나 그릇되고 맹목적인지 한번 재고해 달라고?’
“……하하하.”
카밀라는 한쪽으로 밀어두었던 술잔을 찾아 든 채로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런 단어는 어디서 배웠고, 그런 실력은 또 어디서 나왔을까?
제롬에게서? 아니…… 제롬은 실력이 모자란 녀석은 아니었지만, 시야가 좁은 녀석이었다. 제 부인을 잃고 나서는 더 멍청하게 굴기도 했지만, 그 꼴이 불쌍해서 내버려 뒀더니 그간 제 자식 간수도 엉망으로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카밀라는 샬롯이 어떻게 이렇게 강해진 건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강해진다는 것은, 정직한 일이다.
노력했으니 강해졌겠지.
그리고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런 것보다 지금 당장 생각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를 찾는 데에 아주 익숙했다.
조금 전, 소파에서 제가 한 농담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던 샬롯의 표정이 카밀라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보다, 샬롯 그 아이.’
카밀라의 주홍색 눈동자 속에 깊은 그늘이 드리웠다.
오늘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도, 가주에게 제가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요구할 때도 마치 어른처럼 굴더니만.
할머니라는 단어에, 너무 놀란 것처럼 당황해하는 그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못 본 체하고 넘어갔지만…….
‘……제 어미가 너무 일찍 죽었어. 그나마 러슬은 좀 낫지만, 샬롯은 엄마 사랑도 제대로 못 받고 힘들게 자랐지. 그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정붙일 곳 없이 자란 아이처럼 굴 줄은 몰랐다.
카밀라는 다시 습관처럼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도대체가 제롬 그 자식은 뭘 한 거야?’
그나마 최근에 조금 시간이 난 거지, 그간 카밀라는 정말 집안 대소사에 관여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전장을 누비지 않으면, 적국에 협상하러 갔다. 그것조차 아니면 황궁에서 머물렀고, 각 기사단을 돌며 지도를 해 주기도 했다.
한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 있을까 싶게 많은 일을 혼자 다 떠안고 살았다.
로룸이 죽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샬롯, 그 아이에겐 몹쓸 짓을 했군.’
쓰게 웃던 카밀라의 머릿속을 이어 점령한 건 요제프 황자가 샤를로테에게 청혼하던 장면이었다.
‘가족’이라는 단어 하나에 펑펑 울던 샬롯의 모습.
‘……그래서였나.’
그녀의 입꼬리에 매달려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버석하게 말라 버렸고, 그녀의 주홍색 눈동자가 허공을 매섭게 쏘아봤다.
일단 시각적으로는 귀엽고 깜찍한 커플이었다.
그런데 본질을 파고들면, 정말 평온하기 짝이 없는 작금의 정치 구도에 폭풍 같은 분란을 몰고 올 수도 있는 약혼이었다.
‘솔직히 말릴 거라면, 분위기가 뭐가 어떻게 됐든 그 자리에서 말렸어야 해.’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
황후가 그 자리에서 떠나 버린 뒤의 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말릴 사람을 찾자면 그녀 아니면 황제였는데. 황제는 손뼉까지 치며 둘의 사이를 축복했다.
그리고 카밀라 그녀는…….
‘……요제프 황자의 처지를 알면서도, 말릴 수가 없었어.’
왜냐.
그녀는 손에 쥔 술잔을 쭉 들이켰다. 알싸한 알코올의 무거운 느낌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감각이 싫지 않았다.
‘내가 오늘의 샤를로테를 만드는 데,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나만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야 괜찮은데 아마도 세티야 가 전체가. 아무것도 한 게 없으니까.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하라, 마라 하느냔 말이지.’
달그락.
그녀는 잔이 바닥을 드러내자 습관적으로 다시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녀의 술잔 안에서 얼음들이 잘게 부딪혔다.
지금의 정계가 이렇게 고요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은 현재 세력을 단단하게 굳힌 이들이 지지하는 세력이 모두 같기 때문이었다.
2황자 리카르도.
하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3황자 요제프에 대해 너무 많은 이들이 인식을 새로이 했고, 더불어 세티야 가문과 아무런 끈도 없었던 녀석이 알차게 제 손녀를 이용해 먹었으며, 심지어는 가만히만 있었어도 반은 갔을 멍청한 2황자 리카르도는 제 이미지를 어이없게 깎아 먹었다.
‘……이거, 까딱하다간, 정치계에 평지풍파가 일겠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대응이 늦어선 안 될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어…….’
카밀라가 막 종을 두드리려는 순간,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손님인가?”
노크 소리도 내기 전에 기척을 알아채고 질문을 던지는 건, 카밀라의 오랜 습관이었다.
비서도 그 점을 알아,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 서신이 왔습니다.”
“서신? 어디서? 왜?”
끼익.
문이 열리고, 그녀의 비서 웨인이 안으로 들어오며 성미 급한 카밀라 공작에게 용건을 먼저 말로 전해 주었다.
“탄티누스 후작가에서, 지금 당장 만나 뵙고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지 요청하셨습니다.”
탄티누스 후작가.
카밀라가 예상한 이름이었다.
라모레이 탄티누스, 그녀야말로 카밀라만큼 머리가 복잡할 터였다.
그녀의 여동생은 1, 2황자의 어머니인 황후였으며, 오늘 그녀의 딸을 구해 준 건 요제프 황자와 약혼을 하기로 한, 바로 이 세티야 가문의 직계 막내딸이다.
카밀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답신하지.”
그리고 카밀라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시종을 불러 샬롯의 예복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 오도록 했다.
* * *
카밀라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온 샬롯이 방으로 막 올라가는데, 계단의 중간쯤에 베티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샤, 샬롯 아가씨.”
베티의 얼굴에는, 한 번에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안도와 기쁨이 뒤섞인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샬롯은 달려가서 베티의 허리에 매달리듯 그녀를 안았다.
“베티, 봤어?”
답삭 안긴 채로 고개를 들고 물어보자, 베티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꽁지로 묶은 부드러운 갈색 머리가 위아래로 나풀거렸다.
“봤어요! 봤어요. 카밀라 님께서 배려해 주셔서, 저희 자리도 꽤 좋았답니다!”
“나 봤어?”
“그렇다니까요! 나이트메어를 타고 날아오시는데, 진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저 혼자 펑펑 울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베티는, 말하면서도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샬롯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그거 봐, 내가 보호대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데,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무튼, 저는 앞으로 여기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신전은 꼭 다니기로 했다니까요?”
“……왜? 거기서 빌었어?”
“네. 완전 영험하죠?”
어떻게 생각하면, 그저 고용인과 유모의 관계일 뿐인데. 샬롯으로선 그녀가 저를 위해 신전에까지 갔다는 게 고맙기도 했고, 제 우승의 원인을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는 게 웃기기도 했다.
샬롯은 작게 웃으며 베티를 놓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약간 말문이 막혀서 멍하니 제 방 안을 들여다봤다.
방 안에는 오늘 아침에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휘황찬란한 꽃장식들과 세티야 가의 깃발이 여기저기 보기 좋게 장식되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샬롯이 좋아하는 디저트들이 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제법 커다란 케이크까지 있었다.
어쩐지, 카밀라의 방에 갔을 때 갑자기 이 밤중에 웬 디저트가 어디서 그렇게 많이 났나, 하고 생각했는데…….
평소에 자주 얼굴을 보던 키친 메이드들이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모양이었다.
‘분명 다들 방금 막 도착했는데…….’
케이크야, 누가 우승하더라도 상관없으니 만들어 놓을 수도 있지만, 단것을 좋아하지도 않는 오라버니들의 입맛을 떠올려 봤을 때 누가 봐도 저 디저트 한 상은 원래도 샬롯 자신을 위한 거였다.